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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81화 (281/488)

281화

이엘이 슈프가 엎드린 곳을 바라보듯 옆으로 누워, 늑대의 코를 손으로 톡톡 건드리곤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왜?”

“내가 황제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황제가 없던 시절에도 우린 잘 살았잖아.”

“그렇지만 저 사람들은 아니었잖아.”

그녀가 검지로 마을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그 행동에 슈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박했다.

“저 인간들이랑 오헬이 무슨 상관이야? 오헬은, 오헬만의 행복을 찾으면 되잖아.”

“슈프. 네가 로날드를 아끼고, 리퍼를 아끼고. 또 모든 늑대를 아끼듯, 나 역시 저들을 아껴.”

“같은 종족이니까? 인간이라서?”

“응.”

“그건…… 그건 불공평해! 오헬은 늑대와 더 어울려. 예전처럼 우리랑 같이 살아. 노아 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안전하게 살면 되잖아. 응?”

“있잖아, 슈프. 안전이란 단어를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해.”

슈프가 그토록 바라던 그 시절 역시, 2차 전쟁이 있었기에 이종족이 인간을 제압하고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슈프. 내 귀여운 새끼 늑대. 나는 인간이지만 늑대이기도 해.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인간들만이 아니야. 너도 포함이야, 슈프. 이렇게 무겁고 힘든 일인 걸 알면서도 굳이 내가 하겠다고 자처한 건, 다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이엘의 말에 슈프의 속상하고 서운했던 마음들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하얀 늑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혀로 핥으며 애정을 표현했다.

“간지러워, 슈프.”

“나도 오헬이 너무 좋아!”

“알아.”

밤바람이 솔솔 불어와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냈다. 이엘은 그대로 눈을 감고 귀로 스며드는 음악 소리에 집중했다. 슈프는 그녀가 춥지 않도록 제 커다란 꼬리로 이엘의 몸을 덮어 주었다.

“있잖아, 오헬.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뭔데?”

“밀로는 언제 와?”

“……밀로가 보고 싶니?”

“응.”

밀로가 용이라는 사실은 일부만 알고 있다. 새끼 테르였던 슈프와 아이들은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곧 올 거야. 기다리자.”

“매일 투닥거리는 줄 알았는데. 밀로가 너희에게 인기가 많았구나?”

“응, 뭐…… 그렇게 힘이 센 인간은 처음 봤으니까. 같이 뒹굴면서 치고받고 싸워도 밀로는 다치지 않거든. 원래 인간들은 약하다며. 전에 앤디 님이 다른 인간을 봤을 땐 밀로한테 하듯이 달려들면 안 된다고 그랬어.”

슈프의 그 말에 이엘은 웃음이 터졌다. 어떤 이종족이 인간이 다칠까, 험하게 달려들면 안 된다고 경고를 한단 말인가. ……아, 나는 이래서 늑대가 좋은가 봐. 정말로.

“누가 오고 있어.”

그렇게 한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별안간 슈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코를 킁킁거리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딱히 경계하지는 않는 걸로 보아 아는 사람인 듯해서, 이엘은 몸을 옆으로 굴려 엎드린 자세로 슈프가 보는 쪽을 같이 쳐다봤다.

“약속하셨던 세 시간이 지나 모시러 왔습니다.”

“근위대장이 올 줄 알았는데.”

이엘이 노아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이 어떤 고민도 담겨 있지 않은 날것의 미소라, 노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이엘을 바라보았다.

“하트 경이 그대를 보낸 것인가? 아니면 그대가 날 찾아온 것인가?”

“제가 폐하를 찾아왔습니다.”

“그럼 그대도 여기 누워. 바람이 시원해서 좋아.”

흙바닥을 뒹군 탓에 얼굴엔 풀과 흙이 묻어 엉망이었는데도, 그녀는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노아는 홀린 듯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멍하니 그 미소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가 바닥에 앉자마자 반대편에 서 있었던 슈프는 후다닥 옆으로 자리를 피해 버렸다.

“슈프? 왜 그래?”

이엘이 고개를 돌려 슈프를 쳐다봤지만, 늑대는 멀찍이 서서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무래도 노아가 어려운 모양이다. 하긴. 한때는 무리의 왕이었던 존재이고, 지금도 무리를 이끄는 최고 수장일 테니 어린 테르인 슈프에겐 얼마나 높은 존재이겠는가. 그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

“이리 와, 슈프. 내 옆으로 오렴.”

“아, 아닙니다!”

어찌나 긴장했으면 말까지 더듬으며 얼음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공작. 어찌나 그대가 겁을 주었으면 황제인 짐과 있을 땐 편히 있던 아이가, 공작이 오자마자 저렇게 굳어 있나? 응? 어디 말 좀 해 봐.”

이엘이 손을 뻗어, 아까 슈프에게 했던 것처럼 노아의 코끝을 톡톡 건드렸다. 그 말에 노아는 미간을 좁히더니 그녀의 손가락을 제 입술로 가져가 아프지 않게 살짝 깨물었다. 심통이 났다는 그만의 신호였다.

“겁을 준 적 없습니다.”

“그럼 슈프가 왜 저러는 건데?”

“그건…….”

“농담이야. 그대가 당황하기도 하는구나.”

이엘은 양손으로 노아의 뺨을 잡고는 그대로 제게 끌어 내려 그 입술 위에 짧은 입맞춤을 여러 번 했다. 그러고는 붉어진 노아의 귓불을 장난스레 손으로 꾹 눌렀다가 떼어 내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슈프. 이리 와, 어서.”

“하지만…….”

“내가 명령을 해야 올 거야?”

“죄, 죄송합니다!”

