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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88화 (288/488)
  • 288화

    가면을 쓰는 건 해가 진 뒤부터라고 했으니 대낮인 지금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변복이 필요했다. 이엘은 오드의 도움으로 머리와 눈동자 색을 바꿨고, 일라이저는 가발과 안경을 썼다.

    “폐하, 혹시 구경……,”

    “호칭 때문에 들키겠어.”

    “아.”

    “그냥 엘이라고 불러 줘. 나도 그대를 일이라고 부를 테니까.”

    “하지만…….”

    “어서.”

    “……알겠습니다, 엘.”

    “웬만하면 경어도 금하고. 둘 다 오늘 하루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즐기는 건 어때.”

    “…….”

    “우리가 어린 시절에 만나서 친구가 됐다는 걸 가정하고.”

    그녀의 말에 일라이저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유……. 그래, 정말 그녀는 자유를 찾은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일라이저는 이엘이 그 어떤 사람보다 황제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살아가는 게 더 그녀답다고도 생각했다.

    한 사람의 제국민으로서는 황제가 된 그녀가 좋았고, 한 사람의 지인으로서는 평범한 그녀가 좋았다. 모순된 마음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건, 아마도 그녀를 사랑하는 모든 이가 같겠지.

    “일. 얼른 와!”

    “……응.”

    조금 전 이엘의 말 때문인지 마치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상 틀린 말도 아니다. 덩치만 자랐을 뿐, 자신의 마음과 영혼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앞을 보고 똑바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음을 절감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접지 못한 걸 보면.

    “엘. 잠깐만!”

    “왜?”

    “이, 이거 맛있는데…… 먹을래?”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에게서 황녀의 모습을 찾았던 탓에, 일라이저는 이엘의 말처럼 그녀를 편하게 대하는 게 어려웠다. 지금도 진땀을 빼듯 간신히 말을 잇는 게 고작이었다.

    뒤돌아선 채 그를 물끄러미 보던 이엘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박장대소하듯 큰 소리를 내며 웃는 탓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두 사람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싫어……?”

    “아니. 좋아.”

    “근데 왜 웃어…….”

    “그냥.”

    그렇게 대꾸한 이엘은 일라이저의 손목을 잡고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렇게 있으니 이온이 떠올라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이온이 떠올랐다. 마치 어린 시절 제 오라비의 손을 잡고 이렇게 사람들 속을 돌아다녔던 것 같은 착각이……. 까닭 없는 기시감에 그녀는 웃고 있던 얼굴을 지우고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많이 피곤했나.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엘. 방금 무슨 말 했어? 입 모양이 안 보여서 못 들었어.”

    복잡한 인파 속을 빠져나가며 일라이저가 그녀를 거듭 불렀지만, 이엘은 그의 손을 잡은 채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

    “그러니까 네가 그 자식의 아들이었다고?”

    “맞습니다. 근데 그 자식이라고 하니까, 듣는 ‘그 자식의 아들’은 기분이 썩 좋진 않네요.”

    “그럼 내가 너희 고니 따위를 받들어 줘야 하나? 내가 일일이 네 기분을 신경 써야 해?”

    고니에 관해서는, 아니. 시모네에 관해서는 더없이 차가워지는 패티스가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스완을 쳐다봤다. 마치 입에 살기라도 머금은 것처럼,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서늘했다.

    “결국 그놈은 알고 있었으면서 누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거군?”

    “시몬도 전부를 알고 있던 건 아니었어. 그리고 바꾸고 싶어도 이미 정해진 미래는 바꿀 수 없다고……,”

    “아니. 놈은 바꿀 노력도 하지 않은 멍청한 자식이야.”

    패티스의 노성에 변명하던 피시의 입도 다물어졌다. 그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서.

    맞다. 적어도 그녀가 세잔티노에서 죽을 것을 알았다면, 아니. 하다못해 전쟁에 휩쓸려 죽을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조이나를 살리기 위해 노력이라도 했어야 한다. 정말 그녀를 사랑했다면.

    “노력해 봤자 안 바뀐다니까요? 잘못하면 더 끔찍한 결과가 초래된다잖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스완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뭘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나 본데요, 제 아버지가 그쪽 하이에나 친구에게 전부 다 말했을 것 같아요?”

    “…….”

    “종족이 나자르로부터 받은 성력을 함부로 썼기 때문에 저주에 걸렸어요. 그걸 알고 있는 제 아버지가 함부로 이야기를 했겠어요? 또 무슨 저주를 받을지 알고요.”

    시모네가 피시에게 유언을 남겼던 건 바로 지금을 위해서였다. 지금의 미래를 위해 과거의 피시에게 유언을 남겨 둔 것이다. 결국 필요치 않으면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피시는 스완의 말을 들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빈센트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페널티를 받았다고……. 그는 시모네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고, 발설하면 제게 저주와 같은 페널티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친구인 시모네를 살리기 위해 그 말을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평가하지 말지 그래요? 혼자만 진실을 알고 있는 게 얼마나 끔찍한 건지 그쪽들은 모르잖아요.”

