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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93화 (293/488)

293화

“우선 공작은 먼저 돌아가도록 해라. 아무리 뱀이 이곳엔 오지 않겠다고 했어도 언제든 숨어들 수 있으니까. 괜한 의심을 사면 곤란해.”

“알겠습니다, 폐하. 무슨 일이 있으시면 설렁줄을 당겨 주십시오. 바로 오겠습니다.”

노아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고 침실을 나갔다. 마침 침실 안 수색을 마친 일라이저도 그녀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편한 밤 되십시오, 폐하.”

“그래. 후작도 푹 쉬게.”

일라이저의 영지에서 있었던 축제 사건 이후로 그가 묘하게 제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하루 종일 스스럼없이 지낸 덕에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자신만의 생각인 듯했다. 일라이저는 전보다 더 선을 그었으니까.

“경. 피곤하지?”

“아닙니다.”

홀로 남은 하트가 그녀의 탈의와 착의 시중을 들었다. 다른 영지와 달리 이곳은 뱀의 소굴이니 이엘의 안전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그런 와중에 대외적으로 노아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으니, 노아가 하던 일을 하트와 일라이저가 나눠 맡게 되어 하트는 이렇게 한시도 그녀의 곁을 떠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다음은 독수리의 영지니까. 여기만 잘 넘으면 그곳에선 조금 쉬게 해 줄게.”

“괜찮습니다, 폐하. 곁에 머물며 호위하는 게 제 역할입니다. 피곤치도, 힘들지도 않습니다.”

“그건 경의 생각이지. 경을 내 옆에 붙인 패티스 백이 들으면 서운하겠어.”

그 말에 하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저렇게 대놓고 감정을 표현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라, 이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아무래도 하이에나 세쌍둥이들은 서로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저렇게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면서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으니……. 예전엔 피시가 일방적으로 두 사람에게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곁에서 몇 년을 함께 지내다 보니 그게 세 사람 모두 동일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자각을 못 하는 건지, 인정하기 싫은 건지. 참 별나고 귀여운 쌍둥이들이라고 생각하며 이엘은 잠자리에 들었다.

“하트 경.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하문하십시오.”

“시모네라는 자는, 어떤 사람이었어?”

“…….”

“말하기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그냥 궁금해서. 피시의 친구라고 하니까.”

그리고 어떻게 백조와 친구가 되었을까. 그녀는 시모네에게 관심이 생겼다. 피시의 친구라고 들었는데 정작 피시에게선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름이기도 했고.

“조이나의 연인이었습니다.”

“아.”

“하이에나답지 않게 마음이 여려서 피시처럼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고니뿐만 아니라 작고 약한 이종족들과도 허물없이 지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랬군.”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이나가 유독 그를 아꼈고, 그도 조이나를 주군 이상으로 따랐습니다.”

주군 이상의 감정. 사실 하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패티스가 언질을 주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조이나의 옆에서 맴도는 약해 빠지고 도태된 놈이라고 치부했으니까. 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겼는지 따위, 자신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세잔티노에 조이나, 피시와 함께 끌려가 죽었습니다.”

“…….”

“그 외에는 저도 모릅니다. 관심도 없었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서 잊고 살았습니다.”

“그랬구나.”

이엘은 이불 속으로 깊게 파고들며 눈을 감고 하트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조이나의 연인. 하트는 그를 그렇게 표현했다. 피시의 친구라고 말하기보다는 조이나의 연인이라고.

“다른 하이에나들이 그를 질투했겠구나.”

“…….”

“조이나는 선망의 대상이라고 하지 않았나.”

“저희는 암컷의 선택을 바라니까요. 그가 선택됐을 때, 반발이 거셌습니다.”

이종족끼리 사랑으로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고 들었는데, 그런 면에선 조이나와 시모네는 행복했던 모양이다. 비록 끝은 비극이었지만.

“경도 질투했나?”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이나에게 어울리는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과연 그럴까? 그녀의 옆자리에 누가 있어도 경은 마뜩잖다고 여겼을 듯한데.”

이엘이 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하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맞는 듯해서.

“그것 봐. 경들은 모른다니까.”

“…….”

“그대들은 정말…… 우애가 좋구나…….”

그 말을 끝으로 이엘은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벽에 기대서 지켜보고 있던 하트는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가 편히 잠들 수 있게 이불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다 문득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편히 잠든 이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폐하의 곁에 누가 있더라도, 저희는 모두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설령 그 누군가가 서로라고 할지라도.

*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반응이군.”

“내가 널 한두 번 봐?”

그렇게 대꾸한 로빈은 문을 활짝 열고 노아를 향해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노아는 그의 뒤를 따라, 처음으로 로빈의 침실에 들어섰다. 그의 성엔 몇 번 왔었지만 이렇게 은밀한 곳까지 들어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와인 좋아해? 한잔할래?”

“됐어. 그런 얘길 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뭐, 좋아. 표정을 보아하니 내게 할 말이 꽤 많은가 봐. 일단 앉아.”

취한 것 같지는 않은데, 꽤 기분이 좋은 건지 로빈은 답지 않게 웃고 있었다. 당연히 노아는 꼴 보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폐하께선 잠드셨나?”

“그게 궁금해?”

“아니, 됐어. 어차피 너한테 물어봤자 알 수 있는 것도 적을 테니.”

“…….”

“가끔은 네가 나보다 더 미움을 사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그 말을 하며 뱀이 키득키득 웃더니, 들고 있던 잔을 살랑살랑 흔들다가 노아를 향해 말했다.

