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입을 보며 가만히 지켜보던 일라이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모리아에 남은 거주민들은, 어쨌든 폐하의 백성이고 폐하의 영지민입니다. 그 땅이 워낙 척박하여 아무것도 자랄 수 없음에도 그 땅이 고향이기에 쉽게 떠날 수 없는 자들이 그곳에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알면서도 놔두었던 거였군.”
노아의 말에 일라이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를 곯는 모리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엘에게 명령을 받고 살펴본 뒤에야 자금이 포필렌과 그 뒤에 있던 윌터 남작에게 모조리 들어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그녀가 즉위하기 전에 모리아 땅에 관심을 가진 것만 보더라도, 이엘이 모리아에 애착을 갖고 있음이 명확한데. 정말 그 땅 거주민이 살기 힘든 상태였다면 이엘이 몰랐을 리 없다. 애초에 모리아에 살던 이들 대다수를 제도로 이전시켰던 것도 그녀였는걸.
결국 일라이저가 눈감아주었던 것들은 전부 쓸모없는 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라이저는 이런 부분에서도 그녀의 충고가 옳다는 걸 느꼈다. 자신은 여전히 인간에게 무르다.
“그 부분은 폐하께 면목이 없습니다.”
“됐다. 후작이 선행을 베푼 것이니 괘념치 말라. 그 부분은 후작의 잘못이 아니야. 이렇게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지. 중요한 건 이후의 일이다.”
“예.”
“윌터 남작은 레온 후작의 영지에 포필렌이 자라는 걸 알고 있어.”
“그럼 역시…… 협박을 할 수도 있겠군요.”
“맞아. 짐이 포필렌으로 남작에게 힘을 가할 수가 없다. 레온 후작을 위해서라도.”
언제부터,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포필렌으로 올리세스의 목줄을 흔들 수는 없었다. 포필렌이 금지된 약초도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레온이 먼저 재배하고 있었으니. 일이 이래저래 꼬인 상태였다. 그 꽃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일라이저는 고민에 빠진 노아를 힐끗 쳐다보다가 이엘이 그린 지도를 그의 앞으로 밀어 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영지의 일은 무엇이 됐든 제 손으로 해결했으나, 피치 못하는 부분들은 믿고 맡길 만한 자들에게만 맡겼습니다. 그러니 영지의 자금이 빠져나간 것 또한 그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일부러 루트를 노출했던 거였소?”
“맞습니다. 폐하께는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루트가 샌 건 그들 중 하나가 윌터 놈의 세작이기 때문이란 소리일 테고.”
“맞습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됐다. 그들을 의심하게 됐다는 것에서, 일라이저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할지 노아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자신 역시 믿었던 자에게 큰 배신을 당했으니. 그리고 그자의 아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게 된 현실에, 그저 웃음이 났다.
“그럼 추려낼 수 있겠소?”
“네. 폐하께서 이곳을 떠나시기 전에 잡아내겠습니다. 그러니 사흘 뒤에 폐하께서 잠시 떠나시는 걸 들키지 않도록, 공작님과 제가 신경 써야 합니다.”
“알겠소. 폐하, 이곳은 저와 후작에게 맡기시고 다녀오십시오.”
“그래. 둘 다 고맙네.”
지도를 그린 종이를 돌돌 말며 회의를 정리하던 이엘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저 창밖 너머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마치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맑은 하늘이 보였다.
‘어쩐지 이 전쟁의 결말이, 저는 폐하의 낙승으로 끝날 듯하거든요.’
유클리드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
“제,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니?”
“네, 네……!”
이엘의 따뜻한 말에도, 아이들은 겁에 질린 것처럼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자꾸만 뒤로 주춤거렸다. 다정하게 그들을 기다려 주던 이엘도 끝내 포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아이들이 오랜만에 폐하를 뵌 탓에 긴장하여 그런 듯합니다.”
“후작. 뭘 그렇게나 변명을 하는가.”
뒤에서 지켜보던 일라이저가 실망한 이엘에게 변명하듯 말을 붙였지만, 그녀는 웃으며 손을 저을 뿐이었다. 대신 저 멀리 서 있는 한 아이를 향해 손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 피터. 잘 지냈니? 너만은 나를 외면하지 않아 주었으면 하구나.
피터의 맑은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이엘은 다시 한 번 다정하게 웃으며 피터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피터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동안 왜 제도에도 오지 않았던 거니?”
그녀의 물음에도 피터는 울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어린아이에게 너무 큰 짐이 지워진 걸까. 사라진 피터의 팔과 다리를 보는 게, 자신에게도 고역이었다. 참아 보려 했지만 생각보다 마음이 아파서……. 이엘은 피터를 제 품에 끌어안고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미안해. 피터, 정말 미안해……. 나와 함께 황궁으로 가자. 내가 앞으로 네 모든 것을 책임져 줄게.”
그러나 피터는 이엘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옆에 있던 아이의 도움을 받아 종이 위에 글자를 적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폐하. 저는 여기가 좋아요.」
글자를…… 배웠구나. 피터는 낙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수어를 할 수 없게 된 팔을 대신해, 아이는 글자를 배워 새로운 세상으로 걸어갔다.
