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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95화 (295/488)
  • 295화

    *

    “노아는?”

    “아침에 잠깐 나와서 2기사단의 훈련을 지켜보다가 숙소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볼까요?”

    “아니, 됐어. 이제 그쪽은 신경 쓰지 말고 2기사단장 쪽에 애들을 더 붙여라.”

    “예, 각하.”

    리플이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치곤 조용히 집무실을 나갔다. 거울을 보며 앞머리 끝에 손을 대고 정리하던 로빈은 어젯밤 저를 찾아왔던 노아를 떠올렸다. 분노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끝내 참담함으로 물든 채 무너지는 꼴이란.

    “쯧. 인간을 사랑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야.”

    다른 종족을 사랑하게 되면 남는 건 파멸뿐이다. 그리고 그중 인간을 사랑한 이종족의 말로가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알고 있어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감정이니까. 로빈은 진심으로 노아를 동정했다. 누군들 시작하고 싶어 사랑을 시작했겠는가. 그 감정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순간에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찾아왔다.

    로빈은 거울을 보기 위해 살짝 숙였던 허리를 다시 꼿꼿하게 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노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님을 알기에.

    “낯 간지러운 단어를 내 입에 올리는 날이 오다니.”

    사랑. 가장 숭고하고 고결하다는 그 감정이 제 입 안에서 굴러다니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로빈은 실소하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 사랑은 너희완 다르니, 이걸 두고 다행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그러나 끝내 자조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결국 파멸은 노아나 자신이나 다를 바 없어서.

    그는 마지막 단장을 끝내고 그녀가 있다던 온실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온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로빈을 발견한 우논 하나가 황급히 달려와 그에게 인사했다.

    우논의 등장에 로빈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그녀의 시중을 들기 위해 보냈던 자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황제에게 보냈던 뱀들이 전부 온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폐하께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왜 전부 밖에 나와 있는 거야.”

    “폐하께서 안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아닙니다. 다만…… 포레스트가 안에 있습니다.”

    “포레스트? 그게 누구…… 아.”

    로빈은 입을 꾹 다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입구에서 우왕좌왕하며 서성거리던 뱀들을 전부 돌려보내고 온실 문고리를 잡았다.

    “폐하, 로빈입니다.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안에서는 어떤 허락이나 불허의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을 로빈이지만, 저 안에 포레스트가 있다는 소리에 그는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제법 잘 어울리는구나.”

    “감사합니다, 폐하…….”

    “어째 짐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마음에 들어요, 정말로. 그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그렇습니다.”

    ……똑같이 갚아 주시려는 건가. 로빈은 문고리를 잡은 채 입구에 서서 온실 중앙 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짐이 하얀색 수선화를 참 좋아하거든.”

    로빈이 자랑하는 그의 온실 한쪽은 수선화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전에 이엘이 이곳에 왔을 때 그녀가 자신에게 그 꽃을 구해 달라고 했던 게 잊히지 않아서……. 로빈은 이엘이 하얀색 수선화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언제든 그녀가 제 영지를 방문했을 때 이 꽃을 보고 좋아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온갖 정성을 저 꽃에 퍼부었는데.

    “이렇게 하면 될까요?”

    “응, 예쁘구나.”

    얼굴이 새빨개진 남자의 귀 뒤에 하얀색 수선화가 꽂혔다.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던 로빈은 말없이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현재 이엘이 머무는 저택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녀의 방문을 노리고 개조해 둔 곳이었다. 이전에 이엘을 제 영지에 데리고 왔을 때 지내던 침실과, 투왈렛 룸, 만찬실, 서재 등. 그때의 사소한 물건까지도 똑같이 옮겨 놓았다.

    다른 공간이지만, 그때와 다를 바 없는 공간으로.

    그렇게 만든 건 당연히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싶은 제 욕망 때문이었다. 말했듯이 자신은 노아와 같은 식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녀는 치를 떨며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과의 기억을 잊지 못하게 할 수만 있다면 로빈은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로빈은 기가 차서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법 잘 어울리네.’

    ‘그렇습니까? 아가씨께 드린 꽃인데, 제가 받아도 될까요?’

    ‘물론. 경에게 더 잘 어울리는걸.’

    자신이 구해 온 꽃을 도미닉에게 주며 다정하게 웃어 주던 그때의 이엘이 떠올랐다. 다른 상대이지만, 그때와 다를 바 없는 이에게 꽃을 건네주며.

    명백하게 자신을 비꼬려고 하는 행동이다. 네가 한 짓을 고스란히 당해 보라는 듯. 이엘은 자신이 온실에 들어섰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제 쪽엔 시선을 전혀 주지 않은 채, 오직 포레스트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름이, 포레스트라고 하였느냐.”

    “예, 폐하. 맞습니다.”

    “그보다는 도미닉이라는 이름이 네게 더 잘 어울리는구나.”

    그제야 이엘이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로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로빈에게 그렇지 않냐는 듯 동의를 구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작이 이 아이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나 봐. 짐의 마음에 쏙 든 걸 보면.”

    “…….”

    “이 아이도 그때 황궁에 데려왔던 아이였지?”

    몇 달 전 로빈이 입궁했을 때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우논들을 진상했던 일을 꼬집고 있었다. 그중 포레스트는 도미닉을 닮은 얼굴로 로빈에게 선택돼 입궁했었다.

