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76화 (276/488)

276화

*

“테오도로와 베아트리스. 정말 좋은 이름이군요.”

“…….”

“왜 그럽니까, 공작?”

“아이들을 정말 만날 수 있는 건지……. 그게 궁금합니다.”

“만날 수는 있겠지요.”

조언을 얻고 싶어 찾아왔는데, 오드는 그저 웃으며 당연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노아는 순간적으로 무례한 행동이란 사실도 잊고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을 불끈 쥐고 말았다. 그러다가 짧은 한숨을 쉬며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오드 님. 제가 무슨 의미로 오드 님께 이런 이야기를 한 건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진정해요. 공작이 무슨 이유로 날 찾아온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긋나긋한 오드의 목소리에 노아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오드는 빙긋 웃으며 노아의 앞으로 찻잔을 밀어 주었다.

“공작. 그에 앞서 물어볼 게 있어요.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찾았나요?”

왜 ‘그’가 이엘에게 나타났는지, 무슨 대가가 필요한 건지, 오드는 노아에게 그것을 알아내라고 요구했었다. 그러나 노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 계약을 한 건 폐하뿐이시고, ‘그자’를 만난 것도 폐하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

“아닐 텐데요.”

“…….”

“한 명 더 있습니다.”

노아가 열었던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로빈…… 말씀이십니까?”

“제가 드릴 수 있는 힌트는 여기까지인 듯하군요.”

“로빈은…… 로빈이 알고 있는 게 뭔지 알아내면 되는 겁니까?”

“폐하는 그 비밀을 로빈이 있는 곳에서 밝히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폐하께서 뱀의 공작에게 ‘그자’를 드러내신 이유를, 공작은 알아내야 합니다.”

그래. 이상하긴 했다. 단순히 로빈에게 잡혀 있는 그녀의 목숨을 보장받기 위해서라기엔, 그게 아니어도 가능한 수단이 많았을 텐데……. 게다가 그녀가 순순히 로빈에게 붙잡혀 뱀의 영지로 들어간 여러 이유에, 로빈을 끌어들이려는 계획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상한 건 로빈도 똑같았다. 그녀를 흔들 만한 카드를 쥐고 있음에도 굳이 사용하지 않는 것. 아니, 오히려 제 수하인 뱀들의 입단속을 시키면서까지 비밀을 감추기 바쁜 건 로빈이었다. 그녀만큼이나 로빈의 행보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테오도로 레비 무어 르뷔아. 베아트리스 나타시아 리카르디스 르뷔아.”

“…….”

“정말 좋은 이름이네요. 폐하께서 고심하며 지으신 듯하군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테오도로는 그녀를 닮아 녹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아이이고, 베아트리스는 자신을 닮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일 거라고. 마치…… 마치 본 것처럼 이야기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설마. 정말로 미래에…….

“오드 님. 당신은 미래를 보실 수 있으니…… 그 미래를 조금만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

“아이가 정말 태어나는지, 그것만이라도…….”

“공작. 성력이라는 건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된답니다.”

“…….”

“특히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으로는, 절대로 안 돼요. 반드시 그 죗값을 받게 될 겁니다. 보호석을 만드는 행위가 그런 예에 속하지요.”

보호석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신의 순리가 어그러졌던가. 아무리 황제의 명령이었다고 한들, 나자르는 그 일에 가담해선 안 됐다. 그로 인해 수명과 성력이 깎이게 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도 나자르였다.

“그깟 미래를 조금 알려 준다고, 누군가에게 위해가 가겠습니까? 도리어 폐하께 살아갈 의지를 만들어 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 반대로 물어볼게요. 만약 미래에 폐하가 죽는다면.”

“…….”

“그럼 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죽을까요.”

죽는다고? 이엘이? 물론…… 그녀는 인간이니 언젠가는 죽겠지만. 오드가 그런 의미로 얘기한 건 아닐 테니까.

“폐하가 위험하십니까?!”

“만약을 가정하는 거예요.”

“…….”

“폐하께서 급사하시면, 당장 공작은 어떻게 할 건가요.”

“저는…….”

죽겠지. 나는 그녀를 따라 기꺼이 목숨을 버릴지 모른다. 아버지가 그러셨듯.

“아니면 반대로 공작이 죽는다면요.”

“…….”

“그리고 그걸 폐하께서 아신다면. 폐하는 어떠실까요.”

그 순간 노아의 머릿속을 파고든 건, 몇 년 전 악몽을 꾸고 벌벌 떨었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때 그녀의 꿈속에선 모두가 죽었다고 했다. 자신도 죽고, 르네도 죽고, 레온도 죽고……. 겨우 꿈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그 꿈이 너무 생생했고, 심지어 반복적으로 꾸고 있다고까지 했다.

“나의 말 한 마디가 가져올 파란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 공작은 모를 겁니다.”

“…….”

“나는 나자르. 신의 음성을 듣고 신의 계획대로 당신들을 이끌어 가는 게 내 일입니다.”

노아는 오드의 눈동자 속에 숨겨진 고독함을 읽었다. 그는 제 종족이 모두 사라진 땅에서, 제 종족을 죽여 버린 인간들을 위해 살고 있는 나자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한 요구를 했습니다, 오드 님.”

“아닙니다. 공작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

“그렇군요. 폐하께서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 주셨군요.”

“……예.”

“이름이라는 건 사실 굉장히 특별한 것이랍니다.”

