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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82화 (282/488)
  • 282화

    *

    “다녀올게. 그동안 들키지 않도록 잘 부탁해.”

    “예, 폐하. 폐하께서도 부디 조심하십시오.”

    “오드가 있으니 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엘은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채 침실에 모인 두 사람을 쳐다봤다. 노아와 일라이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서로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일라이저의 아비였던 루시우스 러셀과 노아가 한때는 막역한 사이였다는 걸. 일라이저가 러셀이란 성을 되찾고, 아비의 작위를 복권해 승계하고 난 뒤에야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두 사람에게 직접 들은 게 아니라 늑대들이 떠드는 소리를 통해.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노아와 루시우스의 끝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었다는 늑대들의 말을 미루어 볼 때, 지금 두 사람이 저렇게 서로에게 달려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쪼록 영지를 잘 지키고, 건강히 지내고 있도록 해. 두 사람 모두.”

    “저희는 걱정 마십시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폐하.”

    “금방 올 거야. 근데 이야기가 길어지거나 사정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혹 며칠이 걸리더라도 기다려 줘. 무슨 일이 생기면 오드가 소식을 전하러 오겠지만, 알다시피 그건 성력을 많이 소모하기 때문에 급한 일이 아니면 오드를 보내지 않을 테니까. 늦더라도 날 믿고 기다려. 알겠나?”

    이엘의 말에 두 사람은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신신당부하는 이유는 혹 자신의 부재 기간 중에 노아와 일라이저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둘 다 이성적인 건 알고 있지만, 때론 감정이 이성을 넘어서기도 하기에.

    이윽고 준비를 마친 이엘과 하트, 그리고 오드는 새하얀 빛과 함께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사라졌다.

    “…….”

    “…….”

    조금의 침묵도 견디기 싫었던 건지, 아니면 일라이저와 한 공간에 남겨진다는 게 끔찍했던 건지, 노아는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성큼성큼 문까지 걸어가 손잡이를 잡고 단숨에 문을 열었다.

    “공작님.”

    뒤에서 일라이저가 저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대로 나갔을 터였다. 노아는 문고리를 잡은 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편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제 친구를 닮아 가는 일라이저가.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노아는 일라이저가 몹시 불편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잠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 뻔뻔하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배신자의 아들 주제에.

    그러나 노아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손잡이를 잡고 일라이저를 등진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일라이저는 듣지 못한다. 돌아서 눈을 마주하고 좋든 싫든 대꾸를 해야 함에도 일라이저의 얼굴을 보는 게 고역이라서. 노아는 그 상태로 한참을 멈춰 있었다.

    “공작님.”

    “너는.”

    감정을 꾹 누르며 뒤로 돌아선 노아가 일라이저와 마주했다.

    “네 아비가 한 짓을 알고 있다면, 감히 내게 말 붙일 생각도 못 할 텐데.”

    “…….”

    “아니면 알면서도 폐하의 수족이 되었다는 명목하에 뻔뻔하게 낯짝을 들고 있는 건가.”

    “그렇게 분노하셔도, 제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

    “저는 그분이 누구 손에 돌아가셨는지도 모릅니다.”

    르네의 손에 죽었다는 건…… 여전히 모르는 모양이군.

    그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저놈 역시 전쟁이 만든 피해자일 뿐이다.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노아는 일라이저를 마주 볼 수 있게 됐다.

    아……. 노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작아진 그 시절의 루시우스가 제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눈부신 금발, 종족에 관계없이 오가는 자들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꼿꼿하고 당당하게 선 자세까지.

    다만 눈동자 색은 선대 후작 부인을 닮은 건지 벽안이 아닌 부드러운 다갈색이었다. 그리고 루시우스와 다른 유의 서늘함이 일라이저의 얼굴 위에 그려져 있었다. 노아는 짧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하듯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뒤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서 후작이 하고 싶은 말이 뭐요.”

    “폐하껜 심증만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세작으로 의심되는 이를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뭐? 그게 누구지?”

    “제 저택에 그림을 주었던 화공입니다.”

    “그림이라면……?”

    “들어오실 때 보셨던 제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고모님의 초상화를 가지고 왔던 화공입니다.”

    설마 그 거대한 초상화를 이르는 말인가? 그걸 가져온 놈이 우연히 소유하고 있던 자가 아니라…… 화공이었다고? 그림을 그린 장본인이 이곳에 있다니, 그게 무슨…….

    “그 그림은 이전에 그려진 그림이 아닙니다.”

    “그 얘기는 최근에 그렸다는 소리인가?”

    “예, 맞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그렸다는 것이오?”

    세 사람의 얼굴은 노아가 기억하는 그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누구보다 이곳을 자주 왕래한 자신이 보증할 수 있다.

    “황족과 일부 귀족들을 전담으로 그리는 화공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황제로부터 작위를 받았을 정도로 실력이 우수한 자였습니다.”

    “…….”

    “제 가문도 그 사람이 초상화를 맡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걸 기억하오?”

    “예. 그 시기가 제겐 잊지 못할 시기였으니까요.”

    이엘이 선황과 함께 영지를 들렀을 때, 황궁에서 일하던 그 화공이 황제의 초대를 받아 이곳에 방문했었다. 작위를 갖게 된 뒤로 화공은 아무 그림이나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꽤 높은 작위를 가진 귀족들만이 그 화공의 그림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당시 선황은 화공을 일라이저의 영지로 불러들여 그의 가족을 그리게 했고, 그 그림을 러셀가에 선물로 하사했다.

