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일라이저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뒷짐을 진 채 듬직하게 서 있는 제 아비와, 얼굴은 볼 수 없지만 그 옆에 선 제 어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사람들. 누구보다 자신의 세계에서 든든했던 사람들이었다.
단 한 장뿐인 그림이다. 이것 외에는 없다. 손위 누이들을 담은 그림을 포함해 그때의 초상화들은 모두 불에 탔으니까. 그래서 무엇보다 소중한 그림이어야 했는데……. 일라이저는 그림을 씁쓸한 표정으로 힐끗 봤다가 이엘과 함께 다시 자리를 이동했다.
한편 그녀의 뒤를 따르던 늑대들의 시선 역시 초상화가 있는 곳에 닿았다. 그중 가장 앞서 걷던 알폰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 표정으로 미간까지 좁힌 채 멈춰 섰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 공녀를 닮았다.
르네의 여동생, 릴리. 2차 전쟁 직전에 독수리의 영지에 볼일이 있어 몇 번 다녀온 적이 있던 터라, 알폰스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혼잣말하듯 노아를 향해 중얼거렸다.
“공녀와 정말 똑같군요.”
“……그래. 실제로 보면 더 닮았었어.”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노아의 대답에, 알폰스는 당황한 표정과 함께 눈치 빠르게 사죄했다.
“아……. 죄송합니다, 각하.”
“됐어. 다 지난 일이다.”
알폰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저 그림 속 왼쪽에 서 있는 루시우스 러셀이 한때 노아의 친구였음을, 그리고 그 관계도 루시우스가 배신함으로써 끝이 나 버렸음을, 너무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실언을 한 것에 스스로를 책망하며 알폰스가 뒤로 물러났다.
노아는 딱히 화가 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얼굴로 커다란 그림을 쳐다봤다. 자신도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근데 하필 그림의 온전한 부분이 루시우스와 이벨리아의 얼굴인 탓에……. 떠올리기 싫어도 그 시절의 추억이 절로 떠올라 목이 졸리듯 답답해졌다.
이벨리아 러셀. 왜 모르겠는가, 제 친구의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이었는데. 언제나 후작가를 밝게 해 주는 아이였는데.
‘안녕하세요, 기사님.’
‘어,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이벨리아?’
‘네. 오늘도 오빠를 만나러 오셨나요?’
‘어. 루스는 안에 있나?’
‘네. 집사가 안내해 드릴 거예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루시우스를 만나기 위해 이 영지에 숱하게 오갔다. 그렇게 오며 가며 몇 번 마주쳤던 소녀는 날이 갈수록 병색이 짙어졌다. 수많은 의원들을 부르고, 심지어는 황제의 눈을 피해 나자르인을 만나기도 했지만 소녀는 고칠 수 없는 마음의 병을 떠안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오던 어느 날, 소녀는 루시우스의 곁을 조용히 떠났다.
한동안 루시우스가 방황하듯 괴로워했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힘든 시간을 겨우 버텨 낸 루시우스의 앞에 이벨리아를 닮은 릴리가 나타났으니까.
사실 데뷔탕트에서의 릴리를 보고 노아도 놀랐다. 물론 같은 공작 가문이었기 때문에 독수리의 영지에 몇 번 오가기는 했어도, 그렇게 가까이서 릴리를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어린 릴리의 모습만 기억하던 노아에게도 그날의 릴리는 꽤 큰 충격이었다. 아마 잔뜩 치장한 터라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조차 이벨리아가 살아 돌아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노아는 고개를 돌려 정원이 있는 곳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원래 저기는 이벨리아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녀의 요양을 위해 지었던 별채가 있던 자리였다. 자신이 이곳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면 배웅해 주기 위해 루시우스와 이벨리아가 함께 나오던 곳이기도 했는데…….
“공작?”
그때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와, 노아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아…… 예, 폐하. 부르셨습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 잠깐 이리 와 보게.”
앞서 걷고 있던 이엘과 일라이저가 걸음을 멈춘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몇 번 자신을 불렀던 모양이다. 노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쓸데없는 생각들을 갈무리하곤 그녀의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엘은 노아와 일라이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흘 뒤에 짐은 하트, 오드와 함께 고니의 호수에 다녀올 생각이다.”
“사흘 뒤면 스완과 로날드가 호수에 도착했을 시기랑 겹치는군요. 폐하께선 그들과 합류하시려는 겁니까?”
“응. 스완도 그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거든.”
스완은 그녀에게 호수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겼던 그다음 날 다시 이엘을 찾아왔다. 역시 이엘도 함께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엘도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했던 말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백조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아는 게 좋을 듯했다.
“확실히 고니의 호수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아니. 공작은 이곳에 남아, 후작과 함께 내가 자리를 비웠다는 걸 누구에게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신경 쓰게.”
“제 영지에 세작이 있는 듯합니다.”
그녀의 명령을 이어받은 일라이저의 말에 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유클리드 역시 제 영지에 윌터 남작의 세작이 있었다고 했다던데. 그쪽이야 둘 사이에 거래가 오갔으니 그렇다 쳐도, 일라이저의 영지에까지 세작을 보낼 줄이야. 간이 부었나.
“누군지는 알고 있소?”
“예. 다만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습니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도록 하지.”
그녀의 말에 일라이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안으로 안내했다. 응접실 안에는 이엘과 오드, 노아, 하트, 일라이저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오드가 눈을 감고 공간에 성력을 걸어 두었다.
“방음을 해 놨으니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는 않을 겁니다, 폐하.”
“고마워, 오드.”
