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엘은 보고 있던 종이를 뒤집었다. 다음 일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젯밤 일로 골치가 아파진 터라 일정표를 다시 짜고 있던 차였다.
“폐하, 저예요.”
“스완? 들어와.”
스완이 이 시간엔 무슨 일이지? 고개를 기우뚱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눈 밑이 거뭇해진 스완이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올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야, 스완?”
“폐하. 전부 물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알겠어. 다 나가 있거라.”
“근위대장도요.”
“그건 안 됩니다, 폐하.”
하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스완이 이엘에게 해를 가할까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어젯밤 유클리드가 이곳을 습격했던 전적이 있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다른 스라소니 놈들이 방에 숨어들게 되면 방어하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방을 나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전에 궁금해하셨던 제 문제입니다. 폐하께만 드릴 수 있는 말이니, 근위대장도 없는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좋다. 하트 경, 나가 있어.”
“하지만……!”
“괜찮다.”
이엘이 단호하게 고갯짓을 하니 하트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얌전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피곤한 낯의 스완을 소파에 앉히고,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
“…….”
그러나 모두가 나갔는데도 스완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를 위해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티포트를 들어 차를 내려 주었다.
“좀 마실래?”
“폐하, 전…….”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돼. 그때도 말했잖아. 강요할 마음 없어.”
“…….”
“고마워, 스완. 네 종족의 비밀을 내게도 말해 주려 했다는 그 마음만으로도 난 충분해.”
“폐하…….”
스완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이엘을 쳐다보며 무겁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예전엔 자유롭게 물과 뭍을 오가며 살았대요. 주로 호수 같은 데서 살았고, 그때도 저희는 무리 생활을 했다고 들었어요. 처음부터 개체수가 그리 많지 않았거든요. 그때는 인간들이나 다른 이종족들에게도 사냥을 자주 당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안전을 위해 거주하는 곳을 빈번하게 바꿨다고 들었어요.”
“응.”
“그러던 어느 날. 그 근처에 살던 여자아이가 호숫가로 도망쳐 오는 걸 저희 종족 중 두 사람이 발견했고, 그 애를 숨겨 줬다고 해요.”
“…….”
“그 소녀는 나자르였어요.”
그렇다면 아마 같이 살던 마을 사람들이 소녀를 학대했거나, 황실에서 파견 나온 관리들이 학대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엘은 스완의 말에 집중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자르가 연관되어 있었구나. 그렇다면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그렇게 소녀를 구해 주었던 흑조와 백조, 그 두 마리는 나자르 소녀와 친구가 되었어요.”
“…….”
“폐하. 저와 폐하가 했던 영혼을 결속하는 계약 말이에요. 그건 원래 나자르만 가능했던 것, 아셨어요?”
“뭐?”
“저도 자세한 건 잘 몰라요. 지금이랑은 좀 다른 계약이긴 하지만, 어쨌든 원래는 나자르 고유의 영역이었다고 들었어요. 확실한 건 오드 님께 물어봐야 알겠지만요.”
이엘과 스완이 영혼을 하나로 묶는 계약을 하기 위해 필요했던 존재는 나자르였다. 그것도 엄청난 성력을 갖고 있는 고위급 나자르가. 그가 있어야 인간과 백조 사이에 영혼을 묶는 계약이 가능했다.
그러나 스완의 말대로라면 원래는 나자르만 가능했던 모양이다. 그게 모종의 이유로 나자르의 성력하에 인간도 가능하게 된 것 같은데…….
“어쨌든 세 사람은 계약으로 묶이게 됐나 봐요. 다만 그때는 지금 폐하와 저처럼 영혼이 묶인 건 아니었고요.”
“…….”
“그런데 어느 날 그 소녀가 살해를 당하게 돼요.”
“나자르 학살 때를 말하는 거야? 고니의 저주는 그보다 한참 전 아니었어?”
“나자르 학살이 아니에요. 소녀는 자신이 나자르라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숨겼으니까요. 성전에 들어가지 않고 마을에서 평범하게 살았던 모양인데, 그 애가 쓰던 성력을 누군가 보게 되었고 오해를 샀나 봐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네.”
나자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구나.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화풀이로……. 뭐가 됐든 상대는 어린 여자아이였을 텐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약자를 향한 차별과 학대는 여전한 듯해서. 이엘은 한숨을 집어삼키며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계속 얘기해 봐.”
