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오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희뿌연 안개 속 검은 인영 몇이 아른거렸다. 스완인가? 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앞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예상치 못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피시?!”
“폐하.”
피시가 여긴 어떻게……. 제도를 패티스에게 맡겼으니, 지금쯤 피시는 하이에나의 영지를 패티스 대신 지키고 있어야 할 텐데. 아니. 무엇보다 그가 어떻게 이곳을 발견한 건지가 더 의문이었다. 이 호숫가의 위치를 아는 자가 많지 않으니까.
“피시. 혹시 길을 잃었어?!”
어떤 일로 이 숲을 찾았다가 길을 잃고 우연히 이곳에 도착한 건가? 이엘은 그 물음과 함께 피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따라오던 하트 역시 피시가 이곳에 있다는 것에 당황한 건지 미간을 찌푸리며 달렸다.
“피시.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제가 찾아왔어요.”
그녀의 질문에 피시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찾아왔다니? 이엘은 뜬금없이 고니의 호수에서 피시를 마주한 게 놀라워 당황하듯 다급히 말을 붙였다.
“네가 고니의 호수엔 왜…….”
“빈센트가 저를 불렀어요, 폐하.”
빈센트라고? 낯선 이름에 의문을 갖고 물어보려는데, 별안간 옆에 있던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폐하!”
“폐하. 왔어요?”
“아, 로니. 스완. 기다리고 있었구나.”
자신을 부른 건 다름 아닌 스완과 로날드였다. 두 사람이 무사히 도착했음에 안도하며 시선을 그들 옆으로 돌렸다.
호수 안엔 상반신까지 잠긴 채 자신을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빈센트라고 합니다.”
그의 얼굴이 스완과 무척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스완의 아비인 모양이군.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빈센트를 향해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제 아들이 황실에 폐를 끼치고 있지는 않는지 걱정입니다.”
“아버지!”
“그러다 제 아들의 목숨이 슥삭! 처리될까 봐 아비로서 두렵군요.”
“…….”
“원래 황실은 그런 곳이 아닙니까? 황위에 위협이 되는 놈이라면 아무도 몰래 처리하는 곳.”
“그쯤 해라.”
빈센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트의 날카로운 검이 그의 목을 겨누었다. 그러나 빈센트는 날붙이 따위 두렵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이번엔 오드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고귀하신 나자르 님이시여.”
“…….”
“드디어 이곳에 오시었군요.”
“아버지. 진짜 왜 이래? 그만해요. 폐하랑 오드 님께 왜 시비를 걸어!”
당황한 스완이 재빨리 호수에 뛰어들어 제 아비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빈센트는 입이 막힌 채로 낄낄거리며 스완에게 물을 뿌리는 등의 장난을 쳤다. 우논은 원래 적정 시기까지 성장하고 그 뒤로는 겉모습이 늙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있으니 오히려 빈센트가 스완보다 어려 보였다.
그 기이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엘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대의 종족도 짐의 제국에 살고 있는데, 굉장히 무례한 언사를 하는군.”
“…….”
“짐과 나자르인을 욕보이면 황실과 신성모욕죄에 모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대가 아무리 스완의 아비라 해도 자비는 없어.”
빈센트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이엘은 진심이었다. 특히 나자르인 오드는 신성제국의 핵심이 되는 유일한 존재이므로, 그를 모욕하는 건 곧 신과 제국 전체에 대한 모욕과도 같았다.
그리고 이엘은 이런 것에 웃으며 넘어가 줄 만큼 무르지 않았다.
“스완이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는데. 폐하께선 제가 나자르를 싫어하는 이유를 아시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게 신성모독죄의 면죄가 되지는 않아.”
“…….”
“또한 나자르는 그대들을 숨겨 준 생명의 은인 아닌가?”
“저주를 내린 장본인이기도 하구요.”
“그건 그대들의 잘못 탓이 아닌가?”
“…….”
“그대들이 인간을 죽였기 때문에.”
물론 단순히 인간을 죽였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겠지만. 이쪽은 갖고 있는 정보의 양이 현저히 적다. 그러니 알고 있는 것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끌어내야지. 이엘은 침묵하는 오드를 한 번 쳐다봤다가 웃으며 빈센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는 스완을 통해 짐과 나자르가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무리가 있는 곳으로 도망치지 않았군.”
“…….”
“그 얘기는 그대도 짐에게 할 말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
“과연 신께서 선택하신 분이군요.”
빈센트는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스완의 얼굴에 장난치듯 물을 뿌리고는 뭍 근처로 헤엄쳐 다가왔다.
“여기 있는 자들은 전부 폐하께서 믿을 수 있는 자들입니까?”
“맞아, 전부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이다.”
“좋습니다. 폐하께서 궁금한 것들을 제게 물어보십시오. 말씀드리겠습니다.”
“……너희 고니들의 저주에 관해 알고 싶은 게 있어.”
“말씀하세요.”
“정말 인간들을 죽였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건가?”
그녀의 질문에 스완도 제 아비를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이긴 했다. 이종족은 인간을 죽여선 안 된다. 인간은 신의 축복을 받은 귀한 종족이므로, 신께서 그들을 죽인 자들은 그냥 두고 보시지 않는다고.
하지만 막상 뭍으로 나오고 보니 그 이야기가 전부 들어맞는 건 아닌 듯했다. 애초에 인간들이 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맞는지도 의심이 갔다. 오히려 인간의 추잡한 모습을 더 많이 보기도 했으니까.
그들은 마치…… 신에게 버려진 종족 같았다.
“맞습니다.”
“…….”
“인간을 죽였기 때문에 신께서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럼…….”
“성력으로 죽였기 때문에.”
