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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89화 (289/488)
  • 289화

    일라이저의 가면이 살짝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을 본 이엘이 그를 불러 세우고 손을 뻗었다. 귀여운 모양의 가면이 그와 썩 잘 어울려, 이엘은 정리해 주다가 말고 웃음이 터졌다. 그녀의 웃음에 머쓱해진 일라이저가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소심하게 반응했다.

    “그, 그렇게 안 어울려?”

    “아니. 너무 잘 어울려서. 귀여워서 웃었는데.”

    “그건 좀…….”

    “자. 난 어때?!”

    이엘이 늑대와 호랑이를 섞은 듯한 괴상한 반가면을 쓴 채 짐짓 위엄 있는 척 굴었다. 많고 많은 가면들 중에 왜 하필 저런 걸 고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라이저는 제 표정이 가면으로 가려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려.”

    라는 대답을, 꽤나 목 막힌 것처럼 답하기는 했지만.

    “근데 신기하지? 아무도 우리를 못 알아보는 게.”

    “응, 그러게…….”

    일라이저는 조금 전에 자신을 힐끔거리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엘의 말에 동의해 주며 웃었다.

    그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사실 영지민 몇몇은 이미 자신을 알아보고 있었다. 아무리 안경을 쓰고 가발을 썼다고 한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영지를 둘러보는 자신을 못 알아볼 리가. 다만 제 사정을 대충 눈치챈 건지 모르는 척 눈감아 주었을 뿐이다.

    “이제 슬슬 시작할 시간 아닌가? 어서 가자, 일.”

    “응.”

    하루 종일 그녀의 손에 잡혀서 온 마을 곳곳을 돌아다닌 것 같은데도, 이렇게 매번 손목이 잡힐 때마다 귓불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서 표정까지 감출 노력은 필요치 않아 다행이었다.

    이엘이 일라이저의 손을 끌고 부지런히 달려간 곳은 광장 중앙에서 열린 인형 극장이었다. 아까 낮에 과일 사탕을 먹고 있던 두 사람에게 다가온 아이가 준 홍보지를 받은 뒤부터, 이엘은 줄곧 이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

    “응. 넌 아니야?”

    “나도 좋아.”

    비록 내가 좋아하는 건 인형극이 아니라, 너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지만.

    속내를 숨긴 일라이저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이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성년도 지나지 않은 어린 소녀 같았다. 별것 아닌 것 하나에도 이엘은 설레고 행복해했다. 일라이저는 그녀가 즐거워하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지켜 주고 싶었다.

    “시작하려나 봐.”

    이엘은 뭐가 그렇게 설레는 건지, 인형극이 시작되는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꼼지락거리며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했다.

    그럴 만도 하다. 한 번도 제대로 성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그때까지도 그녀의 옆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보던 일라이저가 시선을 틀어 인형극이 한창인 앞을 보았다. 제 입가에서 작은 웃음꽃이 폈다. 그러고 보니 둘째 누님이 인형극을 좋아하셨지…….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터라, 일라이저의 두 누나들은 그를 제 자식 키우듯 애지중지 돌봤다. 특히 후작령에서 열렸던 축제는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일라이저의 손을 꼭 잡고 함께 참석했다. 자신이 아팠던 날을 제외하면, 정말로 매일같이 이 축제를 즐겼던 것 같다.

    일라이저는 추억을 묻어 두고 고개를 올려 밤하늘을 쳐다봤다. 믿기지 않는 평화였다. 비록 전쟁의 트라우마로 인해 불꽃놀이가 전부 금지된 터라 하늘이 고요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름다운 평화의 축제였다.

    “엘. 고마워.”

    “응? 무슨 말 했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일? 크게 말해 줄래? 잘 안 들려!”

    주변의 환호성이 큰 데다가 일라이저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 탓에 바로 옆에 앉아 있었는데도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마침 인형극이 끝나면서 연이어 터진 박수 소리에 이엘이 귀를 틀어막고 일라이저를 다시 부르려고 할 때였다.