    “선황이 영지 시찰로 이곳에 왔을 때, 제 아버님의 공을 치하하겠다며 불러들였던 자였습니다.”

    아주 짧았던 기간이지만, 자신의 풋사랑이 자리 잡았던 시기다. 일라이저는 머리가 뛰어난 편이었으니 그녀와 관련한 사소한 기억을 놓칠 리 없다.

    일라이저는 몇 년 전 그자가 이곳에 찾아왔던 날, 단번에 그를 알아봤다.

    “저를 어리숙하게 본 건지, 아니면 아주 어릴 때라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 아무튼 그자는 부모님과 고모님을 그린 초상화를 제게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 영지에 살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를 의심한 건 아니었다. 좋든 싫든 그는 제 기억 속에서 좋은 인상을 가진 인간이었으므로 일라이저는 화공에게 자신의 영지에서 살 만한 거처를 제공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똑똑한 조카에게 영지의 일을 일부 맡기기도 했다. 아마 그의 조카가 자금을 밖으로 빼돌렸겠지.

    “그럼 그 그림은 새로 그려서 가져왔다는 것이오?”

    “예. 애초에 저런 그림은 아버님의 저택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맞아. 나도 본 적이 없는 그림이었소.”

    “실제로 제 아버님과 어머님을 그린 적이 있으니, 그 기억을 살려 그린 듯합니다. 다만 제 고모님은 그린 적이 없을 텐데, 어떻게 고모님의 얼굴까지 그렸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상상으로 그렸던 것일지도…….”

    “아니. 상상이 아니라, 정확히 후작의 고모의 얼굴이오.”

    “…….”

    “그 그림 속 여자는 후작의 고모인 이벨리아 러셀이 맞소. 내가 그녀의 얼굴을 알아.”

    역시 맞군. 일라이저는 그 부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아에게 먼저 이 사실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는 제 아버지의 친구였다고 하니 이 저택에 드나든 적이 있을 것이고, 자신의 고모와도 한두 번쯤은 마주쳤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후작은 고모였던 사람의 얼굴을 모르오?”

    “예. 저는 모릅니다.”

    노아가 기억하기론 이벨리아의 모습을 그린 커다란 초상화가 후작저에 걸려 있었던 것 같은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그림이 저택에서 치워진 모양이었다. 하긴. 그것도 루시우스와 절연하기 전에 봤던 거니, 일라이저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군. 그럼 그 그림도 세작이라는 화공 놈이 그렸던 걸까?

    “이벨리아, 그러니까 후작의 고모 되는 여자는 본래 선황의 황태자비로 내정되어 있던 여자였소.”

    “예?”

    “몰랐나 보군.”

    하긴. 이런 건 제국서에 적혀 있지 않으니까. 추잡한 과거라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이벨리아를 사랑하기라도 했던 건지. 선황은 죽은 이벨리아와 관련한 모든 것을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아마…… 선황이 황태자였던 시절에, 그 화공을 보내 이벨리아 러셀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던 것일지도 몰라.”

    “…….”

    “그래서 놈이 이벨리아의 얼굴도 알고 있었겠지. 그걸로 의심을 불식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고.”

    제법 머리를 굴렸군. 하지만 그렇게 접근해서 얻는 게 무엇이지? 왜 굳이 세작이 되어 정보를 팔아넘겼나.

    “그자는 뛰어난 실력으로 작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기록은 황실도서관에 남아 있고요.”

    “찾아보았군?”

    “예. 윌터 가문과 혼인을 한 모양인지, 그 가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확실한가?”

    “폐하께도 여쭤보았습니다. 윌터 가문은 어린 시절의 폐하께서도 관심 있게 보았던 가문이라며, 사정을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윌터 가문에 관심이 있으셨다고?”

    “예.”

    왜지? 그 가문은 볼 것 없는 단순한 백작가가 아니었나? 대체 이엘이 왜 그 가문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아무튼 뿌리가 윌터 가문에 속해 있으니, 제겐 그자가 세작이라는 게 확증된 셈입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그자를 역으로 이용할 생각입니다.”

    “폐하께도 말할 건가?”

    “아니요. 단독으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왜?”

    “저는…… 더 이상 폐하께서 위험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고작 제 영지의 세작입니다. 하는 거라곤 자금을 빼돌려 모리아와 올리세스 윌터에게 넘겨주는 것뿐인 별것 아닌 자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아시면, 앞으로 놈을 어떻게 이용할지 골머리를 앓으실 텐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는 자니까요.”

    “그 얘기는 나만 알고 있어 달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공작님이 지켜보시다가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시면 말씀드리셔도 됩니다.”

    “어떻게 이용할 건지 방법은 모색해 봤나?”

    “예.”

    분명 눈동자 색이 다른데, 노아는 일라이저의 눈동자가 그 순간만큼은 루시우스와 똑같게 느껴졌다.

    *

    “여기서부터는 직접 걸어서 이동하셔야 합니다.”

    “고마워, 오드.”

    몇 년 만에 온 곳이었지만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다. 아니. 그때보다 더 심한 것 같은데. 이엘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앞서 걷는 오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폐하. 저쪽에 호수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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