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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75화 (275/488)
  • 275화

    “저희야 물론 몰랐죠. 폐하께서 안내해 주셨는걸요.”

    “…….”

    “근데 아마 폐하도 모르셨을 거예요. 오드 님이 알려 주지 않으셨을까요? 그러고 보니 신기하긴 하네요. 원래 고니들은 호수 깊숙한 곳에 살고 있어서 뭍 근처로는 나오지도 않는다는데, 그날은 스완 그놈이 딱 거기에 있었다는 게.”

    세잔티노. 시모네. 백조. 그리고 나자르.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시모네의 친구 중에 백조가 있고, 세잔티노에 생긴 땅굴의 방향이 고니들이 사는 호수로 이어지는 게…… 이게 다 우연이라고? 이 모든 힌트를 준 게 나자르인데, 이게 다 우연?

    “패티스 님?”

    “경은 나자르의 능력을 어디까지 체험해 봤나.”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그냥. 대답해 보게.”

    “글쎄요. 일단 오드 님은 죽은 생물을 살리는 것만 아니면 다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

    “폐하께 들었는데, 오드 님은 나자르 중에서도 조금 특별하다고 그러셨어요.”

    “…….”

    “정말 신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으실지도 몰라요. 예전엔 나자르인들이 신의 목소리를 듣고 대신 전해 줬다면서요. 그걸 신탁이라고 했었나? 아무튼 그거요. 이젠 끊어져 버린 신탁도 오드 님이라면 들으실 수 있을지 몰라요.”

    “……신탁. 그래, 그랬던 적도 있었지.”

    “현재 유일한 나자르인이시니까. 저희가 상상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능력을 갖고 계실지도 모르죠. 게다가 성력이라는 건 믿음에서 나온다고 했으니, 제국민이 신을 찾게 된 지금은 그게 더 강해지셨을 수도 있고요.”

    “알겠네.”

    패티스는 서둘러 책들을 챙겨 도서관을 나왔다. 그러곤 달리다시피 걸어서 피시가 머물고 있는 방에 도착했다. 모포를 덮고 눈을 붙이려던 피시가 그의 등장에 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티스? 그게 다 뭐야?”

    “피시. 여기로 올라오기 전까지도 길이 계속 이어져 있었어? 그러니까 여기 제도의 지상으로 연결된 구멍을 지나쳐도 길이 계속 이어졌냐는 얘기야.”

    “응. 너무 지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구멍이 보여서 올라왔어. 만약 내가 그 구멍을 지나쳤다면 계속 달리던 길을 갈 수 있었을 거야.”

    패티스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보고 있던 지도가 그려진 책 두 권을 펼쳐서 피시의 앞에 보여 주었다.

    “잘 봐, 피시. 이게 네가 왔다는 길이야.”

    “응.”

    “네 말대로라면 앞으로 길은 이렇게 쭉 이어지겠지?”

    “응, 아마도.”

    “……확신할 순 없지만, 앞으로 그 길이 이 지도에 있는 강줄기처럼 두 번 정도 동쪽을 향해 꺾일 거야.”

    “그럼…….”

    “어. 이번엔 방향이 바뀌는지, 예민한 감각을 살려서 잘 느껴 봐.”

    “알겠어.”

    패티스가 제 말을 믿어 주었다. 피시에겐 그 사실이 중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스스로의 무능함과 무지에 자괴감만 들었는데, 그새 마음이 들떠서. 패티스가 자신을 믿어 준다는 사실 하나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시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패티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도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럼 이대로 쭉 길이 이어진다는 거야?”

    “어, 아마도. 확실한 건 아냐. 그냥 내 추측……,”

    “아냐. 확실할 거야. 네가 말한 거잖아.”

    “…….”

    “패티는 천재니까.”

    ‘패티! 정말이야?! 글자를 다 배웠어?! 우와! 우와…… 대단해! 역시 패티스는 천재야!’

    그 옛날 자신을 한껏 추켜세우며 순수한 동경을 보냈던 자신의 둘째 형이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그를 버리고, 나를 버렸는데……. 근데 넌 변하지 않은 채로 이곳에 왔구나.

