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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86화 (286/488)
  • 286화

    “줄곧 궁금했는데. 공작은 날 언제부터 좋아했어?”

    이엘은 노아의 품에서 살짝 떨어지며 장난을 담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봤다. 노아의 당황한 모습이 퍽 귀여울 듯하여 부러 짓궂게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노아에게선 즉답이 돌아왔다.

    “폐하를 저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던 순간부터인 듯합니다.”

    “어……음, 그게 언젠데?”

    “레온의 영지에서 씨앗을 가져오셨을 때부터.”

    “…….”

    “어쩌면 그 이전부터요. 폐하를 그곳으로 보내고, 전 당신이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기다렸으니.”

    그는 언제나처럼 담담하고 당당하게 고백했다.

    “사실 조금 걱정도 됐습니다. 레온이 그 성질을 못 이기고 혹 당신을 해쳤을까 봐.”

    “……난 그대가 날 죽이려고 레니에게 보냈다고 생각했는걸.”

    “처음엔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역시…….”

    “하지만 후회했어요.”

    노아는 웃음을 흘리며 다시 천천히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당신이 제 반려가 될 줄 몰라서 그런 짓을 벌였으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글쎄?”

    “정말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음.”

    “엘. 부디, 제게 당신의 자비를 내려 주세요. 응?”

    사실 그런 것 따위 다 잊어버린 지 오래인데도. 이엘은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워 장난치려 대꾸했던 건데, 노아는 그녀의 시선을 줄기차게 따라붙으며 그 잘생긴 얼굴로 이엘을 홀렸다.

    “어떻게 하면 용서해 주실 건가요, 폐하.”

    “으음…….”

    “폐하. 저 좀 봐주십시오.”

    내가 그 얼굴에 약한 걸 알고 그러는 건가? 이엘이 짐짓 미간을 찌푸렸지만, 결국 한숨과 함께 포기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다 알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예.”

    “…….”

    “이렇게 하면 폐하께서 마음이 풀리시는 걸 알고 있습니다.”

    공작은 정말……. 이엘은 말을 하다가 말고는 노아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직 노아만 제게 줄 수 있는 안온함이 있다. 이엘은 마치 헛헛했던 제 마음을 노아의 것으로 가득 채우려는 것처럼 한참을 그렇게 매달려 있었고, 노아는 당연하다는 듯 제 품에 안긴 작은 체구를 부드럽게 토닥거려 주며 마주 응했다.

    “나는 그대의 얼굴만 좋아하는 게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마치 변명이라도 하는 것 같은 웅얼거림에 노아가 웃음이 터졌다.

    “정말이야. 물론 오뚝한 코도, 짙은 눈썹도, 단단한 선도 다 좋아하지만.”

    “그렇습니까? 폐하께서 좋아하신다니 기쁘군요. 우논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할 정도입니다.”

    이종족의 뛰어난 외모는 사실상 같은 이종족에겐 의미가 없었다. 그 기준이란 게 전적으로 인간이 정한 거니까. 그러니 살면서 자신이 아름답거나 잘생겨서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의미였다.

    “이런 모습이라도 사랑해 주시는 분이 계시니, 기쁘군요.”

    “……놀리는 거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하지만 이런 얼굴이라도. 이런 외모라도. 조금이라도 네가 좋아한다면, 나는 이종족으로 태어난 게 좋다.

    “아무튼 그대의 얼굴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예.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듣고 싶어요.”

    저렇게 내게만 능청맞아. 이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다가 다시 노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는 중얼거렸다.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기엔 아직 자신이 그렇게 낯이 두껍지 못해서.

    “나는 모든 왕은 다 이기적일 거라고 생각했어. 보고 자란 게 내 아비밖에 없어서 그런 편협한 생각을 했던 거야.”

    “그렇습니까?”

    “응. 그리고 처음 땅을 밟자마자 마주했던 게 또 하필 로빈이었잖아. 그래서 다 그런 줄로만 알았지. 음침하고 차갑고 저밖에 모르는…….”

    “…….”

    “하지만 내가 늑대의 영지로 옮겨 오고, 그대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그러면서 나는 그대를 동경하게 됐어. 정말로.”

    그가 온 힘을 다해 늑대들을 지키는 모습에, 또 그 울타리 안에 자신이 들어감에, 이엘은 진심으로 노아를 동경하게 됐고 바라보게 됐다.

    “그러니까 나는 노아, 그대의 모든 것을 사랑해.”

    “폐하. 지금 제 마음이 어떤지 아십니까?”

    “응? 어떤데?”

    “폐하께서 피곤하시지만 않았어도 곧장 저곳으로 갔을 겁니다.”

    그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봤던 이엘이 황당함과 부끄러움으로 물들어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까 내가 놀렸다고 똑같이 짓궂게 놀리는 거야? 엉망이 된 침대를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노아의 표정에 더 기가 찼다.

    “내가 조금 전에 일어났다는 걸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지?”

