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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96화 (296/488)
  • 296화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겠지. 신을 버렸다던 자의 입에서 신의 이름이 나오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의외라는 생각은 든다. 어제도 식사 자리에서 조르단 공작의 충심을 칭찬하지 않았었나. 근데 오늘은 또 늑대의 편을 들고 있다니. 마주치면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던 모습과는 상이했다. 그게 정말 나를 향한 충심 때문인가.

    ……아니면 어젯밤에 혹시 두 사람이 만나기라도 했었나.

    노아가 오늘 아침에 기사단 훈련을 잠깐 보러 갔었다는 보고를 하트를 통해 들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몸이 영 안 좋은 건지 식사도 거른 채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우논이라 해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몇 달이나 그녀의 곁을 지켰으니 지칠 만도 했다.

    하지만 분명 어제저녁만 하더라도 그런 기미가 안 보였는데. 이곳에선 거리를 두자고 했으니 아예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으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느낌이 찝찝하다.

    “폐하?”

    “아, 무슨 말을 했었나?”

    “날이 좋으니 산책이라도 하시는 게 어떨지 제안 드렸습니다.”

    “그럼…… 그렇게 할까.”

    자리에서 일어선 이엘의 뒤를 하트가 따랐고 로빈도 함께 일어섰다. 그녀가 허락하지 않은 터라 테이블에 홀로 남겨진 포레스트는 눈을 끔뻑거리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어떻게 눈에 띄었는데……. 여기에서 버려질 순 없어.

    “폐, 폐하!”

    가늘고 고운 목소리가 이엘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에스코트하기 위해 팔을 뻗었던 로빈도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포레스트를 쳐다봤다.

    “날이 뜨거우니, 제가 양산을 들겠습니다.”

    “…….”

    “허, 허락해 주신다면요…….”

    외형은 도미닉을 닮기는 했지만 그와는 전혀 다르다. 하는 행동은 오히려 피시를 닮은 듯했다. 그러나 피시처럼 순수함에서 기인한 행동은 아니었다. 이엘은 의도적으로 순진한 척 구는 포레스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햇빛을 막아 주렴. 함께 나가자꾸나.”

    잔뜩 붉어진 얼굴로 총총 달려온 포레스트가 양산을 펴서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

    “젠장…….”

    앤디가 두꺼운 책을 쾅 소리 나게 덮고는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왜 불안한 예감은 늘 이렇게 잘 맞는 건지……. 제 눈앞엔 오드의 침실에서 훔쳐 온 낱장의 페이지와 도서관에서 가져온 금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오드의 방에서 가져온 낱장의 종이를 쳐다봤다. 모서리 곳곳이 불에 그을렸지만, 페이지 수가 적혀 있는 하단 부분은 완벽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역시 제 예상대로 금서의 찢어졌던 부분과 페이지 수가 일치했다.

    “아냐.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아닐 수도 있지…….”

    다른 책일 수도 있고, 우연히 소실된 페이지 수가 일치한 걸 수도 있잖아? 세상에 책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설령 맞다고 해도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도 있어. 뱀들이 습격을 피해 도망칠 때 챙겨 가던 종이였다고 해도, 우리에겐 별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의 눈알은 죽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그에 따른 마땅한…… 위험한…… 이기에 이는 극소수의……. 이게 대체 어디에 필요하다는 걸까.”

    오드의 침실에서 훔쳐 온 종이에 적힌 내용을 천천히 읽던 앤디는, 서랍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글자를 적었다.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그리고 누구의 눈알일까.”

    이게 의미하는 바가 뭘까.

    이종족의 신체 일부가 특수한 의미를 갖는 경우가 왕왕 있다. 대표적인 예가 늑대의 기름이었다. 늑대가 죽을 때 나오는 상당한 양의 기름을, 과거엔 인간들의 장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순전히 사치를 목적으로 하는.

    그럼…… 늑대의 기름은 장례용을 뜻하는 건가. 앤디는 ‘늑대의 기름’이라는 글자 옆에 ‘장례용’을 적었다.

    “다음은 타이곤의 갈기. 갈기가 쓰이는 곳이라면…… 치료용?”

    장례용. 치료용. 모두 인간들에게 이익을 안겨 주었던 용도로군. 앤디는 미간을 좁히며 낮게 욕을 읊조리다가 ‘타이곤의 갈기’ 옆에 ‘치료용’을 적었다.

    그럼 비슷한 용도로 또 사용할 수 있는 눈알은 누구의…… 아.

    “독수리의 눈알.”

    셋 다 인간들의 잔혹함을 상징하는 신체의 일부였다. 필수품이 절대 아니었음에도, 인간들이 자신의 지위를 자랑하고자 수탈해 갔던 신체의 일부. 맞아, 독수리야. 자신이 맞게 해석했다면 저 종이에서 지워진 부분에 해당하는 종족은 ‘독수리’일 것이다.

    “근데 왜 하필 이 세 가지인 거지? 그리고 왜 오드 님은 이 종이를 아직도 갖고 계신 걸까.”

    가장 큰 의문점은 사실 후자였다. 앤디가 오드에게 이 종이의 내용에 관해 물었을 때, 오드는 아마도 제국에서 썼던 실험 재료였던 것 같다며 자기도 잘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면 이 종이가 오드의 침실,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지는 않았겠지.

    반신반의하며 빈 성전에 들어가 오드의 침실을 뒤졌던 앤디는 서랍 속에서 이 종이를 발견하곤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몇 년째 이 종이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종이에 적힌 내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그리고 기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침대 아래 넣어 두었던 바구니에서 기름이 담긴 병을 꺼냈다.