    펑―! 퍼어억―! 퍼엉―!

    바람 빠진 듯한 소리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 무언가가 펑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터진 폭죽 소리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멈춰 정적이 되었고, 그 정적은 3초 만에 깨져 버렸다.

    “꺄아아악!”

    “아악!”

    “꺄악!”

    온갖 비명 소리에 귀를 막고 있던 이엘마저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영지 곳곳에 배치해 뒀던 기사단과 경비병들이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겁에 질린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엘!”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사람들을 먼저 진정시켜!”

    전쟁 이전엔 축제 때마다 곧잘 하던 불꽃놀이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고작 불꽃놀이로 쓰는 작은 폭죽 하나에도 사람들은 공황에 빠졌고 이성을 놓아 버렸다. 특히나 일라이저의 영지민들은 자잘한 전쟁을 수차례 겪었던 터라 그게 더 심했다.

    이엘은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소리를 치며 일라이저의 등을 떠밀었다.

    “일라이저, 어서!”

    “하지만……!”

    “누군가 일부러 일으킨 소동이야. 주범을 찾아내!”

    “……알겠습니다.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십시오!”

    일라이저가 쓰고 있던 가발과 가면을 집어 던지고 기사단에 합류했다. 그의 뒷모습을 확인한 이엘은 품 안에 넣어 두었던 리볼버를 꺼내 총알을 끼웠다.

    “부디 내 예상과 달랐으면 좋겠는데…….”

    어떤 철없는 아이가 뭣도 모르고 쏘아올린 불꽃이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축제를 망치기 위해, 혹은 자신을 유인하기 위해 벌인 짓이라면…… 조금 슬플 것 같았다. 행복했던 일주일여 간의 축제 기간이 이렇게 엉망으로 끝나 버린 게.

    됐어.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냉정을 되찾은 이엘이 허리를 숙이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정말로 누군가 일부러 이런 짓을 꾸민 거라면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역시 세작이라던 놈의 짓일까? 하지만 오늘 일정은 일라이저가 갑자기 요청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이가 한 손에 꼽힐 텐데. 게다가 전부 제 최측근이었고. 그러니 정보가 새어 나갔을 리는 없다.

    ……단순한 사고인 걸까? 아니면 설마 자신이 이곳에 오기만을 내내 기다렸던 건 아니겠지.

    소란스럽던 사람들은 진정한 건지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기사단과 경비병의 안내를 따라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엘은 그 자리에 서서 금세 고요해진 밤하늘을 쳐다봤다. 폭발은 단 한 발뿐이었으므로 희뿌연 연기도 희미하게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엘!”

    상황을 대충 수습하고 돌아오던 일라이저가 다급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엘은 가만히 하늘을 주시하고 있다가, 뭔가를 찾은 건지 그의 부름에 답하지도 않고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엘!”

    “따라오지 마!”

    앞서 달리던 그녀가 다리를 멈추더니 고개를 뒤로 돌려 일라이저를 바라봤다.

    “아래에서 대기해, 일라이저.”

    “하지만……,”

    “혹시 노아나 하트가 오면 마찬가지로 아래에서 대기하라고 전해. 저 위엔 나 혼자 다녀올게.”

    “위험합니다.”

    “일단은 한 놈뿐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내 말대로 해.”

    그녀는 차분히 그를 타이르고 다시 언덕을 향해 달렸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향을 역으로 추적했더니 이 언덕 위를 향하고 있었다. 여기서 쏘아 올렸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제 시야 끝에 걸린 건 아주 작은 체구 하나. 누군가의 단독 소행인 듯했다.

    벅차는 숨을 가다듬고 언덕 위에 도착했을 때, 이엘이 마주한 건 백발의 노인이었다. 허리가 굽어 기억하던 모습보다 체격이 더 작아 보였지만, 그녀는 그를 알고 있다.

    “그대의 이름이…….”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루벤 단입니다. 과거엔 남작으로 폐하께 인사를 드렸지요.”

    “그래, 기억한다.”

