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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94화 (294/488)

294화

“깊게 말할 수는 없어. 우리도 내부 사정이란 게 있으니까. 정리하자면 우리 쪽도 반반 나눠졌다.”

알 것 같군. 비록 제국의 주인은 이엘이지만, 종족의 수장은 노아다. 제 수장이 버려졌다는 것에 대한 불쾌감, 줄곧 함께였으나 중요한 순간에 버려졌다는 실망감. 그런 여러 이유로 늑대와 그녀의 사이가 멀어졌겠지.

“폐하를 따르는 자들과 늑대 종족 자체에 헌신하는 자들. 나눠진 상태야.”

“그 정도면 꽤 심각한 상황 아닌가? 근데 내게 다 말해도 되는 거야?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내가 뭘 말하든 어차피 넌 네 마음대로 생각할 것 아냐.”

노아의 말에 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다. 저쪽이 무슨 말을 하든,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니까.

하지만 노아의 표정을 보니 아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하긴, 몇 년째 보이는 늑대들의 행보만 보더라도……. 노아와 앤디가 이끄는 제 1기사단은 누구보다 기사단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예전처럼 맹목적으로 그녀의 안위를 지키는 것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 일은 오히려 근위대의 몫이었다.

“그럼 너희가 근위대가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사실이었나?”

“맞아.”

“…….”

“내가 근위대장이 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폐하께서 거절하셨다.”

“난 너와 폐하가 꽤 애틋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나?”

“…….”

“그럼 스라소니가 반지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진짜야?”

유클리드의 소식이 벌써 이렇게 퍼졌군. 노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갑갑한 표정을 지으며 커프스단추를 풀었다.

“그 이후의 일은 네 마음대로 상상해. 어쨌든 이게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진실이야.”

“좋아. 뭐, 생각보다 흥미로운 대답들이었어.”

애초에 로빈은 단순한 궁금증 때문에 던진 의문들이었다. 저게 진실이든 아니든, 그건 제게 중요치 않다. 돌아가는 상황이라도 알게 된 것에 만족하며 노아를 향해 운을 뗐다.

“그래서, 네가 내게 물어보고 싶었던 건 뭔데?”

“정말로 ‘그’를 만났나?”

“글쎄.”

“로빈.”

“‘그’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폐하께서 네게 다 털어놨다는 소리 같은데.”

“…….”

“근데 넌 폐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했나 보네.”

그러면 불화가 깊어질 텐데? 그 말을 하며 로빈이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러곤 잔을 든 채 달빛이 쏟아지는 창문께로 다가갔다.

“만났다.”

“……정말 그런 존재가 있어?”

“놀랍게도.”

“…….”

“볼 순 없었지만, 분명 존재했어.”

그곳은 새하얗지만 새카만 곳.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그’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아무에게나 열리지 않는 공간 안에, ‘목소리’가 존재했다.

“근데 왜 넌 ‘그’의 존재를 떠벌리지 않았나?”

노아의 물음에 로빈이 잠시 침묵했다. 이엘이 ‘그’와 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 건 몇 안 된다. 분명 노아 쪽도 믿을 만한 자들 몇몇만 알고 있을 테고, 그들마저도 저렇게 전부 믿지는 못하겠지. 직접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아니. 적어야 한다. ‘그’의 존재가 알려지면, 선황처럼 ‘그’를 만나려는 자들이 늘어날 테니. 그러면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다.

“글쎄. 그게 내게 유리하기 때문에 떠벌리지 않은 거겠지?”

“그곳에서 너도 뭔가를 알아낸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말해.”

“…….”

“로빈.”

“일찌감치 신을 버렸어. 이젠 신께서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우릴 구해 주실 마음이 없다는 것 정도는 너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자신은 유리한 쪽에 서겠다. 그게 신이 아니라 ‘그’라면. 자신은 기꺼이 신을 버리고 ‘그’의 손을 잡아 유리한 세상에서 살 것이다. 그게 뱀의 방식이었다.

“노아. 내가 폐하의 편에 선다는 걸 믿을 수 있겠어?”

“아니.”

“그럴 줄 알았어.”

로빈은 키득키득 웃더니 언젠가부터 들고 있던 시가를 입에 물었다. 기분만 내려는 건지 불을 붙이지 않은 채로 한참이나 창밖만 바라보다가, 마침내 물고 있던 시가를 빼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모든 거래엔 대가라는 게 존재하더라고.”

“…….”

“그리고 그 거래를 지키지 못하면 대물림되는 경우가 왕왕 있지. 그 대가라는 것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왜 ‘그’가 폐하께 나타났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로빈의 물음에 노아는 누군가 제 뒤통수를 세게 친 것처럼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 불과 몇 달 전, 오드가 제게 물어봤던 질문과 흡사했기에.

“생각해 본 적 없겠지. 나 역시 그랬으니까.”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지? 말해, 그게 뭔지.”

“노아. 만약 폐하와 폐하의 아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넌 누굴 선택할 거지?”

“……그런 상황이 오게 할 리 없다.”

테오도로. 베아트리스…….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가에 물기가 번질 정도로, 노아는 이제 태어나지도 않은 그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노아. 네가 막을 수 없는 일이 필연적으로 와.”

“…….”

“그리고 그 때에 난 기꺼이 폐하를 선택할 거고, 아이를 버린다.”

로빈의 대답에 되레 놀란 건 노아였다. 그렇게 지독하게 그녀의 첫아이를 원하던 놈이 무슨 생각으로…….

“아이를 버려서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있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물었다.”

“올리세스 윌터가 헛짓을 꾸미는 건 알고 있겠지? 몰랐다면 폐하께 말씀드려. 그걸로 네 신뢰가 회복된다면 너도 좋고, 결국엔 나도 좋은 일이 될 테니까.”