    아마 피시는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잊고 있겠지. 그렇게나 순수하고 티 없어서……. 패티스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늦지 않았군요, 누님……. 그 생각과 함께 나온 한숨은 안도의 한숨이었을까, 후회의 한숨이었을까. 이제야 완전한 알을 깨고 나온 것처럼, 몸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그사이 지도를 살펴보던 피시가 패티스를 불렀다.

    “근데 패티스. 만약 그 길이 쭉 이어진다면 도착하는 곳은 여기야?”

    “그래, 맞아. 이 호수.”

    “이 호수에 뭐가 있는……,”

    “여긴 고니가 사는 곳이야.”

    “……어?”

    “고니 말이야. 백조랑 흑조.”

    피시의 눈이 조금 전보다 커졌다.

    “앤디 경에게서 들었어. 여기가 고니들이 사는 곳이래.”

    “…….”

    “그러니까 피시. 만약 도착한 곳이 고니들이 사는 그 호수가 맞다면……,”

    “빈센트.”

    “뭐?”

    “시모네의 친구. 백조의 이름이 빈센트야.”

    “너…….”

    “응, 맞는 것 같아. 세잔티노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시모네가 내게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었어.”

    고통으로 평생을 잊고 살았던 시모네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이게 전부 우연일 리 없다.

    “그럼 확실해졌네. 어차피 고니가 사는 곳은 앤디 경이 알고 있으니까 굳이 땅굴로 내려가서 이동할 필요 없어. 앤디를 타고 고니의 호수에 다녀와.”

    “아냐. 땅굴로 갈게.”

    “…….”

    “그렇게 가면 왠지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아까 앤디도 그런 말을 했다. 원래 고니는 호수 깊숙한 곳에 살기 때문에 뭍 근처엔 오지 않는다고. 결국 땅굴이 피시에게만 열린 것도 관련이 있는 거겠지. 긴 고민 끝에 패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겠어. 대신 보호석을 줄 테니까 이걸 갖고 가.”

    “왜?”

    “보호석엔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결계식이 새겨져 있잖아. 혹시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오드 님이 널 발견하실 수 있으니까. 가져가.”

    “응, 알겠어.”

    시모네. 네 친구라던 백조 놈이 피시를 부르고 있다. 네가 내 한 몸과도 같은 누님과 형을 사랑했으니 이번엔 널 믿어 보지. 피시가 위험하지 않게, 네가 지켜 줄 거라고 믿어 볼게. 그러니까 이번엔 무사히 돌려줘. 누님처럼 내게서 빼앗지 말고, 이번엔 내게 형을 돌려줘.

    패티스는 주먹을 세게 쥐며 지도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

    “엘.”

    “…….”

    “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벌써?”

    깊게 잠에 빠졌던 건지 이엘은 노아의 품속에 묻고 있던 얼굴을 떼고 눈을 비비적거렸다. 노아는 그 모습이 귀여워, 그녀의 눈가 끝에 자잘한 키스를 잔뜩 퍼부었다.

    “간지러워, 노아.”

    “일어나셔야 합니다, 폐하.”

    노아는 먼저 침대 밖으로 몸을 빼고 일어나려다가, 불쑥 제 허리를 감싸는 얇은 팔이 느껴져 그 자리에 멈칫하고 말았다.

    “가지 마.”

    “폐하.”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 응?”

    기분이 좋은 건지 눈을 감은 채 연신 웃는 얼굴이다. 평소엔 볼 수 없는 모습에 노아는 또 마음이 스르르 무너져 버렸다. 제 약점을 다 알고 이러는 게 분명하다. 그래도 그게 좋았다. 제게만 보여 주는 그녀의 모습이, 미치도록 좋았다.

    모처럼의 평화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유클리드의 영지에서 맞이하는 모처럼의 평화.

    노아는 결국 다시 침대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자석처럼 제 가슴팍에 달라붙은 그녀의 말랑말랑한 피부가 좋았다. 노아는 한 손으로 이엘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감긴 그녀의 눈꺼풀 위에 입술을 짧게 여러 번 부딪쳤다.

