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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85화 (285/488)
  • 285화

    *

    “폐하!”

    오드와 함께 돌아온 이엘의 얼굴이 몹시 피곤해 보였다. 침실 안을 지키고 있던 노아가 성큼성큼 다가와 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응. 조금 피곤해서 그래. 그보다 오드. 넌 얼른 돌아가서 쉬어. 나보다 더 피곤할 텐데.”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아니야.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 내가 찾아갈 때까지 쉬고 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하실 때 찾으세요, 폐하.”

    오드는 웃으며 침실 문을 열고 나왔고, 그와 동시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라이저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걱정을 가득 담은 낯으로 입을 뗐다.

    “폐하. 무사히 다녀오셔서 다행입니다.”

    “그래, 후작.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자세한 건 오후에 말하도록 할게.”

    “아……. 네, 그럼 푹 쉬십시오.”

    일라이저는 그렇게 대꾸하며 이엘과 노아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침실을 나왔고, 그의 뒤를 하트가 따라 나왔다. 딸깍.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일라이저는 조금 전 눈에 담았던 두 사람의 뒷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폐하껜 공작만이 가까이 갈 수 있는 건가. 분명 피곤하니 그만 나가라는 축객령이었는데도, 노아는 당연하게 그녀의 곁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자신과 달리 그녀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남자…….

    “후작님.”

    “…….”

    “러셀 후작님.”

    내가 조금만 더 나은 사람이었더라면……. 그럼 폐하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었을까? 하다못해 큰 공이라도 세웠더라면, 폐하께선 나를 더 쓸모 있게 사용하셨을 텐데.

    ……아니. 사실 조금만 더 솔직해지자면, 폐하께 다 말씀드리고 싶어. 내가…… 내가 당신의 약혼자였다고. 부끄럽지만 나는 당신을 먼발치에서 보고 한눈에 반했었다고. 그게 내 어린 시절의 풋사랑이었다고.

    말하고 싶어. 조금이라도 폐하께 내 마음을…….

    “각하.”

    그때 정신이 빠져 있던 일라이저의 어깨가 뒤로 홱 돌아갔다. 당황한 그의 앞엔 미간을 일그러뜨린 하트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그제야 일라이저는 정신을 차렸다.

    “아. 하트 경, 뭐라고 말했소?”

    “안색이 좋지 않은데 돌아가셔서 쉬십시오. 여긴 제가 지키겠습니다.”

    “아니오. 경이야말로 쉬지도 못하고 폐하를 보좌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여긴 내게 맡기고 경은 가서 쉬도록 하시오.”

    “숨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지금 각하의 모습은 말씀하신 것과 다르군요.”

    아. 그런가……. 일라이저는 잠시 잃어버렸던 이성을 되찾으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트가 저런 말을 할 정도였다면 제 잘못이 맞다. 밤새 잠도 못 자고 그녀의 귀환을 기다린 터라 피로가 온몸 구석구석에 번져 있었다. 쉬어야 할 사람은 하트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럼…… 경이 이곳을 맡아 주시오. 잠깐 눈을 붙였다가 교대해 주러 오겠소.”

    “각하. 저는 그 어떤 것보다 폐하가 중요합니다.”

    “…….”

    “죄송하지만 각하의 마음이 폐하께 누가 된다면, 저는 어떻게든 각하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을 막을 생각입니다.”

    “걱정 마오.”

    “…….”

    “내가 마음을 폐하께 전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나. 그녀의 아이의 대부가 되겠다는 선택. 그 아이의 친부가 아니라, 대부……. 하지만 그 자리조차 원래대로라면 자신에겐 감히 허락되지 않는 자리였을 터였다. 다정한 그녀는 허락해 주었지만.

    “경처럼 나 역시 폐하가 제일 중요하오. 내 마음이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힌다면 전할 생각 없으니 걱정 마시오.”

    아니. 사실은 전할 용기조차 없는 거지만.

    그녀에게 부정당할 제 마음이 가엽다기보다는 그 상황이 가져올 슬픔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 이엘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용기를 내서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어른이 된 자신은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도 없었다.

    “그런데도 만일. 내가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폐하께 누를 끼치려고 한다면.”

    “…….”

