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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77화 (277/488)

277화

스라소니의 영지에서 자신을 불쑥 찾아온 하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봤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일라이저는 변명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입을 벌리고 어떤 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일라이저의 반응에 하트는 무감한 말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숨겨야 하는 비밀입니까?’

‘……그렇게 해 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홱 돌아서 자리를 떠나 버렸고, 그 뒤로 줄곧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관찰하듯 쳐다보는 것이다. 아마 나중에 그의 형제인 패티스를 만났을 때 보고하기 위해서겠지. 패티스는 이엘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보고하라고 하트에게 말해 두었을 테니까.

……역시 아니라고 변명하는 게 좋았을까. 그 생각을 하며 일라이저는 옆에 선 이엘과 하트를 애써 외면하고 시야에 들어온 자신의 영지로 시선을 돌렸다.

빗속에서 보는 제 영지는 정말 아름다웠다. 비록 그 많던 영지민들이 사라지고, 아름다웠던 저택은 터만 남았지만……. 자신이 기억하던 그 시절의 후작령을 많이 회복한 상태였다. 물론 이렇게 만들기 위해 영지에 힘을 쏟느라, 그녀가 보고 싶어도 제도로 가지 못했던 날이 상당했지만.

“그대는 모르겠지만, 아주 어렸을 때 선황과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있어.”

이엘이 앞만 응시하고 있던 일라이저를 툭 쳐서 자신을 보게 만들고 말을 건넸다.

“선황과 황자는 선대 후작의 저택에 머물렀지만, 짐은 그러지 못했지.”

왜 모르겠는가. 자신이 처음 그녀를 만났던 게 그때인데.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만남이었다.

“짐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

“…….”

“그 시절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데, 아주 흐릿하게나마 기억해.”

봉인이라도 된 것처럼 어린 시절을 드문드문 기억하고 있지만, 이엘은 이곳에 왔던 날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후작의 어머니를 짐은 기억하고 있네.”

“제 어머니…… 말씀이십니까?”

“응. 짐에게 아주 다정하게 대해 주었거든.”

얼굴까지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후작 부인이 자신을 살뜰히 챙겨 주었던 건 기억하고 있다. 혼자 별장 후원에서 목검을 쥐고 수련하고 있을 때, 몰래 먹을 것과 필요한 것들을 두고 간 게 그녀였으니까.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 황제가 별장에 머물러 있던 자신을 후작의 성으로 불러들였고 그곳에서 이엘은 그녀를 처음 보았다.

“먼발치에서 봤어. 후작 부인이 그대 남매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이엘은 어렴풋하게 떠오른 그때 생각에 잠깐 웃음이 번졌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때 자신만큼 작았던 남자아이가 있었구나. 그게 일라이저였고…….

자신을 발견한 후작 부인이 웃으며 제게 인사했고 가까이 오려 했지만, 이엘은 까닭 없이 그 자리가 불편해져 뒤돌아 도망쳤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직전에 제 곁을 떠난 황후가 그리워 그랬던 건 아니었나 싶다.

내겐 더 이상 도망칠 어머니의 품이 없구나……. 그렇게 깨달은 탓이겠지.

“신기하네. 전부 잊고 살았는데, 기억이란 게 참 신기해. 이렇게 그대의 영지를 보는 것만으로 조금씩 떠오르는 게.”

언젠가…… 내가 묻고 살았던 모든 기억들도 이런 식으로 전부 떠오르게 되겠지. 그때 난 웃게 될까, 울게 될까. 이엘은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어 서글퍼졌다.

“그때 짐이 용기를 내서 그대의 어머니와 마주했더라면. 그대와 짐이, 조금 더 빨리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그 시절의 제겐 친구가 없었고, 의지할 데라곤 이온 하나뿐이었다. 어머니까지 잃고 난 뒤로 자신은 병적으로 이온에게 집착하며 자라게 됐고, 그게 오늘날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이온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지금의 결과가.

“……그 시절로 돌아가면.”

“응?”

“폐하께선…… 그 시절로 돌아가시면 저와 친구가 되어 주실 겁니까?”

일라이저의 입에서 너무도 당연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이엘은 잠깐 멈칫했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응. 당연히.”

“…….”

“물론 그때의 후작은 날 친구로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만.”

“예? 왜 그런 말씀을…….”

“그때의 짐은, 그냥 버려진 존재였잖아.”

버려졌다. 그 단어에 일라이저도, 하트도 화가 났다. 그녀는 버려져서는 안 되는 존재인데…….

“아마 그때 후작과 짐이 만났더라면, 내가 후작에게 매달렸을지도 모르지. 나와 친구 해 달라고.”

반 정도는 농담이었지만, 또 절반은 진심이었다. 그때의 러셀 후작은 지지기반이 튼튼했고 제국에서 영향력 있던 귀족들 중 하나였으니까. 보통 귀족은 첫째 남자아이에게 작위를 물려주었기 때문에, 아마 그때쯤의 일라이저는 소후작으로 인정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유폐된 궁에 지내던 자신과 친구가 되어 줄 리가.

