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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80화 (280/488)

280화

이엘이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창밖에 붉은색 노을이 짙게 깔린 뒤였다. 어떤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던 것 같다.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일어선 이엘은 발코니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와, 예쁘다…….”

저 멀리, 마을이 있는 곳이 환하게 빛났다. 희미한 음악 소리도 들려왔다. 이엘은 창틀에 팔을 올려 몸을 기대며 넋 나간 듯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고 했었지. 아마도 축제는 밤늦게까지 이어질 모양인 듯했다. 이렇게 지켜만 보는 게 아쉬울 정도로, 멀리 있는 자신에게까지 흥겨움이 전해지고 있었다.

사람 사는 냄새. 사람 사는 소리. 사람 사는 풍경.

좋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처럼 좋았다. 평화라는 단어가 안겨 주는 포근함에,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현실이 좋았다. 자신의 희생으로 저들이 조금만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폐하!”

그때 아래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우거져 있던 수풀에서 뭔가가 쏙 튀어나왔다. 새하얀 털을 가진 슈프가 자신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반갑게 인사하고 있었다.

“슈프? 무슨 일이야?”

“폐하! 저랑 같이 나가요!”

“나가다니? ……설마 마을에 가자는 소리야?”

“네!”

“안 돼. 마을 사람들이 반기지 않을 거야.”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어쨌든 그들에게 자신은 황제이며, 불편한 기억의 주인공일 텐데 굳이 좋은 날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먼발치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하지만 구경 가고 싶으시잖아요. 변장하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요? 어차피 시끄러워서 다들 모를 것 같은데.”

“나는 변장으로 신분을 속일 수 있다고 해도, 슈프 넌 테르라서 변장할 수도 없잖니.”

“아, 맞다…….”

테르인 자신은 우논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슈프가 꼬리를 내려뜨린 채 풀이 죽은 모습을 보였다. 발코니 위에서 하얀 늑대의 실망한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이엘은 결국 혀를 차며 기대고 있던 창틀에서 떨어졌다.

“좋아. 그러면 가까이 가지는 말고 먼 곳에서 보자.”

“좋아요! 폐하랑 함께하면 무엇이든 좋아요, 저는!”

새끼 늑대들 중 주드, 로날드, 슈프, 리퍼가 유독 친했던 것 같은데 그중 하나를 잃은 뒤로 세 아이들은 사이가 더 돈독해졌다. 언뜻 듣기론 어떤 임무에 나가도 셋이 쌍둥이처럼 함께 다녔다던데.

그런데 리퍼는 영지에 남았고 로날드는 도중에 스완과 함께 떠났으니, 홀로 남겨진 슈프가 외로울 만도 했다. 우논들이 테르를 끼워 줄 리도 없었고. 이엘은 그게 안쓰러워서 결국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쓰며 얼굴을 가린 채 침실을 나왔다.

“폐하. 일어나셨습니까?”

문에 귀를 갖다 댔을 땐 고요하기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절대 그녀의 곁에서 떨어질 리 없는 하트가 무뚝뚝한 표정을 한 채, 문을 열고 나온 이엘을 향해 태연하게 인사를 올렸다.

“어, 하트 경. 설마 쉬지도 않고 여기서 대기한 건가?”

“조금 전에 교대했습니다. 푹 쉬었으니 괜찮습니다.”

“……조금 더 쉬어도 되는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트 경. 여긴 러셀 후작의 영지이고 위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호위도 하루쯤 쉬는 게 어때?”

“어느 곳이든 호위 없이 다니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유를 달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는데 역시나 소통이 되지 않았다. 하트의 표정을 보아하니 절대로 자리를 비켜 줄 것 같지 않아, 결국 이엘은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짐은 잠시 마을에 다녀오겠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근위대를 시키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갈 거야.”

“그럼 제가……,”

“슈프와 함께 다녀올 테니 경은 그동안 저택에서 쉬도록 해.”

“슈프라면…… 테르 늑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늑대의 영지에서부터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테르들이 몇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이엘에게 애착을 가지며 달라붙는 놈들이 있었는데, 하얀색 털을 가진 테르의 이름이 슈프였던 것 같다. 그놈이 여기까지 따라오기도 했으니까.

테르라니. 하트가 미간을 좁힌 채 한숨을 쉬었다. 우논 하나가 붙어도 못 미더운데, 하물며 테르라니. 그것도 성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어린놈을.

“폐하. 테르는 약합니다.”

“경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처음 보는구나.”

“…….”

“괜찮대도. 총도 챙겨 갈 것이고, 보호석 목걸이도 잘 차고 있어.”

“하지만…….”

“쉬고 싶어.”

“…….”

“줄곧, 계속 황궁에 갇혀 살았잖아.”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하트가 열었던 입을 닫았다. 즉위 이래로 제대로 쉰 적도 없이 일만 했고, 잠조차 편하게 자지 못하던 날이 많았다. 그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모습을 낱낱이 지켜봐 왔던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안다.

“마을까진 가지 않을 거야. 슈프를 데리고 갈 순 없지, 다들 놀랄 테니. 그냥 근처에서 지켜보다가 금방 올게. 약속해.”

“알겠습니다.”

의외였다. 그 고집 있고 무뚝뚝한 성격상, 어떻게든 따라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사실 이엘은 끝끝내 그를 설득하지 못하면 그냥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예상외의 대답이 신기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트를 쳐다보는데, 그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가 입은 로브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탁탁 털어 정리해 주었다.

“세 시간 정도면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말? 응, 세 시간이면 충분해.”

“그 전까지 돌아오지 않으시면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알겠어. 고마워, 하트!”

