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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84화 (284/488)

284화

후회를 곱씹던 하트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이름이 불쑥 떠올라서.

“응. 시모네.”

“…….”

“저와 조이나처럼 함께 세잔티노로 잡혀 와 죽었던 제 친구이자.”

“…….”

“빈센트의 친구요.”

시모네. 아마도 죽은 하이에나의 이름 같은데, 그가 백조인 빈센트와 친구였다고? 이엘은 피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시모네는 죽기 직전에 제게 유언을 남겼어요. 그의 유언이 이르는 대로 저는 세잔티노 지하로 향했고, 마침내 여기에 도착했어요.”

“…….”

“근데 오는 내내 느낌이 이상했어요. 마치 누군가 저를 부르는 것처럼. 누군가 의도해서 이 통로를 만든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도착했을 때, 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빈센트였습니다.”

피시의 말에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이번엔 빈센트를 향해 물었다.

“빈센트. 그대는 우리가 이곳에 올 것도 알고 있었나?”

“예, 폐하.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아. 그래……. 알 것 같다. 나자르는 어느 정도 미래를 볼 수 있으니까. 성력을 닮고 그 축복을 닮았다면, 빈센트가 오드처럼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도 납득은 됐다.

“너희 종족 모두가 성력을 쓸 수 있는가?”

“그건 아닙니다. 현재로서는 저와 제 아들, 스완뿐이겠네요.”

“그 얘기는 직계인 자들만 성력이 가능하단 소리인가?”

“예, 맞습니다. 나자르인과 직접적으로 계약을 맺었던 백조의 직계만 성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저와 스완만이 가능합니다.”

“…….”

“그리고 저는 곧 성력이 약해질 거고요.”

“즉, 그대의 성력은 곧 스완에게로 넘겨진다는 뜻이로군.”

“네, 맞습니다.”

빈센트는 느른하게 웃으며 제 옆에서 연속된 충격에 입만 벌리고 있는 스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는 성력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역할에 불과하지만, 제 아들은 그 성력을 폐하와 함께 올바른 곳에 쓸 수 있을 겁니다.”

“…….”

“그러기 위해서 견문을 넓혀야 했고, 폐하를 만나 계약을 해야 했죠.”

아아. 모든 걸 알고 있었구나. 자신이 고니와 계약하기 위해 이 호수를 찾았을 때, 스완이 유일하게 뭍 근처를 배회하던 게 완벽한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인간과 계약을 맺었다고 했을 때 놀라지 않으셨던 거예요?!”

“넌 아직도 눈치가 그렇게 없니, 아들아.”

“이게 눈치가 있다고 알아챌 문제예요? 아니, 무슨 아빠가 아들 몰래 계략을 다 짜 놓고 일절 언급을 안 해.”

“보다시피 이렇게 막무가내인 놈이지만, 그래도 저처럼 호수에만 묶여 산 게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더 쓸모 있어질 겁니다.”

“그래 봤자 1년 남았어요. 1년 뒤에는 계약이 풀린다구요.”

볼멘소리를 내며 툴툴거리는 스완을 향해 빈센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네 성력은 반드시 폐하께 도움이 될 거야.”

“그럼 아버지는 성력을 잃는 거예요?”

“그래, 맞아.”

“…….”

“네 할아버지에게서 내게로 옮겨 왔듯. 내게서 네게로 옮겨 가겠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나와 내 아버지는 보존하고 전승하는 역할이었다면, 스완. 너는 그 성력을 사용해야 할 때가 올 거야.”

스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제 손바닥을 펼쳐 새어 나오는 하얀 빛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게 성력이라니. 신기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성력을 가진 나자르인들의 말로가 어땠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피시, 라고 했나? 시몬의 친구.”

“응. 그게 내 이름이야.”

빈센트는 땅에 팔을 걸친 채 피시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시몬에게 듣기론 엘피시오, 라는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가명이었나 봐?”

“그건…… 시모네만 불러 주는 애칭 같은 거야.”

“어쨌든 살아생전 널 이렇게 직접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

“나 역시 마찬가지야. 난 시모네를…… 완전히 잊고 살았으니까.”

괴롭다는 이유로, 아프다는 이유로. 자신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외면하고 살아왔나. 피시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온 지난날의 자신이 너무도 한심해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게 오롯이 네 잘못은 아니야.”

“…….”

“나자르들이 걸었던 보호가 네 기억도 지웠던 거니까.”

빈센트의 위로 같지 않은 위로에 피시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물론 빈센트의 말처럼 고니들을 지키기 위한 나자르의 성력 탓도 있겠지만, 자신이 시모네를 가슴에 묻고 지워 버린 것만은 사실이다. 제 슬픔에만 눈이 어두워져서.

“고마워, 빈센트. 그대 덕에 많은 것을 알고 돌아가게 되었어.”

“영광입니다. 모쪼록 제 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폐하.”

“그대들의 종족이 보호석 수거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잘 알아. 그 또한 고맙네. 원하는 게 있으면 스완을 통해 언제라도 연락을 취하도록.”

“그럼 거기 계신 나자르 님께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오드에게?”

이엘은 뒤에 있던 오드를 쳐다봤다. 줄곧 입 한 번 열지 않고 빈센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오드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호숫가 근처로 다가왔다.

“물어보세요, 빈센트.”

“저희의 저주가 풀리는 날이 옵니까?”

“빈센트. 그건 그대도 알지 않나요. 미래에 관한 너무 큰 이야기는 말할 수 없다는 걸.”