    “폐하께선 절 오래 기다리게 하셨고요.”

    “…….”

    “갈까요, 폐하?”

    “안 돼. 힘들어. 지쳤어.”

    “그럼 또 얌전히 참고 기다려야겠네요.”

    그 말과 함께 습관처럼 그녀의 귓불을 이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고는 붉은 자국이 생긴 그녀의 목에 자잘한 키스를 새겼다가 떨어졌다.

    “폐하.”

    “응.”

    “저와 러셀 후작의 관계 때문에 곤란하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백조와 하이에나. 종족을 뛰어넘는 우정이란 게…… 제게도 있었습니다.”

    “응.”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러셀 후작의 아비이자 전 2기사단장 루시우스 러셀입니다.”

    ‘우정.’ 노아는 그와의 감정을 우정이라고 정리했다. 이미 그를 지독하게 혐오해서 미치도록 증오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때의 감정은 우정이 확실하기에.

    “그 당시의 대부분 이종족들은 인간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받고 싶어 했다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인간의 우호적인 관심을 바라는 어린아이 같았으니까요.”

    “…….”

    “루스는 신분에 상관없이, 종족에 관계없이.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는 좋은 인간이었습니다.”

    이엘도 알고 있다. 자신의 검술 스승이었던 그는, 이온보다 뛰어난 그녀의 실력을 거짓 없이 칭찬하고 진심으로 받아 주었으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녀의 반응을 확인한 노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는 실력도 뛰어났어요. 제가 본 인간들 중 검을 정말 잘 쓰는 기사였습니다.”

    “맞아.”

    “우리는…… 경합을 벌이기도 했고, 이따금 숲을 뛰어다니기도 했어요.”

    처음 만났을 땐 당연히 루시우스가 노아보다 어렸다. 실제 나이도 그렇고, 외관상 나이도 그렇고. 그래서 노아는 그를 동생처럼 대했고, 루시우스도 노아를 곧잘 따랐다. 하지만 루시우스는 나이를 먹는 인간이었고 어느샌가 자신을 따라잡은 훌륭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처음 제 등에 태웠을 때만 하더라도 덩치가 작았던 것 같은데, 나중엔 저조차 무겁다고 느껴질 만큼 풍채가 커지던데요. 마치 자식이 자라는 걸 지켜보는 것처럼, 즐거웠습니다.”

    노아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 버린 형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다른 우논들과 어울리며 자라지 못했다. 이종족의 직계가 으레 그러하듯, 그 역시 완벽하게 자라길 요구받았고 실제로 그렇게 자랐다. 어린 시절의 친구라고는 같이 지낸 레온이 전부였으니까. 심지어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안드로도 가신처럼 자신의 곁을 보좌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러니 제게 루시우스는 동생이었고, 자식이었고, 친구였고. 어쩌면 자기 자신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루시우스를 사랑했다.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하고 동경했다.

    “하지만 1차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앞장서서 이종족의 암컷을 죽였습니다.”

    “…….”

    “심지어 제겐……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장이 곤란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는 황실의 기사단장이었고, 당시 쓰러져 가던 러셀 가문을 일으켜 세워 지지기반을 확실히 만든 공신었으니까. 황명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따르던 가문이 그의 가문이었다.

    그러니 잘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곤란했을지.

    “어쩌면 전 이상향을 그에게 투영했던 걸지도 모릅니다.”

    “…….”

    “이종족과 인간이 정말 친구가 될지 모른다는.”

    황실을 맹목적으로 좇는 그의 가풍이 자신과의 우정 앞에서 깨어지기를, 어쩌면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건 제 소망이었고, 헛된 바람이었다. 고작 전쟁 앞에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사라져 버렸다.

    결국 종족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루스 경이 그렇게 된 건, 전부 내 아비의 잘못이야.”

    “알고 있습니다. 이제 더는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

    “미워할 수도 없게 떠나 버렸으니까요.”

    르네의 손에 죽는 것을 두고 봤다. 기어이 그 손에 루시우스의 목이 들린 것까지 봤다. 그러니 나의 원한과 추억도 모두 거기에 두고 왔을 텐데…….

    “일라이저 러셀과의 관계 때문에 폐하께서 불편하시다면,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신경 쓰시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난 그런 걸 바라지 않아. 그대와 후작, 모두 하고 싶은 대로 해.”

    “…….”

    “지금도 내 욕심 때문에 몇 명이나 마음을 억누르고 살아가는지 잘 아는걸. 난 그대들에게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아.”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담을 수 없는 과거가 됐다. 그러니 계속해서 과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억지로 그 과거를 전부 잊게 만들 수는 없었다.

    “말해 줘서 고마워, 노아.”

    “조금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니야. 오늘은 정말 고마워.”

    발꿈치를 들어 그의 뺨 위에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그녀의 맑은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아가, 뭔가 생각이 난 듯 잡고 있던 이엘의 손을 제 쪽으로 조금 당겼다.

