299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로날드가 고개를 쑥 내밀며 힐끗거렸다. 피시는 펜던트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림을 로날드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 영지.”
“아…….”
“남들은 무섭고 기피하지만, 하이에나는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영지.”
작은 펜던트 속엔 마치 지금 피시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시모네가 그린 하이에나의 영지와 바다의 절경이 담겨 있었다.
*
“폐하. 덥지 않으세요?”
“나쁘지 않은데. 괜찮구나.”
영지 내에 이렇게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니. 예전에 왔던 건 정말 납치를 당했던 거였구나 싶은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머물렀는데 공작의 성을 제외하곤 전부 처음 와 보는 곳뿐이라.
호수 위에 띄워 놓은 배에 올라탄 이엘의 옆엔 양산을 든 포레스트가 앉았고, 그녀의 맞은편에 로빈과 일라이저가 앉았다. 그리고 뱃머리엔 배의 방향을 조절하기 위해 하트를 비롯한 하이에나 우논 두 명이 서 있었다.
“공작의 영지에 이렇게 커다란 호수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군.”
“작년에 확장 공사로 넓혔습니다. 원래는 호수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작았습니다.”
“이렇게 영지가 아름다운 줄 알았더라면 시찰을 서두를 것을 그랬네.”
“진작 폐하께 말씀드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좋아하실 줄 알았다면 일찍 주청을 드렸을 겁니다.”
이엘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눈동자만 굴려 로빈을 쳐다봤다. 이틀 전, 소모라에 들어간 앤디와 오드가 렉토스를 발견했고 그를 제도로 납치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이틀간 로빈의 태도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지만 그는 평소와 똑같았다. 아직 소식을 전달받지 못한 걸까? 아니면 단순한 탈출 사고로 보고 조용히 뒷조사를 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로빈은 언제나처럼 얼굴 위에 가면을 씌운 듯이 고요하고 평온한 낯짝이었다.
“그나저나 늑대의 공작은 여전히 몸이 좋지 않은가 봅니다. 이곳에 온 뒤로 얼굴 보는 것도 쉽지 않군요.”
잔잔한 호수에 손을 넣어 파동을 일으킨 로빈이 아무렇지 않게 노아의 근황을 꺼내 물었다. 그의 말처럼 노아는 필요한 때가 아니고서는 머무는 숙소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물론 로빈의 영지에선 되도록 마주치지 않게 거리를 두자고 제안한 건 이엘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두문불출할 줄은 몰랐다. 저희가 머무는 저택엔 뱀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니 그 정도로 할 필요까진 없는데도…….
그러나 그를 향한 걱정은 뒤로하고, 이엘은 갑작스런 노아의 이야기에 기분이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러게 말이야. 그냥 제 1기사단과 함께 제도에 남아 경계를 지키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그녀의 냉소 섞인 대답에 로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늑대와 폐하의 관계가 생각보다 더 나쁜 건가? 곤란한데.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로빈은 제 앞에 앉은 이엘과 포레스트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래도 이쪽에서 의외의 수확을 얻은 건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그녀의 마음속에 노아가 오롯이 자리 잡지 않았다는 건, 달리 말하면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로빈은 그녀의 틈을 만들어 줄 존재만 있다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라 해도 좋았다.
사실 로빈은 포레스트보다는 다른 놈들에게 더 큰 기대를 걸었다. 포레스트는 죽은 도미닉을 닮았으니, 그저 그녀의 과거를 건드리는 정도로만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그녀의 취향이 한결같았던 건지, 저 어린 뱀이 황제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 것에 성공했다.
“폐하. 그 아이는 할 줄 아는 게 꽤 많습니다.”
로빈은 그렇게 말하며 포레스트를 향해 눈짓했다.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니 맘껏 네 자랑을 하라는 뜻이었다. 주인의 허락에 어린 뱀은 신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엘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신을 보는 포레스트를 외면하지 않았다.
“음, 그런가? 정말이니, 포레스트?”
“예, 폐하! 현악기도 잘 켜고 노래도 잘 불러요. 춤도 잘 추고, 그림도 잘 그린답니다.”
로빈은 꽤 오랜 시간, 그녀의 마음에 들 만한 우논들을 추려내어 가꾸고 훈련시켰다. 다른 이종족들이 그녀가 수컷을 고르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때, 자신은 적극적으로 그녀의 마음에 들 법한 일을 꾸몄다.
지금 그녀의 옆에 앉은 포레스트가 제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노래를 한 곡 불러 드려도 괜찮을까요?”
포레스트의 새하얀 얼굴에 수줍은 홍조가 번졌다. 그 모습이 기묘했다. 살랑거리는 태도가 심히 작위적이었는데도, 저렇게 대놓고 사랑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는 건 또 진심인 듯했으니까. 이게 말로만 듣던 뱀의 유혹인 걸까. 이엘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악기 하나 없이 드넓은 호수 위에서 펼쳐진 포레스트의 노래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아니, 그의 목소리가 악기 그 자체였다. 심드렁했던 이엘마저 끝에 가서는 홀린 듯이 포레스트를 쳐다보고 말 정도로.
“폐하께 큰 즐거움을 드릴 수 있는 아입니다. 도미닉처럼 욕망에 찌든 놈이 아니니, 황궁에 데려가셔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공작이 많이 달라졌군. 이전의 그대는 도미닉이 짐의 곁에 있는 것에 진저리를 치지 않았던가. 이렇게 순종적으로 구는 모습이 퍽 낯설어.”