    “그땐 정말 경이 막아 주시오.”

    그 말을 끝으로 일라이저는 하트에게서 멀어져 제 침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폐하. 그런데 다른 이들은 어디 있습니까? 스완과 로날드가 보이지 않는 듯한데.”

    “일찍도 물어보는구나.”

    이엘이 푸스스 웃으며 노아의 코를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그녀는 졸린 건지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아닙니다. 주무십시오, 폐하. 오후에 여쭤보겠습니다.”

    노아는 줄곧 끌어안고 있던 이엘을 품에서 떨어뜨리더니, 이불을 턱 끝까지 올려 덮어 주고는 바닥에 떨어진 모포를 주워 침대에서 나왔다.

    “어디 가?”

    “햇빛이 쏟아져서 커튼을 치려고 합니다.”

    벌써 날이 밝았다. 뜨겁게 내리쬐기 시작한 햇빛 때문에 이엘이 숙면하지 못할까, 노아는 커튼을 쳐서 커다란 창문을 가렸다.

    “으응……. 알겠어, 그것만 하고 얼른 와.”

    이엘은 많이 곤했던 건지 하품을 길게 한 번 하고는 끔뻑거리던 눈을 완전히 감아 버렸다. 잠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노아는 모포를 걸친 채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새벽 내내 그녀를 기다리면서 마셨던 와인병과 잔이 손에 잡혔다.

    대충 잔에 따라서 목을 축인 노아는 이엘이 일어날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테오도로. 베아트리스.

    테오도로 레비 무어 르뷔아. 베아트리스 나타시아 리카르디스 르뷔아.

    그저 단어에 불과한데도, 오드의 말처럼 그 존재들이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벌써부터 그 아이들이 몹시 보고 싶어졌다. 눈을 감으면, 아이들의 얼굴이 선하게 그려질 것처럼.

    ‘그녀는 당신께 침묵할 테니, 당신이 알아내셔서 저를 찾아오십시오. 그렇다면 그때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오드의 그 말을 믿는다. 그는 신의 대리자이고 미래를 볼 수 있는 나자르니까……. 제게 말했다는 건, 그걸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였고 자신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녀와 아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내게 있어.

    그래, 천천히 생각해 보자. 왜 ‘그자’는 이엘을 노렸을까. 왜 이엘에게 접근했던 걸까.

    그만큼 간절했던 게 그녀여서? 아니. 그렇다고 그녀가 놈을 만나기 위해 간절했던 건 아니었다.

    살기 위해 간절했나? 그것도 아냐. 그녀만큼 간절한 놈들은 수두룩하다. 이를 테면 로빈이 그런 경우가 아닌가. 놈은 암컷을 얻기 위해 그토록 혐오하던 인간에게 기댈 정도였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아니다.

    그럼 그녀가 유일한 여자니까?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건 이쪽일까. ‘그자’는 신의 반대편에 서서 대적하는 악마 같은 자니까, 그녀를 이용해서 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모두에게 절망을 안겨 주려는 목적이었을지도.

    이엘이 그 수마에 걸려든 이유는 뭘까. 당시 그녀는 성년 언저리에 있던 어린 소녀였을 터였다. 어린 시절을 황궁에서 보내고 전쟁 이후론 땅속에서 살았다고 했지. 그렇다면 놈의 협박에 못 이겨 넘어갔을 수도 있겠군.

    게다가 이엘은 어린 시절부터 선황에게 세뇌와 학대를 빈번히 당했다고 했으니……. 그 흔적이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게 막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뭔가 있는 것 같아.

    “하아…….”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노아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눈을 감고는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아무래도 그 실마리는 로빈의 영지에 있을 것 같은데…….

    “노아.”

    “깨셨습니까?”

    “응. 나 얼마나 잔 거야?”

    “좀 더 눈 붙이셔도 됩니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어요.”

    “아니야. 밀린 일도 있는데…….”

    “급한 일은 없으니까요. 좀 더 쉬십시오, 엘.”

    그러나 그 말에도 이엘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벗어났다. 그러곤 기지개를 쭉 켜며 하품을 길게 하더니 의자에 걸쳐 두었던 겉옷을 대충 걸치곤 성큼성큼 걸어가 창문 앞에 섰다. 커튼을 전부 걷어 내니 노아의 말처럼 아직 해가 하늘 위에 떠 있었다.

