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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90화 (290/488)
  • 290화

    “그것 외에 그대가 짐에게 줄 수 있는 게 있나? 혹 러셀 후작이 그대와 그대의 조카를 역으로 이용해 윌터 가문의 세작 일을 시킨다고 해도, 모르는 척 그대로 따르는 것은 물론. 그 외에도 그대가 짐에게 줄 수 있는 게 있는지 묻고 있다. 이득이 없이는 가벼이 봐줄 수 없는 사안이란 건 알고 있을 테니.”

    “혹시 후작저에 있는 선대 러셀 후작 부처와 후작 영애의 초상화를 보셨는지요. 몸이 늙기는 하였으나 손과 기억력만큼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건강합니다.”

    “…….”

    “선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그려 드릴 수 있습니다. 돌아가신 황자 전하도 마찬가지로.”

    “좋아.”

    그녀의 말에 줄곧 엎드려 있던 노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엘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그에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고, 노인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다만 다른 이는 필요 없다.”

    “허면…….”

    “내 어머니의 그림만 그려다오.”

    “선황후 폐하 말씀이십니까?”

    “그래. 선황과 황자는…… 됐다.”

    선황은 꼴도 보기 싫었고, 그 시절의 이온은 어차피 만날 수 없을 테니까. 그녀의 말에 노인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절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대의 조카에겐 이 사실을 감추도록. 그는 어차피 러셀 후작이 은밀하게 이용할 테니, 그대는 곁에서 지켜보며 일이 틀어지지 않게만 관리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이엘은 그렇게 노인을 뒤로하고 언덕을 내려가다가,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다시 뒤로 돌았다.

    “아니. 짐과 황자도 그려다오.”

    “예?”

    “어머니와 그 뒤에 짐과 황자의 모습을 함께 그려다오. 지금의 모습으로. 가능하겠느냐?”

    “그럼 황자님도…….”

    “그래, 황자도. 짐을 닮게 그리면 되겠구나. 키는 이 정도 되고, 눈꼬리는 짐보다 내려가 있다. 그 외엔 짐과 매우 흡사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이엘의 말을 루벤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의 깊게 들었다.

    이엘은 첨언을 마치고 언덕을 내려왔다. 내려오면서도 헛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부러웠구나, 나는…….”

    러셀 후작저에 있던 그 커다란 초상화를 자신은 부러워했던 모양이다. 이상하지. 정말로…… 사무치게 외롭다. 그 어느 때보다 제 곁에 머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상할 만큼 외로워서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그들로도 채워지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게 혈육이라는 걸까.

    “이온. 오늘따라 네가 참 보고 싶네.”

    커다란 달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어린 시절의 이온을 추억했다.

    *

    “어서 오십시오, 폐하. 이 순간이 오기만을 무척 기대하고 고대하였습니다.”

    “그래. 근데 공의 영지가 생각보다 춥군.”

    “성 안은 따뜻할 겁니다. 폐하께서 머무시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단단히 준비를 했습니다.”

    로빈의 얼굴에 자신감과 웃음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그 꼴을 뒤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르네와 일라이저의 낯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일라이저의 영지를 떠나 몇몇 이종족의 영지를 더 돌고 난 뒤에 도착한 곳은 로빈의 영지였다. 몇 년 만에 입장이 뒤바뀌어 이 땅을 밟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햇빛이 강해 따뜻한 땅이었지만, 이상하게 춥고 음습하게 느껴지는 건 여전했다.

    앞서 걷는 로빈은 성으로 향하는 내내 제 영지의 곳곳을 안내하며 연신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여전히 속내를 보여 주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순수한 미소라, 이엘은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로빈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는 미려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폐하?”

    “……어, 그래. 무슨 말을 했지?”

    “폐하의 눈이 제게 향한 것은 처음이라, 그렇게 바라보시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 요사한 뱀 새끼가……. 뒤에서 중얼거리는 노아의 목소리를 들은 이엘이 피식 웃더니 로빈의 옆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러곤 그에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요구했다. 로빈은 정말로 기쁜 것인지, 아니면 꾸며 낸 것인지 모를 아름다운 웃음으로 화답했다.

    “짐이 그간 공에게 소홀했구나. 공작을 의심했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만하다고, 저 역시 생각하니까요. 제가 감히 폐하를 몰라뵙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드렸는지…….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폐하.”

    “정말인가?”

    “예, 폐하. 물론입니다. 폐하를 제일 먼저 알아보고 제일 먼저 섬겼을 겁니다.”

    우습기 그지없다. 이전에는 제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던 로빈이, 과거로 돌아가면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게. 당연히 진실은 아니겠지만 지금 그의 표정만 보면 정말로 후회를 하고 있는 듯했다.

    여전히 눈빛과 말투만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몇 년이 지나도 로빈은 로빈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상당한 기력을 잡아먹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지루한 설명을 듣는 게 낫겠다 싶어, 이엘이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을 무렵이었다.

    “저곳은…….”

    그녀의 시선을 잡아 끈 건 겨우 흔적만 남기고 반 이상 사라진 성의 터였다.

    “폐하의 손길이 닿은 터라.”

    “…….”

    “남겨 두고 싶었습니다.”

    흔흔히 웃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는 로빈의 말에 노아는 미간을 찌푸렸고 이엘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곳은 이엘이 폭파시켜 버렸던 연구실이었으니까.

    “의외군. 공작은 이 성에 애착이 강한 듯하니, 곧장 저곳부터 뜯어고칠 거라고 생각했거든.”

    “제 애착의 대상이 바뀌었으니까요.”

    “…….”