“그땐 제가 감히 폐하의 우위에 서려 했으니까요.”
“…….”
“하지만 지금은 제 주제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엘은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있어도 로빈을 절대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유클리드를 받아들이면 들였지, 로빈만은 제 울타리 안에 둘 수 없는 존재다. 그것만은 확신한다.
그러나 저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로빈이 마음을 바꾸어 먹은 것처럼 보여서. 그가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하고 약삭빠르게 움직인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3년이란 세월 동안 미운 정이라도 든 건지.
그게 아니면 이제 저 정도 수작이 제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음을 느껴서인 건지, 이엘은 작위적인 로빈의 모습이 더는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감정을 숨기고 서로의 틈을 노리기만 하는 기 싸움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볼까. 짐은 공작이 영지로 초대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공작을 의심하지 않은 적이 없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묻고 싶군.”
“…….”
“공작이 이렇게까지 해서 짐에게 얻고 싶은 게 무엇인지.”
그 말은 이런 시시덕거리는 대화 따위는 그만하고 본론이나 말하라는 의미였다.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배 위에 올라타 있던 자들이 모두 긴장하며 경계했다.
“폐하께서 하루라도 빨리 안정된 환경에 계시길 원합니다.”
“…….”
“그러기 위해 부군을 들이시고……,”
“그만.”
손을 들어 로빈의 말을 잘라 낸 이엘은 한쪽 눈가를 찌푸린 채 그를 쳐다보았다.
“공작도 다른 이들과 똑같군. 내가 잠깐 잊고 있었네, 그대가 제일 암컷에 미쳐 있었다는 걸.”
“…….”
“고루한 대답이나 듣자고 이런 시간을 내준 게 아닌데. 하트 경,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 배를 돌려라, 피곤하구나.”
잠깐이라도 그가 제게 순응했다고 생각한 자신이 우스웠다. 그래, 이렇게 해야 뱀이지. 이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지겹다는 듯 시선을 돌려 버렸다. 차라리 침실로 돌아가 잠을 자는 게 더 의미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그녀의 명령을 받은 하트가 능력을 사용해 배를 돌렸을 때였다.
“종족 번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저는 그것에 대한 희망을 거의 버렸습니다.”
연구실이 박살났을 때부터 미래를 향한 희망은 사라졌다. 오직 그녀만이 모든 종족의 미래가 될 터였으나, 그녀가 원치 않는다. 게다가 원치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조건까지 갖고 있다.
“말 그대로입니다. 정말 폐하께서 안정적인 환경에서 황권을 다지시길 바랄 뿐입니다.”
“…….”
“올리세스 윌터에 관해 궁금하신 게 많으시겠지요. 제가 그와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테니.”
“이제야 들을 만한 이야기가 나오는군. 하트 경, 배를 멈춰라.”
이엘은 등 뒤에 받쳐진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대어 반쯤 누운 채 로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전에, 포레스트.”
“네, 각하.”
“자리를 이동해라.”
“네?”
“저 배를 타고 먼저 성으로 돌아가.”
로빈은 혹시 몰라 띄워 놓았던 작은 쪽배를 가리켰다. 포레스트가 당황한 건지 눈을 찌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이엘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폐, 폐하…….”
“포레스트.”
“네, 폐하!”
포레스트는 그녀가 자신의 손을 들어 줄 거라 의심치 않았다. 누가 봐도 폐하께선 공작님보다 내게 더 관심이 많으시니까. 그는 환하게 웃으며 이엘의 옆으로 더 다가가려 했으나, 이엘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러곤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저었다.
“뭐 하니? 어서 저 배로 자리를 옮기렴.”
“하, 하지만…….”
“나는 말을 두 번이나 하는 걸 무척 싫어해.”
“…….”
“짐을 지겹게 하지 말렴.”
포레스트는 입술을 꽉 깨물며 다른 배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포레스트를 비롯해 근위대를 태운 배는 먼저 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결국 배에 남겨진 건 이엘과 로빈, 일라이저와 하트뿐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나? 나머지는 모두 입이 무겁고 짐이 신뢰하는 자들뿐이니.”
“예, 폐하. 충분합니다.”
줄곧 양산을 들고 있던 포레스트가 떠났기 때문에, 하트는 능력을 사용해 배 위에 달아 놓은 그늘막을 움직여 그녀의 머리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그때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늘막을 건드리는 탓에 천이 움직이는 소리가 잠깐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이엘은 로빈이 중얼거리는 입 모양을 봤다.
“……뭐?”
그러나 로빈은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려는 듯 망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며 이엘의 물음을 태연히 피했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방금 마녀 사냥이라고…….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폐하?”
“아아, 괜찮다.”
바람으로 인해 그녀가 놀랐다고 생각한 건지, 하트는 재빨리 능력을 사용해 바람에 펄럭거리는 천을 멈췄다. 그리고 고요해진 배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조용해진 듯하니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
“저는 올리세스의 반대편에 서기 위해 그와 손을 잡았습니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분명 올리세스 윌터가 마녀 사냥을 준비하고 있다고, 내게만 보이게 중얼거렸다. 로빈의 바로 옆에 앉은 일라이저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테고, 하트는 바람에 흔들리는 배의 방향을 잡기 위해 능력을 사용하느라 그를 보지 못했어.
……일부러 나만 볼 수 있게 말한 거야. 지금 모두가 듣는 말은 로빈이 전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