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시찰을 핑계로 이틀 전에 로빈과 함께 들렀던 소모라는 예상대로 고요했다. 비옥한 땅의 역할만 충실히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돌아오는가 싶었는데, 뜻하지 않게 렉토스를 만날 줄이야.
“근데 다른 인간들과 함께 있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단순히 노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일라이저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렉토스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지금 자신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은 로빈의 영지였다. 솔직히 놈이 일부러 함정에 빠뜨리려고 벌인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폐하가 아닌 앤디가 가는 것이니 괜찮소.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온전히 늑대의 탓으로 돌리면 될 것이고, 대외적으로 폐하와 늑대의 사이가 좋지 않으니 오히려 폐하께 해가 갈 일은 없을 테니까.”
노아의 설명을 지켜본 일라이저는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폐하께서 안전하시다면 그만이다.
“좋아. 이 일은 앤디 경에게 일단 맡기기로 하자. 뭐가 됐든,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앤디 경이 렉토스를 찾아내 제도로 데려간다면 로빈 쪽에서도 우리를 곧장 의심할 순 없을 거야.”
이엘도 이게 함정일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설령 이게 함정이라고 해도, 그를 꼭 확인해야만 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일을 그르칠 리 없는 앤디를 보낼 것이고, 그 곁엔 오드도 함께일 테니까.
“부디 수확이 있기를 바랄 수밖에.”
미리 뿌려 놓았던 씨앗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이제 수확하기 전까지 잘 자라도록 거름과 물을 적당히 주는 일만 남았다.
“폐하. 밖에 어슬렁거리는 자가 있습니다.”
창가 쪽에 서 있던 일라이저가 누군가를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검은 머리색이었지만 늑대는 아니었다.
“뱀인 듯합니다.”
로빈의 명령으로 이곳은 뱀의 출입이 금지되었을 텐데, 누가 겁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거지? 노아가 검집에 손을 올리며 일라이저가 있는 창가 쪽으로 향했다.
일라이저의 추측처럼 뱀인 듯했다. 놈은 깔끔한 귀족 복식 차림으로 머리를 정갈하게 정리한 채, 제 품 안에 꽃을 가득 끌어안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누군가와 겹쳐 보여 노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포레스트인가?”
성큼성큼 걸어와 일라이저와 노아의 옆에 선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포레스트? 그게 누구지? 노아와 일라이저가 서로를 쳐다봤지만, 두 사람은 모르는 존재였다.
“귀엽지 않나? 꼭 도미닉을 닮았거든.”
“도미닉이라면…… 전에 죽은 뱀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이용하셨다가 반란을 일으켜 로빈에게 죽었던…….”
“응, 맞아. 로빈이 내게 뱀들을 진상한 적이 있었거든. 제각기 누군가를 연상케 하는 얼굴을 가진 우논들이었지. 포레스트는 죽은 도미닉의 얼굴을 닮은 아이야.”
“…….”
“근데 또, 하는 짓은 피시를 닮았어.”
그녀의 마지막 말에 하트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다. 저런 하찮은 뱀 따위의 어디가 피시를 닮았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낯이었다. 이엘은 엷게 웃으며 설명해 주듯 첨언했다.
“로빈에게서 교육을 아주 잘 받은 모양이야. 소름 끼칠 정도로 피시의 습관을 닮아 있었거든.”
덧붙여진 설명에도 하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며칠 전 온실에서 놈을 처음 봤을 때, 그는 포레스트의 무능력을 단번에 알아챘다. 정말 곱상한 얼굴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저놈의 어디가 피시와 닮았단 말인가. 적어도 지금의 피시는 제 한몫 정도는 해내고 있으니 비교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 부분은 아무리 폐하께서 하신 말이라 해도 납득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하트는 끝끝내 동의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한편 노아는 이엘의 말을 아주 조금 이해했다. 꽃을 잔뜩 끌어안고 수줍은 듯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볼을 붉히고 있는 놈의 모습이, 마치 예전에 제 영지 내 성전 뜰 앞에서 하염없이 이엘을 기다리던 미치광이 셋째 왕자를 닮았던 것이다. 물론 불순함이 전혀 없던 피시 쪽이 훨씬 나았지만.