“…….”

“놈의 영지, 그 지하에 누군가 있을 거야. 그자를 찾아. 그는 많은 걸 알고 있다. 내 말보다 그에게 직접 듣는 게 더 정확해.”

“내 신뢰가 회복되면 왜 네가 좋지?”

“말했잖아. 나는 폐하의 편에 설 거라고.”

“…….”

“‘목소리’는 폐하가 어리숙할 때 그녀의 틈을 노려 그따위 거래를 해 왔지만, 그건 결코 우연이 아냐. 아주 오랜 시간, ‘그’는 폐하를 노려 왔거든.”

첫아이. 그 아이가 필요하다.

“노아. 네가 그녀를 몹시 사랑해, 다른 종족들의 비웃음을 사면서까지 그녀의 뒤만 따르고 있는 것만큼은 진실이겠지.”

“…….”

“어쩌면 우리들 중 폐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도 너일 테고.”

“너 설마…….”

“네 아이를 내게……,”

“그 입 안 닥쳐?!”

벼락같이 소리를 내지른 노아가 로빈에게 달려들었다. 술을 마셔서 정신이 약해진 건지, 그게 아니면 처음부터 당해 줄 생각이었던 건지, 로빈은 노아의 힘에 밀려 바닥으로 넘어졌고 그의 몸 위에 올라탄 노아가 주먹을 들었다.

“오. 우리가 인간들처럼 주먹싸움을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입. 닥치라고.”

“난 진심이야.”

“…….”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뭔가가 있는 것 같거든.”

허공에 들렸던 주먹이 조금씩 아래로 떨어졌다.

“뭔가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어.”

“…….”

“그것 때문에 폐하는 ‘그’와 거래를 한 거야. 그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라서.”

노아는 언젠가 그녀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말해 주지 못한다는…….

“내 계획은, 거래의 대상을 폐하에서 그 첫아이로 바꾸는 거야.”

“미친 새끼…….”

“왜. 네 아이라서 떨떠름한가? 그럼 다른 놈의……,”

“입 닥쳐. 제발, 그 입…… 닥쳐.”

그녀가 이름을 지어 줬단 말이야. 테오도로. 베아트리스. 그녀가 그 아이들을 기대하고 있다고……. 아직 포기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게 제 아이가 될 거란 확신 때문이 아니었다. 설령 그녀의 아이가 다른 놈의 아이라 할지라도, 노아는 그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지킬 수밖에 없다. 이미 그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되어 버렸으니까.

“이 시찰의 끝에 윌터 백작령에도 들르겠지.”

“…….”

“그럼 직접 진실을 마주하고 생각해 봐. 거기엔 대단히 큰 진실이 숨어 있으니까.”

“…….”

“네게 어떤 생명의 가치가 더 큰지, 결정해.”

치졸하고 끔찍하다. 로빈이 아니라 ‘그’의 존재가……. 어떻게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그물을 쳐 놨지? 빠져나갈 수 없게 여기저기 거미줄을 쳐서 옴짝달싹할 수도 없게 만들었어.

그녀에겐 첫아이의 목숨을 요구했고, 로빈은 첫아이를 그녀 대신으로 바치도록 유도했다. 왜 그렇게 ‘아이’에게 집착하는 거지? 대체 그 아이가 뭐길래…….

“단순해.”

“…….”

“목숨의 무게를 천칭에 달아 보는 거야, 노아.”

“…….”

“어느 쪽이 더 무거울지.”

젠장, 젠장, 젠장……. 뱀이 하는 말에 귀 기울여선 안 되는 걸 알고 있는데도, 왜 자꾸 저 말이 귀에 들려서…….

“그게…… 폐하를 위하는 길이라고 말하는 건가? 폐하께서 슬퍼하실 건 생각하지 않고? 감히 목숨의 무게를, 우리 따위가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

“안타깝게도 나는 그녀를 너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아.”

“…….”

“내 사랑은 조금 다르다. 난 그녀 자체가 중요해. 슬픔은 곧 사라지겠지. 어쩌면 ‘목소리’로부터 자유가 되었기에 그 슬픔을 금세 잊을 수도 있을 테고. 그토록 아이가 갖고 싶다면, 또 가지시면 되니까.”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 닥쳐.”

“어쨌든 지금 내 입장은 그래.”

“…….”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려고.”

“거기에 폐하의 의견은 없는데?”

“물론. 그게 뱀답지 않나?”

로빈의 대답에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노아는 힘없이 로빈의 몸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다가 테이블을 짚으며 정신을 차렸다.

“온갖 치졸하고 약아빠진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녀에게 자유를 줄 거다.”

“…….”

“그게 너와 다른 방식의 내 사랑이야.”

“그 더러운 입에 사랑이란 단어를 올리지 마라. 넌 사랑이 아니라 미친 거야.”

“현실적인 거지.”

“…….”

“아무것도 못 하고 그 자리만 뱅뱅 도는 너보다 내가 더 실용적이야.”

그래, 맞네……. 난 정말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지.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고, 두려워서 그녀에겐 먼저 물어볼 수조차 없어. 혼자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지만 해답을 찾지 못해 쓰레기 같은 뱀을 찾아와 이딴 말이나 듣고 있으니.

“날 막아도 좋아.”

“…….”

“이젠 나도 나를 돌이킬 수가 없거든.”

“…….”

“하지만 너도 마음이 바뀌거든, 내 손을 잡고 날 도와.”

대물림. 핵심은 그거였다.

“미친놈.”

“응, 맞아. 난 폐하께 미친놈이고 폐하 외엔 누구에게도 관심 없다.”

“…….”

“그게 내 사랑의 방식이야.”

자신은 와인을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건지 모르겠다. 노아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쏟아지는 뱀의 폭언을 고스란히 맞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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