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87화 (287/488)
  • 287화

    그녀가 줄곧 올라섰던 노아의 발등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팔랑팔랑 날아가듯 그의 품에서 벗어나 옆에 딸린 방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엘의 손에 들린 건 비로드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였다.

    “그건…….”

    “이러면 공작의 마음이 나아질까?”

    검지에 맞게 세공했는데 다행히 중지에도 알맞게 들어갔다. 장미 모양으로 세공된, 세상에 하나뿐인 반지를 보여 주며 이엘이 활짝 웃었다. 노아가 몇 년을 품에 넣은 채 간직만 하다가 그녀를 향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던 밤에 건넸던 그 반지가, 이엘의 중지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내 소중한 이가 나를 위해서 만들어 준 반지야.”

    “…….”

    “난 황녀의 반지에 부여한 의미를, 실은 여기에 부여했어야 옳다고 보거든.”

    “엘.”

    “응?”

    자신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가 예쁘게 반짝거렸다. 그 눈이 너무 예뻐서…… 노아는 아무도 그녀의 눈동자를 볼 수 없게, 그녀가 아무도 보지 못하게 녹색 눈동자를 훔치고 싶다는 나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는 이엘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꽉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자신과 동일하게 뛰는 세찬 심장 소리를 느끼며 평안을 되찾았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 따윈, 이젠 정말 모르겠다.

    *

    “폐하. 감상하시는 중에 방해하여 죄송합니다만,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일라이저가 그녀의 뒤에서 한참이나 기다려 주었음을 곁에 있던 하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일라이저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며 감시하는 듯했지만, 딱히 제약을 걸며 방해하지는 않았다.

    한편 이엘은 기사단과 가벼운 대련을 마친 뒤에 저택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첫날 일라이저로부터 안내를 받았던 커다란 초상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감상하던 중이었다.

    그저 단순한 초상화였음에도 그녀는 꽤 오랜 시간을 그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게 그려진 세 사람의 모습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뛰어난 그림 실력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은 바라지도 못했던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실존한다는 게 신기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혹 만져 봐도 되겠나?”

    “그림 말씀이십니까? 예, 물론입니다.”

    이엘은 커다란 그림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손을 뻗어 만졌다. 그렇게 한참 표면을 만지다가 곧 눈을 감은 채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손이 불에 그을려 훼손된 부분에서 멈췄다.

    “혹 이 그림을 가져왔던 이를 만나 볼 수 있을까? 이걸 소유하고 있었다고 했지? 여기 정착했나?”

    “아, 그자는…….”

    “아니야. 됐어.”

    “…….”

    “그 건은 후작에게 맡기겠네.”

    “……알고 계셨습니까?”

    “세작 말인가? 누군지는 지금 알았고, 후작이 찾아낸 건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지.”

    이엘은 저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 일라이저의 얼굴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후작은 표정에서 티가 나니까.”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모를 리 없잖아.”

    ……모르시면서. 제가 감히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모르시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후작은 욕심이 없구나.”

    “…….”

    “짐은 그대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데, 정작 후작은 짐에게 바라는 게 없어. 하다못해 로빈조차 짐에게 저 바라는 것을 요구하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 없나? 사실 짐이 무엇이든 주고 싶어서 그래. 후작은 짐이 공작 위로 승격시켜 주겠다는 말에도 거절했지 않나.”

    건국 초기에 이엘이 염두에 뒀던 5개의 공작 가문은 기존의 늑대, 독수리와 더불어 승격된 뱀, 그리고 일라이저와 윌터 백작을 각각 공작으로 승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거절하며 물러난 탓에 각각 조르단과 카노프에게 공작 위가 돌아갔다.

    이엘은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윌터 백작이야 그의 속셈을 알아낼 요량으로 공작 위를 제안했던 거지만, 일라이저는 그녀가 진심으로 승격시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후작 위를 받는 것조차 무겁게 받아들였다.

    “폐하께 은혜를 입게 되었으니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영지도 안정을 되찾았고, 부족한 것은 달리 없습니다.”