결국 우리의 저주가 풀리냐, 풀리지 않느냐가 미래를 크게 흔들 만큼 중요한 사안이 된다는 얘기구나. 빈센트는 한쪽으로 땋아 내린 제 머리를 정리하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풀리지 않는 건 맞구나. 그런 미래가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이엘 일행은 다시 한곳에 모여 앞으로의 일정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빈센트의 곁으로 피시가 다가왔다.

“고마워, 빈센트. 눈을 치료해 줘서.”

“별말씀을.”

빈센트는 피시를 만나자마자 그의 눈에 생긴 상처를 성력으로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물어보지 않아도 빈센트는 아마 다 알고 있었겠지. 나자르로부터 받은 성력 덕에.

“빈센트. 나도 네게 궁금한 게 있어. 시모네는…… 시몬은 자기가 죽을 걸 알고 있었어?”

빈센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피시의 얼굴을 쳐다봤다.

엘피시오. 자신의 친구였던 시모네가 그토록 좋아하던 하이에나. 시모네에게 듣던 것보다 더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강한 느낌이 풍겨 왔다. ……정신력이 강해진 건가. 빈센트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럼…… 시몬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넌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그건 말해 주지 않았던 거야?”

“나 역시 그를 좋아한단다, 시몬의 친구.”

“…….”

“하지만, 아무리 내가 말해서 상황을 바꾸고 싶다고 한들. 그건 신의 손에 달린 문제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시몬이 세잔티노에 끌려오지 않았어도, 그는 죽었을 거란 소리야?”

“그래.”

이게 나자르와 자신이 다른 점이었다. 자신들은 단순히 나자르의 성력을 빌려 쓰는 것에 불과해서 미래를 알게 된다고 한들, 그걸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나자르라면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빈센트는 그 생각을 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랬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조하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좀 억울하긴 하네.”

“뭐가?”

“나는 시몬에게 그의 죽음을 알렸다는 이유로 페널티를 받았는데.”

“…….”

“나자르는 인간을 위해서라면 뭐든 바꿀 수 있잖아. 그게 억울해서.”

대체 인간이 뭐기에……. 빈센트는 중얼거리며 물 안에 잠긴 제 다리를 쳐다봤다. 우논이라 이렇게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음에도, 시모네에게 그의 죽음을 알렸다는 이유로 물속에선 이 다리를 전혀 쓰지 못하게 됐다.

“인간들은 참 부러워.”

“…….”

“대체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신께선 저들만 그토록 사랑하셨던 걸까.”

혼잣말을 하듯 한참 중얼거리던 빈센트의 시선이 이엘에게 닿았다. 뭔가 깊은 고민을 하며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던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뗐다.

“넌 황제가 왜 좋아?”

“……뭐?”

“그렇잖아. 네가 그토록 사랑하던 네 누나를 죽인 게 저 여자의 아비 아니야?”

“…….”

“우리에게서 시모네를 앗아 간 것도 저 여자의 아비야.”

“그녀는 피해자야.”

“…….”

“조이와 시몬을 죽인 건 폐하가 아니라 선황이었어.”

호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빈센트가 제법이라는 표정으로 피시를 바라봤다. 전혀 약하지 않잖아. 오히려 너만큼 강한데, 시몬.

“빈센트. 너도 그만 과거에서 나와.”

“…….”

“우린 영원을 살게 될 우논이야. 자꾸만 과거에 집착하면 이 삶이 너무 버겁게 돼.”

“저런. 나는 아니야.”

“뭐?”

피시가 놀란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빈센트는 손으로 물장난을 치며 여유를 부렸다. 다른 이들은 모두 이엘의 곁에 있던 터라 그의 말을 들은 건 피시뿐이었다. 빈센트는 손바닥을 쥐었다가 펴더니 방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

“그냥 난 과거에 집착하며 살고 싶다는 소리였어.”

“너…….”

“그만 돌아가. 너희가 여기 계속 머물면 우리도 곤란하니까.”

등 떠밀리듯 호숫가에서 멀어진 피시는 자꾸만 밀려드는 걱정에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빈센트는 이미 안개 속에 파묻혀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버지? 아버지!”

“돌아간 모양이네.”

“폐하께 무례해!”

여태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던 로날드가 툴툴거리듯 한마디 했다. 하트 역시 그 말에 동의하는 건지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호수가 있는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됐어. 어차피 용건은 끝났으니까 더는 고니들을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자. 그나저나 스완. 넌 어떻게 할래? 같이 갈 거야, 아니면 여기 더 머물다가 올래?”

“폐하랑 갈래요. 아버지가 저렇게 사라진 걸 보면 그냥 가라는 뜻 같아요.”

“그래. 그럼 돌아가자. 그리고 피시. 넌 어떻게 할래?”

“전 제도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패티스를 만나고 영지에 가야 해서요.”

“그래? 아쉽게 됐네. 그럼 또 보자.”

“폐하!”

“응?”

피시는 오드와 함께 사라지려는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그러곤 주저하듯 손을 움찔거렸다.

“피시. 무엇이든 내게 말해도 좋아. 난 네 편이야.”

그 움찔거리던 손을 대신 잡아 주며, 이엘이 다정하게 그를 달랬다. 피시는 제 손을 잡은 그녀의 손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이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폐하께 도움이 되었나요?”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구나.”

“…….”

“넌 존재만으로 큰 도움이야, 피시. 네가 날 몇 번이나 구원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그가 세상을 향해 자신 있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엘도 같은 마음으로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 피시의 모든 순간을 응원한다.

“곧 만나자. 경의 영지에서 기다리고 있으렴.”

“네, 폐하.”

이엘은 웃으며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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