    “아아, 물론 이전의 그런 탐욕과는 다릅니다. 순수한 충심이니 부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

    정말로 오해하지 말라는 듯이 눈꼬리까지 아래로 떨어뜨린 남자는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이엘은 로빈의 팔을 잡고 있던 제 손을 미끄러뜨려 내려가다가, 그의 손등 위에서 손을 멈췄다. 그러곤 로빈의 손등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그래, 지난 몇 년간 공작이 내게 바친 충성과 헌신이 있으니 한번 믿어 보겠네.”

    “영광입니다, 폐하.”

    이엘과 로빈이 서로를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마치 동맹족을 대하듯, 겉으로는 한없이 다정한 사이처럼 보였다. 긴 신경전 끝에 두 사람은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그 뒤를 근위대와 기사단들이 따랐다.

    이엘과 로빈만큼이나 뒤따르는 양쪽 진영에도 무거운 긴장감이 돌았다. 특히 노아와 일라이저는 태연한 듯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성 안으로 들어섰지만 두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폐하께서는 괜찮으신 걸까요?”

    로빈과 함께 앞서 걸으며 하하 웃고 있는 이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라이저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노아에게 물었다. 노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던 건지 그의 물음에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마도 잔뜩 예민해지신 상태이실 테니, 후작도 기사단에게 각별히 조심하라고 일러두시오.”

    “예, 그러겠습니다.”

    직전에 있던 곳에서 로빈의 영지로 곧장 향하는 빠른 길이 있었지만, 이엘은 일부러 소모라를 관통해 이곳에 도착했다. 그곳의 상황을 아는 게 뱀의 영지 시찰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영지였고, 평범한 뱀들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로빈이 사전에 손을 써 놨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흔적 하나 없이 감췄을 줄이야……. 별 소득이 없었던 터라 힘이 빠졌고, 그로 인해 이엘은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소모라에서 힌트를 얻지 못하면, 이곳 공작성에서도 얻을 만한 수확은 없을 테니까.

    ‘상당수의 보호석들은 모두 소모라 땅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며칠 전 앤디로부터 전령이 도착했다. 보호석을 수거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뱀의 껍질로 그들의 행방을 뒤쫓던 앤디는, 보호석들이 전부 소모라 땅으로 가고 있음을 발견하고 전령을 그녀에게 보낸 것이다.

    소모라……. 로빈은 건국 직전 그녀를 찾아와 소모라의 반환과 자신의 작위 승격을 요구했다. 이엘은 그 지명을 곱씹으며 몇 달 전에 유클리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폐하.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왜 로빈이 폐하께 작위를 승격해 달라고 했을까요.’

    ‘…….’

    ‘왜, 소모라 땅을 반환해 달라는 요청을 했겠습니까.’

    처음 이엘이 유클리드에게 뱀의 소모라를 빼앗아 바치라고 했던 건 큰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유클리드의 충심을 알아보기 위한 수단이었고 뱀의 목숨 줄을 쥐고 흔들 만한 요소로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 예상과 달리 로빈은 그 땅에 과한 집착을 보였다.

    그래서 로빈에게 소모라 땅을 반환하기 전에 미리 조사를 마쳤다. 그러나 그 땅엔 특별한 게 없었다. 그저 기존 뱀의 영지보다 조금 더 풍족하고 따뜻한 곳이라는 것 말고는.

    ‘아마 그곳에 납치한 인간들이 몇 있지 않을까, 추측 중입니다.’

    유클리드는 그렇게 추측했다. 납치한 인간들이 있을 거라고.

    과거엔 아이가 태어나면 황실에 출생 신고를 하는 게 필수였고 그걸로 인구수를 파악하고 통제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분명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숨어 살고 있는 인간들도 있을 것이다.

    “폐하.”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이엘을 깨운 건 에스코트하던 로빈이었다. 그가 걸음을 우뚝 멈춰 선 것이다.

    “공작?”

    “폐하. 저를 믿어 주신다는 말씀은 거짓이셨군요.”

    “…….”

    “시선은 저를 향하고 계시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계신 듯해서요.”

    생각이 많아져 그의 목소리를 또 지나쳤던 모양이었다. 이엘은 고개를 흔들며 그를 달래듯 작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게. 짐이 또 다른 생각에 빠졌구나. 여정이 길어지다 보니 여독이 쌓인 모양이야. 혹 이런 일로 짐에게 서운한 것은 아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의 심중을 파악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그럼 우선 머무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폐하. 제가 폐하께 청하여 친림하셨으니,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드릴 것입니다.”

    “…….”

    “혹 소모라가 궁금하신 것이라면, 정말 전부를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역시 알고 있었군. 하긴, 애초에 그곳을 통과해 왔으니 로빈이 모르는 게 이상하지.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소모라를 꼭 보여 주었으면 좋겠군. 공작도 알겠지만 그 땅은 과거 소모라 공작이 다스리던 때에도 주변 귀족들이 꽤나 부러워하던 땅이었거든. 근데 짐은 그 땅을 직접 보질 못했으니 꽤 궁금하다.”

    “기꺼이 모든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기꺼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뱀에게서 나오다니. 이엘은 흔흔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숨겼다고 해도 상관없다. 오드가 함께 왔으니까. 지나쳐 올 때는 빠르게 훑느라 놓쳤지만, 작정하고 그곳을 방문하면 오드의 성력으로 보호석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기대하겠네.”

    과연 로빈은 유클리드의 말처럼 올리세스 윌터와 손을 잡은 걸까. 아니면 단독으로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걸까. 이엘은 가면을 쓴 듯한 로빈의 낯을 마주하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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