    “그래? 조금 아쉽군. 짐도 그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그 말을 끝으로 이엘은 웃으며 일라이저의 곁을 지나쳐 만찬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폐하.”

    “응?”

    그러나 뒤에 있던 일라이저가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앞에 섰다. 걸음을 멈춘 이엘 앞에, 일라이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더니 살짝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한 가지만 감히 청해도 괜찮습니까?”

    “응, 무엇이든. 짐이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이엘은 빙긋 웃으며 일라이저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는 그녀의 검지에 걸린 반지 위에 짧게 키스하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의 하루를…… 제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루?”

    “……오늘이 영지 축제의 마지막 날입니다. 폐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함께 축제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이 한마디를 내뱉는 것에도 자신에겐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만큼은 그녀의 뒤를 지키고 선 하트의 매서운 시선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사감이 담겨 있지 않았더라면 당당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녀를 대함에 있어, 자신에게 사감이 없는 순간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서.

    “그러고 보니 오늘은 가면을 쓰고 돌아다닌다던데.”

    “예.”

    “좋아. 그럼 함께 다녀오자. 미리 말하지만 호위는 됐다, 하트 경.”

    “하지만……,”

    “러셀 후작은 기사단장이야.”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이쪽은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게다가 여긴 그의 영지이기도 했고. 두 사람의 뒤를 따를 만한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하트는 그녀 너머에 서 있는 일라이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그는 제 분수를 잘 아는 사람이니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

    정찬이 끝나고 환복을 마친 이엘은 침실에 잠깐 돌아왔다가 카펫 위에 엎드려 있는 커다란 늑대를 발견했다. 어쩐지 토라진 듯한 늑대의 모습에 이엘은 웃음을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그렇게 쳐다봐도 취소할 수 없고, 공작을 데려갈 수도 없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서 그렇게 늑대로 돌아가 투정을 부리는 건가?”

    “…….”

    “아니라고는 안 하네.”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이엘이 폭소하듯 크게 웃자, 노아는 귀까지 접고는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한참을 웃던 이엘이 가까스로 웃음을 멈췄다. 바닥에 엎어져 자신을 외면하는 늑대의 앞에 다가가 쪼그려 앉은 그녀는 손으로 늑대의 검은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질투하는 거야? 상대가 일라이저인데?”

    “상대가 러셀 후작이니까요.”

    “일라이저는 걱정할 필요 없는데.”

    “폐하는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이렇게 투정 부리면 내가 어떻게 축제를 즐길 수 있겠어.”

    “투정 부린 것 아닙니다. 다녀오십시오, 폐하.”

    귀엽긴. 이엘이 쿡쿡 웃음을 눌러 참더니 손등으로 늑대의 코를 다정하게 쓸었다.

    “다녀와서 놀아 줄게.”

    “약속하셨습니다.”

    “알겠대도. 음, 뭘 할까? 공 던지기 어때? 전에 보니 로날드나 슈프가 꽤 좋아하던데. 공작도 공 던지는 걸 좋아하……,”

    “그런 것 말고요.”

    자리에서 불쑥 일어선 커다란 늑대가 쭈그리고 앉아 있던 이엘을 뒤로 밀쳤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쿠션에 머리가 닿은 터라 다치진 않았지만 조금 놀랐다. 제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이엘은 눈을 깜빡거리며 열었던 입을 꾹 다물었다. 늑대는 제 목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렸다.

    “노, 노아……?”

    “다른 걸로 놀아 주십시오.”

    “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고는 제 목에 한참이나 털을 비비적거리며 제 냄새를 잔뜩 묻히고 나서야 떨어졌다. 정말 나쁜 습관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겨우 침실을 벗어났다.

    “폐하.”

    복도 끝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라이저가 그녀를 발견하곤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아차 싶었던 건지 재빨리 입꼬리를 내려 감정을 숨겼지만 이엘이 이미 그를 발견한 뒤였다.

    “후작이 축제를 이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군.”

    “……예.”

    귀까지 붉어진 걸 보니 정말로 축제가 좋은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엘은 키득키득 웃으며 그를 끌어 후작저를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