    “저를…… 기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대는 궁정 화가였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때는 얼굴에 자신감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저 오랜 삶에 지친 평범한 노인의 얼굴이었다.

    “그대가 이런 짓을 벌였나?”

    “예, 폐하를 뵙고 싶어서 이런 짓을 벌였습니다. 이제 저는 폐하를 알현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니까요. 이 일이 끝난 뒤에 목숨으로 저를 벌하셔도, 저는 그 벌을 마땅히 받겠습니다.”

    “영주의 눈을 피해 나를 만나고자 한 이유는?”

    “영주님은, 그러니까 러셀 후작님께선 아마도 지금쯤 제가 윌터 남작의 세작이라는 걸 눈치채셨을지 모릅니다.”

    “…….”

    “그분의 성정은 제가 잘 알고 있지요. 아마 이 일이 끝난 뒤에…… 저희 가문을 멸문시키실 듯하고요.”

    일라이저는 스스로가 여전히 인간에게 무르다고 표현했지만, 그는 예전과 달라졌다. 더 이상 알면서 넘어가 주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반기지만, 등지고 배신한 자들마저 품어 줄 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그게 두려워 짐을 대면코자 했다?”

    “폐하. 아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원래 평민이었습니다. 그것도 둘째였지요. 성도 받지 못한 채 부모에게 버려져 그대로 끌려가 죽을 뻔했지만, 제겐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재능이요.”

    “…….”

    “덕분에 당시 황제 폐하로부터 관심과 지원을 받았고, 무사히 가문의 성도 받아 궁정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겐 남작이라는, 과분한 작위도 내려왔고요.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은 다 저의 노력이고 전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멸문만은 피하고 싶다는 건가?”

    “염치없지만…… 예, 그렇습니다. 저를, 제 조카를, 제 조카의 아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백발의 노인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내려놓고 그녀의 앞에 엎드렸다.

    “조카의 아들이…… 올리세스 윌터 남작에게 잡혀 있습니다.”

    “짐이 기억하기론 과거에 그대가 윌터 가문과 혼인을 했던 걸로 아는데. 그들이 왜 조카의 아들을 잡고 협박하는 거지?”

    “혼인을 했다고 모두 가족이 되는 건 아닙니다.”

    노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에겐 형이 하나 있었고, 지금 일라이저의 영지에 그와 함께 들어와 살고 있는 건 그 죽은 형의 아들이라고 했다. 실질적으로 올리세스의 세작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조카라고.

    윌터 가문과 혼인 관계가 되었으나 그들은 유서와 정통 있는 귀족 가문이었고 자신은 평민에서 귀족이 된 가문에 불과했다. 그 당시 제국이 제아무리 평민들이 자신의 삶을 만족하며 살았다고 해도, 엄연히 귀족과 평민은 차이가 있었다.

    노인은, 루벤은 어렵게 이뤄 낸 신분 상승의 절망을 맛보았던 셈이다.

    “그리고 그대의 조카는,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작이 된 거다?”

    “예, 폐하. 물론 그렇다 해도 조카와 제가 저지른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어린것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대와 그대의 조카로 인해 짐이 이곳으로 오는 길에 습격을 당할 뻔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감히 이따위 동정을 짐에게 바라지는 못할 텐데.”

    “맞습니다. 감히 폐하의 그림자도 바라보아선 안 되는 위치입니다.”

    “…….”

    “그러나 벼랑 끝에 몰렸다면, 무엇이든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이엘은 아까 오전에 초상화를 만질 때 그림이 최근에 그려진 것이라는 걸 눈치챘다. 아마도 이 그림을 가져온 자가 세작이지 않을까 했는데, 막상 마주한 사람이 자신이 아는 궁정 화가였을 줄이야. 이엘은 말없이 바닥에 엎드린 노인의 작은 등을 쳐다봤다.

    “일이 끝나는 대로 저의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으로 제 조카와 그 자식만은 면해 주십시오. 폐하, 감히 폐하께 청합니다. 부디 미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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