「글자도 배웠고, 후작님의 일도 돕고 있어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알겠어. 강요할 생각은 없어, 피터.”
인간이나 이종족이나 가릴 것 없이 어린아이들의 수는 적다. 그래서 이엘은 제국이 안정을 찾자마자 제도 내에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부터 마련했고, 책임자를 오드로 지명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어린아이들이 자라기엔 제도 안이 제일 좋겠지만, 간혹 이렇게 영지민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일라이저의 영지민들이 그랬다. 뿔뿔이 흩어져 따로 살았던, 과거 러셀 후작가의 영지민들뿐만 아니라 일라이저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사람들은 후작령에 살기를 원했다. 좋은 영주를 만났기 때문이겠지.
“역시 후작의 영지는 둘러보지 않아도 평화롭구나.”
“영광입니다. 모두 폐하께서 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짐이 한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나라를 세워 주신 것만으로도, 저희는 사는 게 한결 나아졌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짐도 기쁘구나.”
모두가 행복할 순 없지만,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이엘은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신념이 그런 것을 지향하니까. 적어도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조금씩 달성하고 있구나, 하고.
이엘은 웃으며 피터와 인사를 마치고 계속해서 거리를 걸었다. 모두 그녀를 맞기 위해 거리에 나와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좋은 낯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한때 이엘과 같이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마을 사람이었다. 그녀와 오드의 도움으로 농사도 짓게 됐으면서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일엔 어린아이들과 이엘을 뱀의 사지로 몰아넣었던.
그녀의 시선이 잠깐이지만 그들에게 닿았던 것을 확인한 일라이저가 다급히 그녀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로 인해 구경하고 있던 영지민들도 일제히 몸을 낮추며 바싹 긴장한 자세를 취하자 이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일라이저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무엇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 후작.”
“……저는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
“부모를 잃고 전전하던 어린 시절의 저를 키워 주고, 거둬 줬던 이들입니다.”
일라이저의 무겁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그녀의 시선을 줄곧 피하던 사람들이 짧게 침음했다. 자신들도 살고 싶었다. 그 전쟁 통에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누가 죽고 싶겠는가. 몇 번의 위기를 겪으며 스스로의 목숨이 누구보다 소중해졌다.
그러니 내가 살 수 있다면, 우리가 살 수만 있다면, 소수인 너의 희생은……. 그래,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정말 추잡하고 부끄러운 과거지만 집단이라는 단체에 속해 죄책감은 덜고, 주장에 타당성만을 추구했다.
“일라이저. 일어나라, 바닥이 차가워.”
그녀가 손수 손을 뻗어 일라이저를 일으켜 세웠다.
“여긴 후작의 영지이고, 저들은 후작의 영지민이다.”
“…….”
“이제 와서 어떤 처분을 후작에게 요구할 리가 없지.”
용서라는 단어는 너무 무겁다. 언젠가 앤디가 자신에게 얘기했듯, 누군가가 용서해 달라고 절박하게 매달리면 상대방은 억지로 용서를 떠안아야 할 때가 생긴다. 그걸 알기에 일라이저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거겠지.
이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시선을 사람들에게로 돌렸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짐은 다른 사람이다.”
“…….”
“그대들도 다른 사람으로 살기를 바란다.”
그 말을 남기며 이엘은 그곳을 빠르게 지나쳤다.
미워하는가? 전혀. 미워할 리가 없다. 인간이 너무나 악하고 약한 존재라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자신도 그들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동일한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궁지에 몰린다는 건 그런 걸 의미했다.
너희 좋을 대로 해석하고 너희 좋을 대로 행동하라. 나는 너희를 교화시킬 수도, 그럴 마음도 없어. 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인간들은 황실의 무책임의 소산물들이고, 나는 그 황가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니까. 최소한 책임은 지는 게 맞겠지.
다른 사람으로 살기를 바란다는 말은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셈이었다. 내 책임과 너희의 책임이 공존한다는. 내가 너희의 허물을 알고도 모르는 척 덮었으니, 너희도 같은 일로 얼굴을 붉히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폐하. 조금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응? 괜찮아, 이 정도는.”
“제대로 쉬지 못하신 지 꽤 되었습니다.”
그녀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진 걸 눈치챈 노아가 먼저 붙잡아 세웠다. 마음 같아선 저 자식들을 거둔 일라이저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테니……. 그녀가 눈감아 주기로 한 이상 자신은 걸고넘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
“제 영지에서 출발하신 뒤로는 잠도 잘 못 주무셨습니다.”
“스라소니의 영지에선 푹 쉬었는걸.”
“그래도 긴장은 풀지 않으셨습니다.”
“그랬던가.”
“이곳에선 어떤 생각도 하지 마시고, 그저 쉬시는 것에만 집중하십시오.”
노아는 진심으로 그녀의 건강이 걱정됐다. 가뜩이나 자잘한 잔병을 달고 사는데, 몇 년째 제대로 쉬지를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어떻게든 그녀의 근심거리가 된 놈들을 치워 주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 노아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노아의 성화에 못 이긴 이엘은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후작저로 돌아왔다. 저택에서도 또 일을 할까, 노아를 비롯한 자들은 그녀를 아예 침실로 밀어 넣어 버렸다. 그 덕에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운 이엘은 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