노아도 알고 있다. 제 이름이 일찍 죽었던 형의 이름이었던 것만 해도. 이종족도, 인간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이름을 짓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름을 짓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없던 존재가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존재로 바뀌기도 하지요.”

“…….”

“다행이네요. 폐하께선 미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신 모양이니.”

“아이가…… 미래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폐하의 아이는 특별합니다. 선대의 악을 대물림받게 될지, 아니면 거기서 끊게 될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되겠군요.”

선대의 악이라면, 역시 선황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엘이 ‘그자’와 계약을 한 행위 자체를 말하는 것일까.

“공작.”

“예.”

“폐하께선 공작의 생각보다 훨씬 더, 노력하고 계십니다.”

“…….”

“공작은 유클리드 백작을 끌어들인 것이 불만이겠지만 폐하께선 다 이유가 있어서 그를 선택한 것입니다.”

“정말로 꿈을……,”

“맞아요. 폐하께서 꾸셨다는 그 꿈에서 스라소니는 논외 대상이었지요. 폐하께선 꿈을 바꾸기 위해 조금씩이나마 발버둥 치고 계신 거예요.”

그녀는…… ‘목소리’의 눈을 가리고 조금씩조금씩 자신이 숨 쉴 곳과, 모두가 숨 쉴 곳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한 번에 바꿀 수 없어서, 그렇게 되면 ‘목소리’가 눈치챌 테니까, 그녀는 조금씩 흐름을 바꾸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꿈은…… 정말 예지몽입니까?”

“그건 모르지요. 그대로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유클리드 백작이 폐하의 편에 선 것이 꿈의 흐름과 달리 가고 있다는 증거겠네요. 공작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폐하는 오드 님처럼 나자르인이 아니니, 예지몽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노아의 대답에 오드가 웃었다. 역시 똑똑하군요, 공작은. 그의 반응을 확인한 노아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선 제게 꿈을 꾸게 만드는 이종족이 있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꿈을 능력으로 사용하는 이종족이요.”

“역시 폐하시군요. 접근이 빠르셨어요. 그 덕에 ‘그녀’와 일찍 만날 수 있었던 거겠군요.”

“그녀라면, 혹시 며칠 전 폐하께서 스완의 능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셨을 때 만난 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일부러 묻지 않았다. 노아는 전적으로 그녀를 신뢰하고 그녀의 주장을 지지하기 때문에, 이엘이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그녀를 채근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비록 알고 싶은 게 많다 할지라도.

“공작. 나는 신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나자르이지만…… 나도 인간이에요.”

“…….”

“그러니 나도 서고 싶은 편이 있답니다.”

나타니엘……. 노아는 오드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요, 공작.”

“알겠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해 봅시다.”

“…….”

“이 전쟁의 승리가 폐하의 손에 있기를, 내가 매일 기도하고 있으니까요.”

이 전쟁의 승리가 그녀에게 있기를, 노아도 매일 기도하고 있었다.

*

“바로 저곳입니다, 폐하.”

스라소니의 영지를 떠난 지 3일 만에 일라이저의 영지에 도착했다. 이엘은 새롭게 작위를 받은 일라이저에게, 그의 선조들이 받았던 영지를 그대로 하사했다. 건국 초기에 일라이저의 작위 계승을 축하하기 위해 왔던 걸 제외하면, 그의 영지에 제대로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인 셈이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탓에 시야가 뿌옜지만, 저 멀리 성벽이 보였다.

“폐하. 그럼 저는 여기서 빠지겠습니다.”

근처에 서 있던 스완이 망토의 후드를 뒤집어쓰며 조용히 속삭였다. 고니가 살고 있는 호수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누가 동행하기로 했나?”

“제가 가겠습니다, 폐하!”

뒤에서 당당하게 소리치며 나온 것은 테르, 로날드였다.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로날드의 모습에 이엘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로니. 네가 다녀올 수 있겠니?”

“예! 허락하신다면 제가 스완과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좋아. 그럼 은밀하게 잘 다녀오도록 해.”

이엘이 하트의 등에서 내려와 손을 뻗어 로날드의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로날드는 기분 좋은 하울링을 내다가 몸을 낮춰 습관처럼 그녀에게 애교를 부렸다.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새끼의 모습이었지만, 이젠 로날드가 이렇게 몸을 낮춰도 이엘이 발뒤꿈치를 들지 않으면 닿을 수 없을 만큼 다 자란 상태였다.

“정말…… 다 컸구나, 로니.”

“네! 조금 더 실력을 키우면 기사단에 들어갈 거예요.”

“그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하고 있으마.”

“예, 폐하!”

그녀의 응원을 받고 로날드와 스완은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대열을 빠져나갔다. 이엘은 두 사람이 사라진 곳을 짧게 응시하다가 곧 하트의 등 위에 올라타 일라이저가 있는 선두 쪽으로 향했다.

“후작.”

“예, 폐하.”

“그대답지 않게 긴장하는 것 같군.”

“폐하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 더 신경 쓰겠습니다.”

“괜찮아. 다른 곳도 아니고 그대의 영지인걸.”

“그러니 더 조심해야 합니다. 제겐 어떤 것보다 폐하의 안전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대의 영지는 굳이 시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짐은 그대를 신뢰한다.”

“……영광입니다.”

일라이저는 붉어진 귀 끝을 숨기려 고개를 숙인 채 느리게 대답했다. 그녀는 제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그녀가 올라타 있는 하이에나는 알아챈 것 같았다. 이엘이 스완의 능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날부터 줄곧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으니까.

‘당신도 폐하를 마음에 품고 있습니까? 수컷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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