고된 여정과 조금 전에 맞은 비로 인해 지칠 만도 한데, 이엘은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상석에 앉아 펜을 들고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 달 전에 제도에서 출발해, 브라가 산맥을 넘어 노아의 영지로 향했던 길을 지도 위에 선으로 이었다.
“여기가 나와 근위대가 넘어온 길이야. 도중에 공작을 만나 이렇게 우회했지. 원래 우리가 가려던 길은 이 길이었어. 이 루트가 유출됐다고 판단해서 우회한 거야.”
경로를 유출시킨 놈이 일라이저의 영지에 있다던 세작 놈이었던 거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이미 노아의 영지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별 소득 없이 어영부영 넘어갔었다. 아마 그때까지도 일라이저는 이엘에게 말을 아꼈던 모양이다. 아까 그가 말한 것처럼 물증이 없던 터라.
“제 영지에 세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작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일라이저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노아를 바라보고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자잘한 습격 등을 비롯해, 영지 경영에 들어와야 할 세금의 일부가 누출되고 있었습니다. 그 양이 많지 않았고, 장부를 조금 고치는 등의 자잘한 수준이라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역으로 추적하기 위해 놔두었습니다.”
“그게 윌터 남작에게로 유출되었던 건가?”
“정확히는 모리아 사람들에게로 유출되었습니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스라소니와 모리아 사이에서의 충돌 건을 공작도 기억하고 있겠지? 그로 인해 귀족 회의가 열렸고, 공작도 참석했을 테니.”
일라이저의 말을 이어받은 이엘의 말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족 간 마찰, 특히 인간과 이종족 사이의 마찰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클리드가 모리아로 쳐들어가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던 그 사건을 어떻게 잊겠는가. 하지만 그 사건은…….
“포필렌 꽃이 원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그곳에서 재배되고 있던 포필렌 꽃으로 스라소니가 피해를 입었고, 더 큰일로 번지기 전에 수습하기 위해 유클리드가 직접 나섰다고 밝혔지.”
“설마…… 러셀 후작의 영지에서 빠져나갔던 자금이 모리아로 들어가 포필렌 재배로 이어졌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체 누가…….”
“윌터 남작이야.”
“어째서…… 그가 얻을 만한 이득이 없지 않습니까?”
고작해야 진통을 억누르는 정도의 식물을 재배해 봤자, 그것에 드는 비용과 시간적 측면을 고려하면 효율이 떨어지는 짓이었다. 게다가 제도 내엔 날이 갈수록 성력이 강해지는 오드가 성전에 있는데, 인간들이 굳이 포필렌을 찾을 이유가…… 설마……!
“……이종족을 노렸다는 말씀이십니까?”
“며칠 전, 유클리드는 짐에게 저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포필렌을 재배하는 건 표면적으로는 모리아 사람들이지만, 그 뒤에서 자금을 대고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던 건 윌터 남작이야.”
“…….”
“당시 유클리드와 윌터 남작은 겉으로는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인간과 이종족 사이가 그렇게 쉽게 풀어질 관계가 아니었어. 결국 팽팽하던 긴장을 먼저 끊은 건 유클리드 쪽이었다. 윌터 남작의 제의를 먼저 거절한 거야.”
“그 거절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유클리드가 말했습니까?”
“그래. 짐을 납치하는 것이었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러 참았다. 노아는 그녀 앞에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애써 감정을 누르며 차분히 심호흡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올리세스 윌터인지 뭔지 하는 놈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지만.
“유클리드가 그 제안을 처음 거절한 이유는 그 일로 인해 자신이 얻을 게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의 말을 따르게 되는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더군.”
이유 한번 참 유클리드다웠다.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본 이엘이 작은 웃음을 터뜨리곤 이어 설명했다.
“어쨌든 그에 대한 보복과 제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올리세스 윌터는 어린 테르 스라소니들에게 포필렌을 먹인 모양이었고, 테르 중 일부가 포필렌에 취하는 것에 성공했어. 그의 가설이 들어맞은 거지.”
“포필렌이라는 꽃, 혹시 중독성도 있습니까?”
“응. 그런 것 같아.”
그 사건 이후 이엘은 오드를 통해 자신이 몰랐던 포필렌 꽃의 특징을 듣게 됐다. 장기간, 그것도 상당한 양을 복용하게 되면 중독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인간만이 아니었다.
“아마 이종족에게도 중독성이 있는 듯해. 인간에겐 오남용이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긴 했지만, 그게 이종족에게까지 통할 줄은 몰랐거든. 이종족과 관련한 것들은 전무하니까.”
사실 이런 식이면 이엘에게 가장 걱정되는 건 레온이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주기적으로 포필렌을 복용하고 있었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자세한 건 그의 영지에 들렀을 때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지.
“어쨌든 그 일로 스라소니가 일방적으로 모리아 땅을 불태웠다는 누명을 쓰게 됐고, 그 이후의 일은 공작이 알고 있듯 회의를 통해 서로에게 보상하는 것으로 일단락됐어. 하지만 그때 모리아를 대변하듯 핏대를 세우며 완강한 처벌을 원했던 건 올리세스의 아비인 윌터 백작이었다.”
그래서 이엘도 수상함을 느끼고 일라이저를 모리아로 보냈던 것이다. 그때 이미 윌터 백작 부자가 모리아의 실질적인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음을 알아냈고, 동시에 일라이저 후작령의 자금이 그들 손에 들어가고 있었다는 것도 확인했다.
“당시 제가 모리아로 돈이 새어 가고 있었음을 알면서도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은, 그 땅의 주인이 황가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