    “…….”

    “끔찍한 미래를 바꾸기 위해, 당신들이 모르는 곳에서 그 사람이 무슨 노력을 했을지. 모르잖아요.”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하던 수줍은 소년이 시모네였다. 그는 사냥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여리고 겁이 많았지만, 적어도 조이나를 위해선 용기를 낼 줄 아는 자였다. 피시는 그가 죽는 순간까지 조이나의 손을 놓지 않았던 것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스완의 말처럼, 시모네는 아무도 모르게 홀로 고군분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의 성격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몇 번이고 실패하면서, 어쩌면 더 큰 고통을 감당하면서 노력했지만 전부 수포로 돌아갔겠지.

    “바꾸려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에요. 혼자만 그 고통을 알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마치 직접 겪어 본 것처럼 얘기하는군.”

    “아버지의 성력이 제게 스며들고 있거든요.”

    “…….”

    “그 감정도 조금씩 스며들고 있어요.”

    스완은 한쪽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낮은 탄식과 함께 열린 창문 밖을 쳐다봤다. 아버지인 빈센트를 만난 뒤로 몸에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아니. 확신한다. 아버지가 갖고 있었던 성력이 이전보다 더 강하고 빠르게, 제게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실제로 제멋대로 튀어나오던 하얀 빛을 아주 미세하게나마 제어할 수 있게 된 게 그 방증이었다.

    “근데 너. 고작 그 이야기를 하겠다고 피시를 따라 제도로 온 건가?”

    “아니죠. 백작님을 만나 물어볼 게 좀 있어서 왔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불필요한 질문은 삼가도록.”

    “혹시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

    “아버지는 당신을 만나 주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만나러 가실 수도 없을 거고요.”

    사실 피시와 스완이 가져온 지금의 정보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백조에게 도움을 받을 것인가, 받지 않고 스스로 알아낼 것인가. 백조와 손을 잡는다고 한들, 그게 과연 도움이 될지…….

    ……아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제국의 과거가 필요하다.”

    “과거요?”

    “모두에게 숨겨져 있는, 은밀한 과거.”

    “…….”

    “하지만 그건 호수에만 갇혀 산 네 아비도 모를 것이다.”

    “그러네요. 이건 좀 어렵겠네.”

    뭍으로는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는 백조가 알 리 없는 정보였다. 역대 황제들의 최측근이면 모를까.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죽었으니, 사실상 누구도 알 수 없는 정보였다. 패티스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건 게임 같아.”

    뜬금없는 피시의 목소리에 패티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커다란 퍼즐 판 위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야 돼.”

    “…….”

    “그리고 그 조각들은 서로 연결돼 있어. 내가 세잔티노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스완을 이곳으로 데려오게 된 것처럼. 하나를 맞추면 그 옆의 퍼즐도 맞출 수 있게 돼.”

    “그 얘긴 지금 이 문제도 저놈이 해결할 수 있다는 소리야?”

    “응. 연결 고리가 그렇게 이어지고 있으니까. 이건 이미 정해진 틀 안에서 맞춰 나가고 있는 게임이야.”

    “혹시 신의 음성을 말하는 걸까요?”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줄곧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스완이 미간을 좁힌 채 피시를 돌아보며 물었다.

    “신의 음성이라면…….”

    “나자르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하잖아요. 예를 들면 신탁 같은 것 말이에요.”

    과거엔 신께서 직접 나자르를 통해 사람들에게 신탁을 내려 주었다고 했다. 지금의 오드나 빈센트가 미래의 일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게 내려온 음성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그것도 끝이 나 버렸다.

    “신탁이라고?”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 선조들은 신탁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나자르인의 능력을 거의 비슷하게 사용했으니까요.”

    “그렇군.”

    “그럼 백작님은 신탁에 관한 내용을 찾아봐 주세요. 특정한 날짜라든가, 그런 아주 작은 정보라도 좋아요. 최대한 구체적으로요. 아버지는 제가 핵심을 묻지 않는 한, 절대 정확하게 말해 주지 않을 사람이니까요.”

    호수에서도 그랬다. 묻는 것에만 대답할 뿐, 빈센트가 저희에게 전해 준 정보의 양은 아주 극소량이었다. 그러니 이쪽에서도 단단히 준비를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스완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패티스를 향해 말했다.

    “좋아요. 한번 해 봅시다. 폐하께는 우선 비밀로 하고요.”

    “비밀로?”

    “왠지 폐하 몰래 움직여야 할 것 같거든요. 아버지가 폐하가 계신 곳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걸로 봐선.”

    “…….”

    “따로 찾아오라는 의미였겠죠.”

    스완의 말에 패티스는 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가면을 꺼내 얼굴에 쓰자, 이엘과 일라이저도 거리에서 구매한 것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일, 잠깐만. 가면이 비뚤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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