“폐하.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가까이 다가온 일라이저가 바닥에 깔린 진흙에도 아랑곳 않고, 한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춘 채 그녀를 올려보았다.

“매달리는 건 저의 몫입니다.”

“…….”

“폐하께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제겐 귀하신 분입니다.”

그래, 그대 가문의 가풍이 그러하였지. 러셀 후작가는 그런 가문이었다. 그의 아비 역시 제겐 더없이 충실한 스승이지 않았던가.

“그런 것까지 그대는 아비를 닮았구나.”

“아버지보다 더 오래, 폐하의 곁을 보필할 것입니다.”

“…….”

“제 모든 것을 지켜서.”

이엘은 이어진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안 돼. 그건 안 된다고 이전에도 말했어.”

“허락하지 않으셔도, 저는 그런 날이 온다면 당연히 목숨을 바칠 겁니다.”

……그대의 아비가 왜 죽었는지 모르면서. 아직도, 나는 아직도 그대에게 털어놓지 못했어. 루시우스가 나를 지키다가 죽었음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면 안 되지, 일.”

“…….”

“내 아이의 대부가 되어 주기로 했잖아.”

이게 얼마나 비겁한 말인지, 그대는 모르겠지. 내 목숨을 저당 잡아 그대의 아비가 희생됐으면서, 이번엔 도리어 내 아이의 목숨을 들먹이며 그대를 붙잡다니. 정말 그대의 가문에 못할 짓만 하는구나…….

“그러니까 안 돼, 일.”

“폐하.”

“다른 이면 몰라도 일라이저, 그대만큼은 그러지 말아 줘. 이건 부탁이고 명령이야.”

가슴이 따끔따끔하고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이엘은 자신을 보는 일라이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하트를 재촉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눈치 빠른 하트는 그녀를 태운 채 빠르게 러셀 후작령을 향해 달렸다.

죄책감이 들었다. 일라이저에게도, 제 아이에게도 하지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녹색 눈을 가진 남자아이가 자신을 향해 배시시 웃는 게 보인다. 꿈의 연장인지, 스트레스로 인한 환각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테오도로가, 내 아이가 웃고 있다. 날 향해.

“……짓지 말걸.”

“…….”

“이름…… 짓지 말걸…….”

혼잣말을 하듯 그녀가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한참을 중얼거렸다. 하트는 모른 척해 주며 달리던 속도를 올릴 따름이었다.

*

비는 갈수록 더 세차게 퍼부었고, 이엘과 일행들이 일라이저의 영지에 들어섰을 땐 돌풍까지 맞은 탓에 온몸이 비에 젖어 엉망이 된 후였다.

“정식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이렇게 방문할 수 있어, 짐도 기쁘네.”

이엘은 일라이저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가신들에게 받은 커다란 타월로 비에 젖은 몸을 감싸며 저택을 구경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검소한 성품을 닮아, 저택 역시 후작저치곤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 노아의 영지에 있는 그녀의 별저보다 조금 큰 정도일까. 그래도 갖출 것은 잘 갖춰져 있어, 보는 재미가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널찍한 복도를 걸으며 일라이저의 설명을 조용히 듣던 이엘의 걸음이 어떤 한 곳에서 멈췄다.

“폐하?”

“이 사람은…….”

“아, 그분은 제겐 고모님 되시는 분이십니다.”

커다란 그림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젊은 모습의 루시우스 러셀과 그의 부인, 그리고 가운데 앉아 있는 소녀는 이엘에게 낯익은 사람이었다.

“전쟁 이후에 우연히 소유하고 있던 자가 저를 찾아와 건네준 초상화입니다.”

“불에 그을렸군.”

“네. 아버지의 얼굴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불에 그을리고 찢어져서 후작 부인의 얼굴 부분은 아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상태였다. 루시우스 러셀과 그의 여동생의 모습도 얼굴을 제외하면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엘은 홀린 듯이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루시우스가 서 있는 왼쪽이 아닌, 그의 여동생이 앉아 있는 가운데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낯익었다.

“이벨리아 러셀. 제 고모님이십니다.”

“이벨리아…….”

“몸이 약하신 탓에 요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직접 뵙지는 못했습니다. 이 그림도 살아 계실 때 그린 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하시면서 고모님의 옛 초상화를 보고 새롭게 그린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이 차이가 나게 그려졌구나. 가운데 앉아 있는 소녀는 성년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였으나 그녀의 뒤에 선 두 사람은 그보다 한참 나이가 많아 보였다. 이엘은 소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근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하프네요. 폐하께서도 음악을 좋아하시나요?’

‘아니. 싫어한다.’

‘…….’

‘그중에서도 하프는 끔찍하게 싫어해.’

불현듯 떠오른 건 르네와의 대화였다.

아…… 그래. 그때 르네의 성에서 봤던 여동생 릴리와 닮았어. 머리카락 색만 다를 뿐, 이목구비가 르네의 성에서 봤던 초상화 속 릴리와 흡사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본 터라 확실하진 않지만 이렇게 보자마자 릴리를 떠올릴 정도면, 꽤 닮은 그림인 건 분명하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아냐. 그냥…… 루스 경을 오랜만에 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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