    “노아.”

    “예. 말씀하십시오.”

    “아직도 내가 유클리드와 손을 잡은 게 불만이야?”

    “불만을 가진 적은 없습니다.”

    “그럼?”

    “불안한 것뿐입니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 이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눈을 뜬 채로 제 코앞에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곧 그의 얼굴을 잡아 가까이 끌어당기며 입술을 짧게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전에 내가 꿨던 꿈으로 인해, 그대가 불안해하던 것 잊었나?”

    “…….”

    “그때 내 꿈엔 유클리드가 없었어. 그는 논외 대상이었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유클리드를 끼워 넣었는데. 그럼 불안함이 조금 사라지지 않겠나?”

    이엘이 노아의 몸을 밀어 눕히더니 그의 가슴팍 위에 양팔을 포갠 채 턱을 괬다. 때마침 불어오는 아침 바람이 창문을 타고 넘어와 그녀의 앞머리를 들춰내자, 동그랗고 귀여운 이마가 드러났다. 노아는 불안함을 뒤로하고 그대로 손을 뻗어 그 작은 이마를 검지로 문지르며 위안을 찾았다.

    “폐하.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응. 무엇이든.”

    “아이를 갖고 싶으십니까?”

    “…….”

    “엘.”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가끔 폐하의 눈에서 그런 걸 느껴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도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긴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냈다.

    “폐하.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무엇을?”

    “제가…… 당신의 행복을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짐은 지금도 행복한걸.”

    “…….”

    “정말이야.”

    하지만 노아가 왜 저 말을 꺼낸 건지 알 것 같았다. 이엘은 그의 단단한 가슴 위에 뺨을 댄 채 눈을 감았다가 떴다.

    흐릿한 시야 끝에 작은 아이가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노아를 닮은 아주 예쁜 남자아이가 저 끝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볼을 수줍게 붉힌 채 서 있었다. 꿈에서 본 나의 예쁜 아이가…….

    “……테오도로.”

    “예?”

    “응, 아이를 갖고 싶어.”

    “…….”

    “아이의 이름은 테오도로 레비 무어 르뷔아.”

    “사내아이를 예상하시는 겁니까?”

    노아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엇이든 좋다. 그녀가 미래를 꿈꿀 만한 흥밋거리면,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는 그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해 결국 몸을 일으켜 앉고는, 단숨에 그녀의 허리를 잡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이엘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고는 입술을 맞부딪쳤다. 다른 손으로는 부드러운 그녀의 살결을 쓸어내리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그러다 여자아이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음, 여자아이의 이름도…… 이미 지었어.”

    단단한 노아의 손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아주 잠깐 붙었던 입술이 떨어지자 이엘이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짓던 노아가 이엘의 귀에 속삭였다.

    “황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엘은 대답 대신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며 입술을 부딪쳤다. 그러곤 밀착하듯 노아의 맨가슴에 상체를 붙이고 그대로 몸을 눌러 다시 그를 침대 위로 눕혀 버렸다. 위에 올라탄 채 고개를 숙이니, 이엘의 검은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노아의 얼굴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베아트리스 나타시아 리카르디스 르뷔아.”

    “좋은 이름입니다.”

    “응.”

    “벌써 테오도로와 베아트리스를 만나고 싶군요.”

    “……응. 테오는 내 눈을 닮아 녹색일 테고, 트리시는 그대를 닮은 새카만 눈동자를 갖고 있지 않을까?”

    “폐하.”

    노아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곤 제 입술에 갖다 댔다.

    “만나게 되실 겁니다.”

    “…….”

    “그러니 폐하께선 지금처럼, 미래를 그리는 꿈만 꾸십시오.”

    아이가 당신이 살고 싶은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면, 제가 어떻게든 당신이 만날 수 있도록 할 테니. 그러니까 부디.

    “미래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 사랑, 나타니엘. 테오도로와 베아트리스를 포기하지 말고. 나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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