    “폐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응. 뭔데?”

    “러셀 후작의 말에 따르면, 폐하께서 어린 시절에 윌터 백작가에 관심이 있으셨다고 하던데. 어떤 이유로 관심을 가지셨는지 해서요.”

    “아아.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이온, 그러니까 황자가.”

    윌터 백작가는 원래 적당히 부유하고, 적당히 세력이 있는 평범한 지방 귀족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권력엔 크게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중립적인 위치를 고집하는 편이었다. 워낙 공신 가문이라 귀족들 사이에서 명망이 두텁기는 했어도, 전쟁 직전엔 평범한 쪽에 속하는 귀족이었다.

    물론 한때는 황녀와 혼례를 올렸던 공작가이기도 했지만, 모종의 일로 백작으로 격하된 뒤로는 제도를 떠나 조용히 살고 있던 가문이었다. 그러니 특별하지도 않은 가문을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게 신기했던 것이다.

    “윌터 백작의 차남이 황자의 친구였어.”

    “차남이요?”

    “응. 아주 똑똑해서 어릴 때 연구소에 들어왔었거든.”

    제국은 원래 둘째부터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첫째와 둘째가 동일한 성별일 경우엔 세금도 더 많이 부여했기 때문에, 웬만한 인간들은 아이를 하나 이상 낳지 않았다. 그래서 차자에겐 성을 주지 않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간혹 첫째나 둘째가 뛰어날 경우, 연구소나 기사단 등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다. 윌터 백작의 차자가 그런 경우에 속했다.

    “아마 그때 친구가 된 듯해.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나와는 오며 가며 잠깐 마주친 게 전부라서.”

    “차남이 있었습니까? 그럼 그는 지금…….”

    “응. 죽었어.”

    “…….”

    “전쟁으로 죽은 건 아니고. 아마 무슨 사건에 휘말려 죽었던 걸로 기억해.”

    그때 이온이 꽤 슬퍼하며 밤낮을 앓았다. 아주 어린 시절이라 이엘도 제대로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죄명이 반역죄와 비슷한 수준의 중죄였던 것만은 기억한다. 물론 진짜 반역죄는 아니겠지. 그랬다면 윌터 백작가는 아예 멸문당했을 테니까.

    오히려 전쟁 직전까지 윌터 백작이 제 영지에서 잘 먹고 잘 살았던 걸 보면, 황실에 밉보인 건 아닌 듯했다. 그래서 이엘은 그가 연구원이었다고 하니 실험에 휩쓸려 죽은 게 아닌가, 하고 추측했었다.

    “이름이 레노…… 아니, 리노였던가.”

    나이는 이온보다 서너 살 위였지만 황궁과 연구실에 또래가 없었던 터라, 두 사람은 곧잘 어울렸다.

    “윌터 백작가가 황가와 생각보다 깊은 관계에 있었군요.”

    “그래서 건국 초기에 작위를 승격하는 걸로 마음을 떠보려고 했던 거였어. 백작이 허튼 마음을 먹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근데 문제는 윌터 백작이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 있었던 모양이야.”

    “어쨌든 그쪽은 저와 러셀 후작, 그리고 유클리드에게 맡기십시오.”

    노아는 그녀의 오른쪽 중지를 제 손으로 부드럽게 매만지며 타일렀다. 원래대로라면 그곳에 끼워졌어야 할 황녀의 반지가 유클리드에게 돌아간 탓에, 중지는 반지 자국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애먼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는 노아를 향해 이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마음을 확인했다.

    “이제야 유클리드를 받아들인 건가?”

    “처음부터 폐하의 뜻을 따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놈을 신뢰하지 못하지만, 폐하께서 그를 받아들이시겠다면 저는 그저 그 뜻을 지지할 뿐입니다.”

    “받아들인 건 아니란 소리군.”

    “잠깐 손을 잡는 정도로도 놈에겐 과분합니다.”

    어쨌든 노아가 좋든 싫든, 유클리드는 이제부터 올리세스 윌터와 손을 잡는 척 그녀의 세작 노릇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그녀의 루비 반지를 가져갔다.

    ‘폐하의 마음을 샀다는 의미로. 그 반지를 증표로 가져가 놈에게 보여 주겠습니다.’

    ‘좋다. 짐의 반지를 그대에게 빌려주지.’

    ‘이렇게 쉽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유클리드 백. 그대는 짐의 신뢰를 사고 싶었던 게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백작이 먼저 짐을 의심하고 있구나.’

    ‘송구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폐하.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유클리드는 제게서 공손히 반지를 받아 갔다. 사실 황녀의 반지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보석이었지만, 그렇기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를 테면 은밀한 관계라든지.

    “특히 이것을 가져간 건 용납하기 힘들군요.”

    노아는 아까부터 반지가 사라진 이엘의 중지를 만지작거리며 못마땅한 듯 툴툴거리고 있었다.

    “그럼 이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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