“이번에도 이용하실 겁니까?”
“응, 쓸모가 있다면, 기꺼이.”
노아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답한 이엘은 팔짱을 낀 채 창밖 너머의 남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확실히 피시가 연상될 수밖에 없네. 노아의 영지에서 어린 피시를 처음 만났을 때 그도 저렇게 꽃을 한 아름 안고 오매불망 자신이 성전 뜰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포레스트의 모습에서 자꾸만 피시의 모습이 느껴져 불쾌했다. 어차피 그래 봤자 저쪽은 이용해 먹을 미끼에 불과하지만.
그나저나 피시는 괜찮을까? 잊고 살았던 옛 친구의 기억으로 혼란스러운 건 아닐까, 이엘은 오드에게 그의 안부를 물어볼 걸 그랬다는 생각에 후회가 조금 밀려왔다.
*
“피시. 정말 괜찮겠어? 넌 안 가도 돼. 어차피 가는 길은 오드 님이 이동시켜 주실 테니 스완도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다.”
“아니야. 나도 그 사람한테 궁금한 게 있어.”
“……좋아. 네 뜻대로 해.”
패티스는 피시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오히려 그의 눈빛이 자신보다 더 생기 있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쉬지 못한 게 며칠째더라. 패티스는 그 생각을 하며 제 이마를 짚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논이라고 해도 체력이 한결같은 건 아니었다. 한껏 예민해진 채 몇 날 며칠을 도서관을 오가며 밤을 지새운 터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패티. 너야말로 좀 쉬는 게 어때. 안색이 안 좋아 보여.”
“괜찮아, 난. 신경 쓰지 말고 조심히 다녀와. 쓸데없이 오지랖 부려서 괜한 일 벌이지 말고, 넌 되도록 나서지 마.”
“응. 조심할게. 너도 조심해, 패티.”
기가 찼다. 피시의 걱정을 받는 날이 오다니……. 그러나 패티스는 미간만 찌푸릴 뿐, 예전처럼 제 형에게 면박을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귀찮다는 듯 고갯짓으로 오드가 있는 곳으로 피시를 보냈다.
“그럼 오드 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의외군요.”
“네?”
웃음이 담긴 오드의 말에 패티스의 표정이 또 구겨졌다. 저를 놀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대충 무엇인지 예상한 탓이었다.
“백작이 이렇게 빨리 마음을 정할지 몰랐습니다.”
“오드 님이 그렇게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로, 그렇게 우리를 밀어 넣고 있잖아요. 그러니 저도 마음을 빨리 정한 겁니다. 오드 님이 이 일에 적합한 게 피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선택은 백작이 한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다만……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모두가 갖고 있으니까요.”
신을 떠났던 인간들도 벼랑 끝으로 몰리니 신을 붙잡고 매달린다. 하물며 자신들이라고 다를까. 의지할 곳이 필요한 건 이종족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오드 님. 당신을 믿고, 당신의 뒤에 선 신을 믿습니다.”
“…….”
“전에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죠. 신께선 모든 인간을 버리신 게 아니라고. 버릴 수 없는 인간이 있었고, 오드 님은 그를 위해 살아남으신 거라고요.”
“그랬지요.”
“그게 폐하라고 믿어요.”
“…….”
“이렇게 말하는 게 우스운 것 알지만, 저는 신의 편에 설 겁니다. 오드 님, 당신의 선택을 믿기로 했어요.”
어쩌면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큰 전쟁이 될지 모르겠지만, 패티스는 제 남은 삶을 모두 그녀에게 바치기로 작정했다. 어차피 그녀가 죽고 나면 의미 없는 삶이 될 테니,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도 온몸으로 헌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중에 폐하께 전해 주십시오.”