    “그때 폐하께서 그 아이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시기에 다시 영지에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좋아하실 줄 알았더라면 황궁에 남겨 두었을 텐데. 제가 어리석어 폐하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였군요.”

    로빈은 선선히 웃으며 이엘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허락을 구한 뒤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햇살이 곧장 내리쬐는 온실 중앙엔 유리로 만든 아름다운 티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고, 가운데 앉아 있는 이엘의 뒤엔 하트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자리엔 눈을 반짝이며 그녀만을 쳐다보는 포레스트가 앉아 있었다.

    멀리서 보면 단란하기 짝이 없는 티타임이었다.

    “수선화를 보니, 도미닉이 생각나는 터라.”

    “…….”

    이엘의 입에서 죽은 놈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로빈의 얼굴에 아주 잠깐 균열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이엘이 웃으며 말을 붙였다.

    “참, 그의 무덤은 잘 만들어 두었나?”

    “반역을 일으킨 자에게 무덤은 사치이지 않겠습니까.”

    “음, 그렇겠군. 생각해 보니 공작의 앞에서 도미닉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불편하겠구나.”

    “아닙니다. 폐하께선 제 하찮은 마음까지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은 짐을 원망하지는 않나?”

    “…….”

    “짐이 그를 충동질했다고 생각했잖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자신들과는 달리, 이엘은 제게 끌려올 때부터 연구실을 폭파시킬 계획을 세웠던 사람이니까. 수많은 우논들 중 도미닉을 골라 곁에 두었던 건, 놈이 방계 혈통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도미닉이 반역을 일으켰고, 그 덕에 공작은 뒷수습을 하느라 종족회의엔 참여하지 못했지.”

    “…….”

    “그때 짐은 그곳에서 수많은 아군을 만들었고, 공의 아군이었던 종족마저 내 것으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내전을 치르느라 엄청난 손해를 본 탓에, 뒤이어 터진 스라소니의 습격에도 제대로 된 방어도 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소모라를 빼앗겼다.

    소모라를 빼앗긴 건 단순히 영지를 뺏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로빈은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굴욕적으로 승복했다. 자신을 지키려는 수족들이 보는 앞에서 이엘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니 이엘은 그것까지 모조리 계산한 것이다. 처음 제 영지에 잡혀 왔던 그 순간부터, 자신의 굴욕적인 굴복까지 전부.

    “그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된 나를, 원망한 적이 없나?”

    이엘이 로빈을 힐끗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가 제 옆에 앉은 포레스트를 향해 흔흔히 웃어 주었다. 그녀의 웃음에 포레스트의 새하얀 얼굴이 아까보다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얼이 나간 모습에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저 꼴을 유도한 건 맞지만 배알이 뒤집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로빈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낯을 고수했으나 제 앞에서 단란한 사이라도 된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외면했다. 그러곤 고요히 대답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폐하.”

    “역시 공작은 충심이 깊군.”

    “그 일로 인하여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고, 저희 종족은 폐하께 가까워질 수 있었으니 되레 제겐 이득이 아니겠습니까.”

    “그토록 원하던 공작으로 승격되기도 하였고?”

    “맞습니다, 폐하. 아무리 노력해도 후작이 고작이었던 저희 종족이 공작으로 승격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일 덕분입니다.”

    “…….”

    “폐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죽은 도미닉에게 제가 고마워해야겠군요.”

    이엘이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려 따뜻한 차를 마셨다. 그러곤 계속 자신만 바라보느라 넋이 나간 포레스트의 하얀 뺨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로빈에게 제안했다.

    “그러면 죽은 도미닉을 대신해 이 아이에게 작위를 주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폐하께서 주시는 작위를, 감히 저 따위가 가타부타를 논할 수 있을까요.”

    “그런 면에서 늑대와 다르군.”

    “…….”

    “그들은 짐이 작위를 무분별하게 하사한다고 생각하거든.”

    어제 노아에게서 들은 내용이었다. 로빈은 짐짓 모르는 체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동조했다.

    “모두 폐하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기대하는데, 늑대들만 과거에 매여 있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 버릇을 여전히 못 고친 모양이죠.”

    “…….”

    “아. 곡해는 마십시오, 폐하. 험담하는 게 아니라 그저 멀리서 지켜본 바, 제 좁은 식견이 느낀 것을 그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저는 늑대와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제 말에 딱히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로빈은 티포트를 기울여 텅 빈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러나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늑대들은 이전 제국에서도 청렴하고 공의로웠던 종족이라 혹여나 우환이라도 생길까, 폐하와 제국을 걱정하여 그렇게 주장한 건 아닐까요.”

    “…….”

    “물론 이 또한 그들을 두둔하기 위해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저 저는 오직 폐하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충언에 가까운 말씀을 드리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황위가 탄탄하려면 무엇보다 늑대의 지지가 필요할 테니까요.”

    이엘은 로빈의 의중을 파악하려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뱀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정말 충신이라도 된 것처럼 어울리지 않게 옳은 소리만 늘어놓는 로빈이 낯설다 못해 소름 끼쳤다.

    “그렇게 이야기하니 정말로 공작이 짐에게 충성이라도 한 듯하군.”

    “이미 제 마음은 3년 전에 폐하께 드렸습니다.”

    “…….”

    “대관식에서의 맹세에 거짓은 없습니다. 거짓을 말했더라면, 필시 신께서 제게 벌을 내리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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