“네 물음에 답하기 전에, 나부터 하나 물어봐도 되나? 전부터 계속 궁금했거든.”

“뭔데.”

“너흰 대체 어쩌자고 폐하를 등진 거지?”

“…….”

“네 눈은 미련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어째서 넌 네 종족이 폐하를 등지는 것을 그냥 두고 봤냐고 묻는 거다.”

늑대들의 입장이 참 이상했다. 그렇게 죽고 못 살던 관계였으면서, 어떻게 그녀와의 관계를 단번에 끊어 냈던 거지? 물론 그들의 수장인 노아는 여전히 미련이 뚝뚝 묻은 눈으로 그녀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지만.

사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늑대들은 한번 충성을 맹세한 상대에겐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충성을 지키니까.

“그러니까…… 폐하와 우리 종족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궁금하다는 건가?”

“맞아. 그게 궁금해.”

“…….”

“솔직히 그게 궁금한 놈들은 나 말고도 꽤 될걸. 다들 물어볼 수 없으니 입을 다물고 있는 거겠지만.”

“그걸 답해 주면, 너도 내가 묻는 것을 모조리 답할 건가?”

“글쎄. 전부 말할 수는 없고. 질문을 먼저 들어 보고 결정할게. 뭐가 궁금한데.”

“네가 만났다던 그 ‘목소리’에 관해.”

“…….”

“궁금한 게 있다.”

잠깐이지만 뱀의 눈이 형형히 빛났다. 마치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과 이제야 물어보는 게 신기하다는 표정이 뒤섞인 듯한. 그러나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로빈이 능청스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아. 아까도 말했지만 전부는 안 돼. 이쪽도 사정이란 게 있으니까. 대신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은 성실히 대답해 주겠다. 어차피 우린…… 한배를 탄 모양이니까.”

로빈은 노아와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같다고 판단했다. 그녀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방식과 과정은 서로 다를지라도 결과는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노아가 주저하던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먼저 말하지. 폐하와 우리 종족 사이에 작은 마찰이 있었다. 폐하가 즉위하시기 전, 우리 쪽에서 폐하께 요구하는 것들이 상당히 많았어.”

요는 늑대와 그녀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과거 제국에서의 작위를 가졌던 자들이 모두 복권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공작 위 또한 5개로 늘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습군. 폐하께서 정하신 일을 너희가 반대했다고?”

“그래……. 어리석었지.”

물론 거짓말이다. 아군도 아닌 뱀에게 사실을 말해 줄 리가.

이엘은 즉위 전부터 늑대들이 심판자 역할을 해 주길 바랐다. 과거 제국은 황실이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패망했다고 본 것이다.

그녀는 제 위치가 흔들리지는 않되, 과하게 집중되지도 않도록 누군가 그 역할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종족과 인간 모두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존재도 필요했다.

그리고 그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게 늑대였던 것이다. 천칭의 무게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조절할 수 있는 중립적인 존재가.

결과적으로 그녀의 선택은 옳았다. 늑대로만 이루어진 현재의 1기사단이 제도민들의 절대적 신뢰를 받게 됐으니까. 심지어 일라이저가 이끄는 2기사단보다 더 큰 지지를 받고 있었다.

“황가와 결탁하여 중죄를 저질렀던 자들의 작위까지 복권되는 것에 철저히 반대했으나 폐하께선 우리와 생각이 다르셨다. 그들 역시 폐하의 제국민이라고 생각하셨으니까.”

“폐하께서 왜 너희 늑대에게 마음이 떠나셨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군. 너희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잖아? 앞에선 그녀를 지지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폐하를 제 입맛대로 하려고 굴었으니.”

“그에 관해선 달리 할 말이 없군.”

“…….”

“다만 이전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았을 뿐이다. 인간은 우리와 달라서, 다시 손에 권력을 쥐면 이전처럼 자신 외의 존재는 전부 속박하려 들 테니까. 물론 내가 말하는 인간들은 구귀족 일부를 뜻해.”

요컨대 늑대는 구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에게 권력을 주지 말자는 쪽이었고, 이엘은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 권력을 주겠다는 쪽에 섰기에 대립했다는 것이다. 거기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끝내 갈라선 모양이었다.

하지만 로빈이 느끼기엔 그것 외에도 늑대가 그녀에게 요구한 게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끝이야? 정말 그것만으로 폐하와 너희가 갈라졌다고?”

“…….”

“폐하의 부군 자리를, 감히 노렸던 건 아니고?”

로빈의 말에 노아가 멈칫했다. 이쪽이 의도하는 대로 따라와 주는 게 웃기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섬뜩하기도 했다.

“……맞아. 폐하께서 내 반려가 되기를, 감히 바랐지. 그분의 부군 자리는 늑대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너희는 그래서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하나에 눈이 멀면 거기에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그 멍청한 습성 때문에.”

로빈의 힐난에도 노아는 반박하지 못했다. 저 뱀이 내뱉는 말이 아예 거짓은 아니었으니까. 노아는 이엘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사랑하기에 그녀의 선택 역시 존중하지만…… 그래도 맹목적으로 그녀의 사랑을 바라고 있다. 감히 그녀의 반려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폐하께선 너희의 제안을 거절하셨나?”

“정식으로 제안드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폐하께선 에둘러 거절하셨고, 거기에 실망한 놈들이 생겼으니까. 결국 여러 사건으로 인해 폐하께선 우리에게서 신뢰를 완전히 거두셨다.”

“들을수록 기가 차는데? 다름 아닌 네가? 네가 폐하와 기 싸움을 벌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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