정말 안쓰럽기 짝이 없다. 물론 이엘도 노아가 새끼들을 절대로 엄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저렇게 긴장한 모습이 퍽 안쓰럽고 또 귀여워서.

어쨌든 슈프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걸어와 그녀의 앞에 섰다. 여기까지 오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하얀 늑대는 네발을 땅에 꼿꼿하게 붙이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나 이엘은 그런 슈프의 털을 잡아당겨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악!”

늑대답지 않은 가냘픈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진 슈프를, 이엘이 양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물론 늑대의 덩치가 큰 터라 다 안을 수는 없었지만.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거야, 슈프. 나 서운해.”

“그치만 폐, 폐하와 고, 공작님이 계시는데…….”

“그게 뭐 어때. 너도 조금 전에 그렇게 말했잖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

“아니야?”

“……마, 맞아요.”

하지만 그때 그 시절은 자신이 멋모르던 새끼 때다. 그때야 어린 새끼이니 버릇없이 굴어도 노아나 다른 우논들이 넘어가 주었겠지만 지금은 성체가 되었기 때문에 그때랑 똑같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 마음을 읽은 건지, 여태 침묵하고 있던 노아가 일어나 슈프에게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그러곤 손을 뻗어 다정하게 슈프를 쓰다듬어 주었다.

“슈프. 네가 자랐어도 넌 내겐 아이다.”

“가, 각하…….”

“내 자식과 다름없어. 그러니 날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그의 다정한 말에 슈프는 기분 좋은 하울링을 뱉었다. 이엘은 크게 웃으며 끌어안고 있던 슈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고, 노아는 여전히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슈프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정말 그의 어미와 아비라도 된 기분이다. 이엘이 노아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내게도 슈프는 자식 같은데, 공작도 그러한가?”

“예.”

“음, 그럼 내가 슈프의 어미가 되고 공작은 슈프의 아비가 되겠구나.”

“네?! 그, 그렇게 말씀하시면……!”

당황한 슈프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허둥거렸지만, 꼬리가 빠르게 흔들리는 걸로 보아 기분은 무척 좋은 듯했다. 덩치만 커다란 새끼 늑대의 당황한 모습에, 이엘과 노아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여기야?”

“응, 맞아.”

“안개밖에 안 보이는데.”

꼬박 하루가 걸려 도착한 곳은 안개가 자욱한 풀숲 어딘가였다. 로날드는 일단 스완을 바닥에 내려 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길을 전혀 모르니 백조가 시키는 대로 달려오기는 했는데……. 러셀 후작령에서 조금 떨어졌다고 얘기만 들었지, 이렇게 깊은 곳에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거기 아니야. 잘 따라와, 놓치면 길 잃어.”

스완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로날드를 지나쳐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안개가 더 자욱하다. 자신들이 사는 호수는 외부인의 침입을 막을 수 있게 언제나 이렇게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지만, 오늘따라 그 정도가 심했다.

“잠깐만! 천천히 가! 같이 가!”

뒤에서 로날드가 열심히 그를 불렀지만, 스완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야! 스완!!”

“쉿. 조용히 해.”

“좀 같이 가자!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여.”

“알겠으니까 조용히 좀 해. 네 목소리에 다들 놀란다고.”

숲에 있는 나무들이 이미 자신이 이곳에 도착했음을 무리에게 알렸을 텐데도, 호수가 있는 쪽에선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 확실히 평소랑은 다르다.

“로날드.”

“왜?”

“혹시 무슨 냄새 안 나?”

“냄새?”

“어. 넌 후각이 좋잖아. 혹시 인간이나 다른 이종족 냄새는 안 나냐고.”

“글쎄. 안개 때문에 코앞에 있는 네 냄새도 잘 못 맡겠어.”

그런가. 역시 안개가 짙어진 건 뭔가를 가리기 위해서였나. 스완은 로날드와 함께 계속해서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살던 호수에 도착했을 때 스완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정말 왔네.”

회백발의 남자가 호숫가에 걸터앉은 채 자신과 로날드를 쳐다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스완의 걸음을 멈춘 건 그 남자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옆,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커다란 백조 때문에.

“아버지.”

“어서 와, 스완.”

“어떻게 여기 나와 계세요?”

절대 뭍 근처로 오지 않던 아버지가 왜 이곳까지……. 그러나 아버지, 빈센트는 웃기만 할 뿐, 제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다. 마음이 성급해진 스완이 재차 질문을 던지려는데, 호숫가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정말 네가 빈센트의 아들이었구나.”

하이에나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걸까. 이 호수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을 텐데……. 스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피시를 향해 소리쳤다.

“당신이 내 아버지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아니라 내 친구가.”

자리에서 일어선 피시는 서글픈 표정으로 스완과 빈센트를 번갈아 쳐다봤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빈센트. 이제 말해 줘.”

“…….”

“어떻게 네 말대로 네 아들이 이곳에 온 건지.”

……내가 올 걸 아버지가 알고 있었다고? 이번엔 스완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제 아버지를 쳐다봤다. 새하얀 백조는 두 사람의 시선을 받아 내다가, 곧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물에 잠겨 상체만 떠오른 남자는, 분홍빛 긴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린 채 세 사람을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아직 아니야.”

“…….”

“중요한 한 사람이 오지 않았잖아.”

“아버지. 설마……!”

빈센트의 대답에 놀란 건 스완과 로날드였다. 설마 아버지가 말하는 사람이…… 폐하는 아니겠지? 이엘이 일라이저의 영지에서 몰래 이곳으로 오게 되는 건 그녀와 자신들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는데.

“뭐? 또 누가 더 온단 말이야?”

“그래. 당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

여유롭게 손으로 물장구를 치던 빈센트가 피시를 보며 웃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피시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가 뭔가를 떠올린 건지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설마 폐하가 오셔?”

피시와 스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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