“뭐? 성력이라니……?”
성력? 이엘이 고개를 돌려 오드를 쳐다봤지만, 그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자신은 말하지 않을 것이니, 빈센트에게 들으란 뜻이었다.
“나자르가 인간들을 죽였다는 뜻이야?”
“아니요. 제 선조께서요.”
“…….”
“스완에게 들으셨겠지만, 저희의 선조 중 두 사람이 나자르인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계약은 스완이 폐하와 맺은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이지요.”
“…….”
“두 사람은 나자르의 성력을 빌려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인간들을 성력으로 죽였다는 말이 되는군.”
“맞습니다.”
그랬군. 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고니가 인간들을 죽이는 게 가능하지. 그리고…… 왜 저주를 받게 됐는지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성력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에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니까. 나자르가 황명으로 보호석을 만들었을 때 수명과 성력을 뺏긴 것처럼 어떤 식으로든 그 죄를 갚게 된다.
“근데 왜 제겐 말씀하지 않았어요, 아버지?”
스완이 얼굴을 와락 구긴 채 따지듯이 빈센트를 돌려세웠다.
“왜 다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제야 알려 주시는 거냐구요.”
“그건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때라니……. 무슨 때를 말하는 건데요.”
“스완. 최근에 네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난 적 없어?”
“변화라니, 그게 무슨……. 설마…… 이거요?!”
스완이 빈센트 앞에 제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스완의 손바닥에서 새하얀 빛이 퍼져 나왔다.
“아, 아버지도 이 빛을 알아요? 어떻게?!”
“그게 성력이야.”
“……네?”
“폐하. 저와 스완은, 그때 나자르와 계약을 했던 백조의 후손입니다.”
“…….”
“그때 흑조는 인간들에 맞서 싸우다 죽었고, 백조였던 제 선조는 남은 고니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대피했습니다.”
아아…….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왜 스완의 능력에서 암컷 용을 만났는지…….
‘다음에 또 봐요, 나타니엘. 날 만나고 싶다면 이런 식으로 백조의 힘을 빌리면 돼요.’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신의 대리자라도 된 것처럼 소개했고, 이엘에게 여러 가지 말을 전하고 떠났다. 그래, 스완이 성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 안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도 스완도, 모두 성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니까.
‘나타니엘. 그에게서 비슷한 누군가가 느껴지지 않나요?’
여자의 말이 떠올랐다. 스완에게서 비슷한 누군가가 느껴지지 않냐는 그 말에, 이엘은 고개를 돌려 오드를 쳐다봤다. 역시…… 오드가 맞았어. 오드를 닮았냐고 물어봤던 거였어. 그래, 이제야 퍼즐 조각이 하나하나 맞춰져 가는 것 같다.
“제가 그 백조의 후손이었다고요?!”
반면 스완은 전혀 몰랐던 사실인 건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빈센트의 어깨를 잡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저 반응을 보니 스완이 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건 최근인 듯했다.
“왜 저한테 말 안 했어요, 아버지!”
“때가 아니었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때냐고요!”
“네가 성력을 발현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때.”
“…….”
“그리고 하이에나 도련님께서 이곳으로 오게 되는 때.”
빈센트의 시선을 따라 스완과 이엘의 눈동자가 피시를 향했다. 그건 마치 피시가 이곳을 올 거라고 예상한 듯한 말투였다.
“피시. 넌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이엘의 물음에 피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잔티노 지하에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더니 이곳에 도착했어요.”
“뭐?! 세잔티노 지하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피시. 거짓말하지 마라. 지하는 막혀 있어.”
그때까지 뒤에서 잠자코 듣기만 하던 하트가 나서며 고개를 저었다. 세잔티노를 관리하는 건 제 몫이었다. 비록 이엘이 즉위한 뒤엔 근위대장으로 일하느라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그곳의 지하는 꾸준히 확인하고 있었으며 그때마다 그곳은 확실히 막혀 있었다. 심지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성벽까지 전부 허물어서 막지 않았던가.
“하이에나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
“…….”
“그는 지하를 통해 이곳에 왔습니다. 애초에 이곳은 위치만 안다고 해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예전에 인간들이 바다로부터 밀려온 보호석을 수거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때랑은 다르다. 그들은 고니를 만나기 위해 온 게 아니라, 보호석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이곳에 고니가 있는 줄도 몰랐을 테고.
그러니까 고니를 만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는 이 호수를 찾아낼 수 없다는 소리였다. 오드처럼 길을 알고 있거나, 스완처럼 고니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그 통로는 나자르 님들이 만드신 통로니까요. 맞죠?”
빈센트가 웃으며 오드를 쳐다봤지만, 오드는 그에 대한 설명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깐만. 그 통로를 나자르가 만들었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오드?”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폐하. 지금은 피시 경의 말을 듣는 게 더 급하니까요.”
“……알겠어. 피시. 계속 얘기해 봐.”
“저는…… 패티스의 명령으로 세잔티노에 갔어요, 폐하. 오드 님이 그곳에 뭔가가 있다고 하셨다면서.”
“…….”
“그리고 세잔티노 지하에 내려갔을 때. 억지로 묻어 뒀던 기억들이 거짓말처럼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조이나와 함께 잡혀 왔던 그날의 끔찍한 기억들이.”
피시의 말에 하트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대고 얼굴을 가렸다. 피시에겐 잊지 못할 트라우마가 있는 곳이라, 그가 절대로 출입하지 못하게 금지시키던 곳이었는데.
내가 제도에 있었더라면 피시를 세잔티노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트는 처음으로 자신이 근위대장 일로 자리를 비웠음을 후회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떠올랐어요.”
“피시, 너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