이엘은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하트를 향해 팔을 휘휘 저어 손 인사를 해 주고는 빠르게 저택을 빠져나왔다.

발코니가 보이던 뜰 앞에서 이엘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슈프가 그녀를 발견하곤 쏜살같이 뛰어와 그녀의 품에 달려들었다. 그 거대한 덩치 탓에 이엘이 뒤로 밀려 넘어지고 말았지만.

제 덩치를 생각하지 못하고 달려들었던 슈프가 당황한 듯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폐하! 죄송해요.”

“괜찮아. 많이 기다렸니?”

“아니요! 얼른 가요, 폐하. 어서 제 등에 타세요!”

새하얀 털이 오늘따라 더 예쁘게 보였다. 마치 하얀 눈을 머금은 것처럼, 슈프의 털이 달빛에 반사돼 눈이 부셨다. 이엘은 감탄하듯 다 자란 테르를 보다가 웃으며 그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녀가 타자마자 슈프는 빠르게 내달렸다.

후작저가 있는 곳을 벗어난 늑대는 그녀의 말대로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도착해 이엘을 내려 주었다. 땅을 밟고 후드를 벗은 이엘은 가까워진 마을 축제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즐거워 보여.”

“그럼 좀 더 가까이 갈까요?”

“아니야. 이 정도가 적당해.”

흥겨운 음악 소리에 맞춰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먹을 것을 손에 든 채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쭉 빼며 언덕 아래서 열린 마을 축제를 넋 놓고 구경하기 바빴다.

“폐하. 일단 앉아서 보세요!”

슈프가 그녀의 옷을 이빨로 물어 당기고 나서야 이엘은 바닥에 털썩 앉았다. 앉으면서도 반짝거리는 축제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하얀 늑대는 그녀의 옆에 엎드린 채 축제가 열린 마을을 한 번 힐끗, 또 그걸 구경하는 그녀를 한 번 힐끗. 그렇게 번갈아 쳐다보며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음악 소리가 좋다. 그치, 슈프?”

“음, 저는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인간들이 많아서 신기해요.”

아무리 인간과 이종족 사이가 이전보다 좋아졌다고는 해도, 늑대인 슈프가 이렇게 많은 인간들을 직접적으로 볼 일은 거의 없었다. 거기다 슈프는 테르인 탓에 제도에 자주 오지 못했으니 인간을 볼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인간을 보는 건 정말 오늘이 처음이다. 일라이저의 영지에 처음으로 입성하던 날엔 영지민들이 자신들을 무서워하던 탓에 이렇게까지 모이지 않았기도 했고. 슈프는 인간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엘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똑같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폐하는 인간이구나. 왜 이런 것에서 괜한 서운함을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로날드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는데……. 슈프는 좀스러운 제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슈프. 왜 그래?”

“네?”

“자꾸 나를 쳐다보고 있길래.”

이엘이 슈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를 달랬다. 티는 안 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양이지만, 제 눈엔 저 어린 늑대의 토라짐이 그대로 보여서.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음. 그럼 내가 한번 맞혀 볼까?”

“…….”

“너도 음악에 맞춰 춤추고 싶구나?”

“네? 아…… 네.”

이엘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려 주었다. 아직 미성숙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있을 테니. 그녀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슈프를 향해 우아한 귀족식 인사를 취했다.

“사랑스러운 늑대 님. 저와 함께 춤을 추시겠습니까?”

“어, 어? 저, 저랑요……?”

“네. 혼자 춤을 추기는 멋쩍으니까요.”

“그, 그치만 나는 춤을…… 인간이 아니라 춤을 잘 모르는데…….”

“늑대 님. 저는 인간임에도 춤을 못 춘답니다.”

이엘이 배시시 웃으며 다시 한 번 인사를 하자, 슈프도 얼떨떨한 표정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뭘 해야 하는지도 몰라 눈치를 보다가, 그녀의 자세를 따라 하려는 듯 앞발을 땅에 지탱한 채 몸의 중심을 뒤로 움직이며 마치 인간들이 인사하듯이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이엘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우시군요, 늑대 님.”

“노, 놀리지 마세요…….”

“괜찮아요. 저랑 같이 춤춰요.”

그녀의 부드러운 채근에 불퉁해졌던 슈프의 마음이 순식간에 풀렸다. 흥겹게 들리는 음악 소리에 맞춰 이엘과 슈프의 엉망진창 무도회가 시작됐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특히 그녀의 춤 선생을 자처했던 르네가 본다면,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찰지도 모를 일이다.

깔깔, 그녀의 폭소가 커다란 악기 소리에 완전히 파묻혔다. 이엘은 신던 신발도 벗어 던지고 하의를 살짝 걷어 올린 채 마음껏 풀밭을 밟고 뛰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슈프도 그녀의 자유로운 춤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저도 그녀를 따라 이리저리 나뒹굴며 뛰어다녔다.

“즐겁지, 슈프?!”

“응!”

“나도 즐거워!”

마치 몇 년 전의 그 허물없던 사이로 돌아간 것처럼. 이엘과 슈프는 땀이 날 정도로 이 시간을 소중히 보내고 있었다.

“허억…… 하아……. 힘들다아!”

“수, 숨차!”

그렇게 길고 긴 음악이 끝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정신없이 뛰놀던 것을 멈추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밤하늘을 가만히 쳐다봤다. 하늘을 수놓은 엄청난 수의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었다.

“좋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오헬도 이곳에 살고 싶어?”

“응. 언젠가 이런 곳에서 살고 싶어.”

“그럼 노아 님의 영지에서 살면 되잖아. 예전처럼.”

“이젠 그럴 수 없어, 이 귀여운 늑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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