    ‘폐하. 이게 무엇입니까?’

    ‘주드의 것이다.’

    ‘…….’

    ‘주드가 죽어 갈 때 내게 남겨 준 기름이야. 경도 알고 있었겠지만.’

    ‘어디에 사용하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폐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

    ‘그 상태 그대로야.’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 물어본다고 해도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지만. 기름이 담긴 병을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정도의 양이면, 주드가 의식이 끊기기 전까지 억지로 기름을 배출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주드는 뭔가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제 동생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곳에 있다. 앤디는 주먹을 꾹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엘과 주드가 처음 만났다던 그 암시장을 완전히 소탕하지 말 것을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곳 외에는 그녀가 어째서 암시장에 발을 들였고 뭘 구하려고 했는지 알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이엘과 마주쳤던 턱수염 일당들은 전부 죽어 버렸다. 끄나풀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폐하는…… 이엘은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주체는 자신이 아니었다. 그 몫은 노아와 같은 자들이겠지. 앤디는 스스로에게 할당된 일만 완수하는 것을 목표로 생각하며 다시 종이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앤디 경.”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패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앤디는 황급히 바구니에 병을 넣고 침대 아래로 밀어 넣은 뒤 문을 열어 주었다.

    “백작님? 제 방엔 무슨 일로…….”

    “오드 님이 오셨다.”

    “네?”

    패티스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오드가 깊게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앤디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부단장.”

    “오드 님? 여기는 무슨 일로……. 폐,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아닙니다. 부단장이 해 줘야만 하는 급한 일이 있어, 부득이하게 내가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 아니라면 오드가 직접 올 리가 없는데……. 그 생각을 하며 마른침을 삼켰는데,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오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맑고 푸른 눈동자가 저를 지나쳐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책과 종이에 닿았다. 그제야 앤디는 우당탕탕 책상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이미 다 들켰겠지만.

    “괜찮아요, 앤디 경. 다 알고 있으니까.”

    “……죄송합니다, 오드 님. 제가 함부로 손을 대려던 게 아니었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패티스의 시선도 앤디의 책상으로 향했다. 저번에 도서관에서 가져갔던 두꺼운 책과 불에 그을려 형태만 남은 종잇조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역시 앤디는 뭔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의 대화로 유추해 본 바, 저 종이는 오드의 공간에서 앤디가 몰래 가져온 듯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분위기를 읽던 패티스를 향해 오드의 질문이 돌아왔다.

    “백작도 금서구역에 들어갔나요?”

    “예.”

    와. 무슨 대답을 저렇게 당당하게 하냐? 줄곧 죄지은 것처럼 눈치를 보던 앤디는, 자신과 다르게 태연히 대답하는 패티스를 벙찐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때 말했던 건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폐하께 말해도 상관없다던 그 말.

    “안 됩니까? 단서가 너무 부족해서 그곳에 갔을 뿐입니다.”

    “그래서 원하던 단서는 찾았나요?”

    “네.”

    “…….”

    “며칠 내로 스완이 고니의 호수에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오드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다시 진지해진 얼굴로 앤디를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앤디 경. 경에게 폐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당장 뱀의 영지로 출발해 렉토스 리히만을 잡아 오라는 명령이십니다.”

    “……예? 누, 누구요?!”

    뜬금없는 이름에 앤디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렉토스 리히만? 렉토스가 누구…… 엑? 렉토스?!

    렉토스라면……. 예전에 늑대의 영지에 인질로 잡혔던 턱수염 일당 중 하나가 아니던가. 이엘로부터 황자의 반지를 받아 세잔티노로 돌아갔다가 턱수염과 대립했던 그놈…….

    근데 놈이라면 죽었을 텐데?

    “사, 살아 있었습니까?!”

    “아마 로빈 공작이 세잔티노를 습격하면서 납치했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한 건가요?”

    “사실 폐하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하진 않아요. 이틀 전, 폐하께선 로빈과 함께 소모라 땅을 시찰하러 다녀오셨고 그곳에서 렉토스를 발견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같이 갔던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놈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 살아 있다면 이곳으로 납치해 오라는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앤디는 마른침을 삼켰다. 렉토스라면, 이엘이 암시장에서 만났던 자이기도 하니까…… 잘하면 그녀가 그곳에 뭘 찾으러 방문했었는지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주먹을 꾹 쥐다가 문득 패티스의 말이 떠올라 멈칫했다.

    ‘퍼즐이라고 생각해. 조각이 하나둘 맞춰져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거야.’

    ……이게 그 퍼즐 조각을 맞춰 가는 과정인 걸까. 직접 체험하니, 패티스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붙였는지 알 것 같았다.

    *

    이틀 전 로빈과 함께 소모라 땅에 다녀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발견했다.

    “정말 렉토스였습니까?”

    “응, 맞아. 확실해.”

    이엘의 대답에 노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사실 그가 여기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긴 했다. 당시 세잔티노의 인간들을 죽였던 건 뱀들이었다. 갑작스런 뱀의 습격으로 이엘과 노아 일행은 세잔티노를 빠져나가느라 렉토스가 그들 손에 죽었는지, 혹은 이곳으로 납치됐는지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섣부른 판단이었다. 나중에 세잔티노를 수습하던 하이에나들에게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없다는 이야기만 듣고 모두 죽었을 거라 단정해 버렸으니까. 뱀이 인간들을 납치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것도 하필 소모라에…….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다시 확인하러 소모라에 갈 수는 없어. 그래서 오드를 통해 앤디 경에게 다녀오라고 전했다.”

    “저희가 여기 머무는 동안, 말씀이십니까?”

    노아의 물음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의 눈을 속이려면 그 방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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