    “감기 걸립니다.”

    다가온 노아가 이엘의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으며 덮고 있던 모포를 앞으로 끌어와 이엘의 몸까지 덮어 주었다. 제 뒤를 단단하게 지켜 주는 노아가 느껴져, 이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좋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아니. 지금이 좋아서.”

    “…….”

    “그대와 이렇게 함께하면 어떤 꿈도 꾸지 않고 편히 잘 수 있거든.”

    그렇다면 다행이다. 황궁에 있을 땐 어딘가 숨어 있을 눈을 피하기 위해 자주 찾아가지 못했는데. 오히려 이렇게 제도 밖으로 나오니 그녀의 헛헛한 밤을 채워 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호수에 다녀온 사이에 세작은 찾아냈어?”

    “예?”

    “내 추측이 틀렸나? 난 그대와 일라이저가 찾아냈다고 생각했거든.”

    “…….”

    “내게만 비밀로 하려는 것 같아서 입 다물고 있었지만.”

    자신이 돌아왔을 때 침실을 지키고 있던 건 일라이저가 아니라 노아였다.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으니, 자신들이 떠나고 둘만 남겨지자마자 노아의 성격상 침실을 바로 나갔을 텐데. 그 침실을 지키고 있던 게 일라이저가 아니라 노아였다면 둘이 화해를 했거나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알겠어. 그건 그대들에게 맡길게.”

    “숨기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어. 내가 신경 쓰는 일이 늘어날까 봐 걱정돼서겠지. 내가 두 사람을 모르겠어?”

    그래, 두 사람 생각이 맞다. 그쪽은 다른 것들에 비하면 심각한 일도 아니니 두 사람에게 맡기는 편이 낫겠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에겐 휴식이 필요한 것 같았다.

    “폐하껜 정말 아무것도 못 숨기겠습니다.”

    “후후. 그건 두 사람이 표정에서 너무 티가 나니까.”

    몸을 돌려 노아와 마주 본 이엘이 양손을 뻗어 그의 잘생긴 얼굴 위에 얹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이렇게 노아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는 걸 좋아했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노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이엘이 웃으며 그의 얼굴을 제 쪽으로 내려 입술을 여러 번 맞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스완과 로날드는 피시와 함께 제도로 돌아갔어.”

    “피시라고요? 그가 왜 그곳에 있었습니까?”

    이엘은 호수에서 빈센트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노아에게 전해 주었다. 그 역시 믿기지 않는 건지 다소 충격에 휩싸인 듯한 낯이었다.

    “그러고 보니 고니의 저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군요.”

    “나자르의 성력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으니까. 누구도 고니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그럼 스완이 피시 남작을 따라간 건, 그 ‘시모네’라는 자 때문입니까?”

    “응. 원래는 나와 함께 이곳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중간에 마음을 바꿨어. 아마 패티스 백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 듯해. 백작에게 설명하려면, 피시보다는 스완이 더 나을 테니.”

    그 말과 함께 이엘이 슬리퍼를 벗고 노아의 발등을 밟고 올라섰다. 노아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천천히 발을 움직이며 장난에 어울려 주었다. 그러면서 이곳에 축음기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이엘은 노아에게 제 몸을 맡긴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혼잣말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주 옛날엔 인간과 이종족이 가까웠다고 들었는데. 이종족끼리도 먹이사슬을 뛰어넘는 관계가 있을 줄 몰랐어.”

    “…….”

    “지금에 와선……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겠지?”

    “폐하. 그런 것에 크게 마음 쓰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이 정도로 계기를 만들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이상은 개개인의 몫이니까요.”

    “응, 맞아. 내가 괜한 소리를 했어.”

    “폐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노아의 말에도 큰 위로를 얻진 못했다. 이엘은 씁쓸하게 웃으며 노아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음악은커녕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침실 안에서, 노아는 규칙적인 박자에 맞춰 걸음을 움직이며 그녀의 기분을 달래 주었다. 결국 그 위로에 이엘이 작은 미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공작은 나의 어디가 좋아?”

    갑작스런 이엘의 질문에 노아가 당황한 듯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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