“말씀하세요.”
“힘내시라고. 견디시라고.”
“…….”
“어떤 것도 쉽게 포기하지 마시고, 부디 견디고 또 견디셔서, 끝내 저희가 안겨 드릴 승리를 거머쥐시라고요.”
그녀의 희생정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극한의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면, 이엘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를 포기할지 모른다. 패티스는 그녀를 잘 알고 있다. 이엘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리고 또한 안다. 이런 절망적인 세상에서 이엘이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그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무언가를 지키고, 다른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이엘은 삶의 목표를 그렇게 정한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삶은 이종족과 달리 짧고 짧으니까. 목표를 정하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지금 이 삶을 어떻게든 연장하고 견딘다는 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함 때문이리라.
“걱정 마세요, 백작.”
“…….”
“폐하께선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오드가 자신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오드의 말이 가져온 위안이 얼마나 크던지, 패티스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오드의 입에서 나온 저 한 마디면 자신은 충분하다.
무슨 이유가 됐든, 폐하께서 스스로를 포기하시지만 않으면 된다.
“그럼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폐하도, 피시도.”
“네. 곧 다시 뵙죠.”
그 말을 끝으로 오드는 스완과 로날드, 피시와 앤디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로날드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고, 스완과 피시는 각각 다른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리고 앤디 역시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먼저 호숫가에 들러 스완과 로날드, 피시를 보내 주고 오드는 앤디와 함께 소모라에 갔다가 상황을 봐서 이엘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는 모두가 떠날 준비를 다 마친 것을 확인하곤, 패티스와 별다른 인사 없이 네 사람과 함께 고니의 호수로 빠르게 이동했다.
“여긴 여전히 안개가 가득하네.”
오랜만에 호숫가에 오게 된 앤디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사이 스완과 피시는 커다란 로날드의 등에 올라타 오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마쳤다.
“감사합니다, 오드 님. 조금 후에 뵙겠습니다.”
“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랄게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오드는 앤디를 데리고 세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자, 이제 남은 건 우리야.”
스완의 말에 로날드가 하울링으로 답했다. 두 사람을 태운 늑대는 한 번 왔던 길이라 익숙해진 건지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늑대 위에서 피시가 스완을 불렀다.
“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야?”
“글쎄……요?”
“됐어. 편하게 말해.”
“음, 그럴까? 그냥 평범해. 어떨 땐 나보다 더 철없어 보일 때도 있거든.”
“네 아버지도 무리에서 외톨이야?”
“아니, 전혀. 너희랑 개념이 조금 다르긴 한데, 리더랑 비슷하다고 보면 될걸. 아마 선조 때 나자르로부터 능력을 받았던 게 영향이 있지 않나 싶어. 뭐, 나도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스완의 말에 피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봉인된 것처럼 시모네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스완의 아버지인 빈센트는 그게 나자르의 보호 때문이었다고 말했지만, 오롯이 그 이유만은 아니다. 나자르의 보호는 ‘고니’에게 걸려 있는 거지, ‘시모네’에게 걸려 있는 건 아니니까.
그 순간 피시는 인정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아프고 괴로워, 시모네 자체를 제 안에서 지워 버렸음을.
“저기, 네 친구라는 하이에나. 이름이 시모네였나?”
“응. 시모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데? 우리 아빠가 타 종족에 친구를 뒀을 줄 몰랐거든.”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가 어색했던 건지 스완이 관자놀이 쪽을 긁적이며 시모네의 존재를 물었다. 피시는 그의 질문에 아주 잠깐 침묵했다가, 곧 미소를 지으며 즐겁게 대답했다.
“다정하고 착해. 약하지만 약하지 않은 애였어. 그랬기 때문에 조이나의 선택을 받았겠지.”
“조이나라면, 네 누나? 차기 변경백이 되려 했다는?”
“응, 우리의 마지막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