“소녀의 죽음에 분개한 흑조와 백조는 영지민을 모두 죽여 버렸어요.”
“잠깐만! 고니가…… 인간들을 죽였다고? 그게 가능해?”
무려 전쟁 이전의 이야기다. 1차 전쟁도 인간들에게 무력하게 당했던 이종족인데, 하물며 전쟁 이전의 고니가 무슨 수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적지 않은 영지민들을 전부 다 죽이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영지민이라고 했지만 실은 아주 작은 마을일 수도 있고, 전부 다 죽인 것도 아닐 수 있죠.”
“…….”
“어쨌든 이게 선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예요. 고니가 인간을 죽이고 말았다는. 말 그대로 전설인 건지 아니면 정말 실제 있었던 얘기인 건지, 그건 아무도 모르지만요.”
“그래, 알았어. 일단 계속 얘기해.”
“당연히 황실에선 난리가 났고 고니를 말살시키자는 의견이 나왔겠죠. 실제로 엄청난 수의 기사단이 파견되었고요.”
“…….”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책임지기 위해 흑조는 온 힘을 다해 맞서다가 죽게 되었어요. 그리고 살아남은 백조는 종족을 이끌어 다른 곳으로 이주했고요.”
“…….”
“폐하. 사실 저희는 저주를 받은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건…….
“벌을 받은 거예요.”
“스완.”
“동시에 보호를 받게 된 거기도 하구요.”
“…….”
“소녀의 죽음을 알게 된 나자르인들이 저희를 찾아왔어요. 그리고 저희가 뭍으로 나올 수 없게 성력을 사용했어요. 그렇게 저희는 호수에 묶인 거고요.”
“그럼 너희가 사는 호수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것도…….”
“맞아요. 일종의 보호예요. 황실과 관련된 사람을 제외하면 호수 위치를 아는 인간들도 적을 거예요. 이종족은 더 말할 것도 없구요.”
저주……. 보호라고는 해도, 저주는 저주였다. 왜? 단순히 인간들을 죽였기 때문에? 물론 영지민 전체를 죽였다면 문제가 되긴 할 테지. 그때만 하더라도 인간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였고, 나자르는 인간을 위해 성력을 사용하던 종족이었으니까.
그게 황실의 명령인지, 신의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자르는 고니에게 ‘저주’를 걸었다. 그리고 여전히 저주는 풀리지 않았다.
“다만 종족의 힘은 이전보다 강해졌고, 덕분에 먹이사슬에서도 자유로웠다고 해요.”
“…….”
“1차 종족 때는 몸에 심어 놓은 인식표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 말고는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위협당한 적은 없으니까요.”
정말 저주인 동시에 보호였군. 하지만 스완의 말엔 상당한 모순이 존재한다. 특히 겨우 고니 두 마리가 영지 하나를 박살 냈다는 점이 제일 거슬렸다. 고니의 능력은 고작해야 환각을 걸어 도망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스완이 이전에 말했던 적이 있다.
“어떻게 영지민을 전부 죽였다는 거야? 그게 가능해? 설령 능력을 사용한 거라고 해도, 보호석이 있었을 텐데.”
“그래서 저도 그걸 알아보고 싶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냥 전해지는 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부풀려진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
“폐하. 어차피 이곳 다음으로 들를 곳은 러셀 후작의 영지이고, 그보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저희가 사는 호수잖아요.”
“응.”
“러셀 후작의 영지에서 저는 잠시 집에 다녀올게요.”
“알겠어.”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스완!”
자리에서 일어선 스완을 붙잡았다. 며칠 내내 잠도 못 자고 고민한 탓인지, 스완의 눈 밑은 거뭇했고 얼굴은 핼쑥한 상태였다.
“스완.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때도 말했지만 억지로 말할 필요 없어. 네 마음을 괴롭히면서까지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아.”
“아니요. 며칠 생각해 보니까 제가 잘못 판단한 것 같아요.”
“…….”
“아버지가 왜 숨겼을까. 아버지는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걸까.”
“…….”
“어쩌면 알아야 할 타이밍이 지금인 것일 수도 있겠다, 하구요.”
알아야 할 때가 지금인 것일 수도 있죠.
분명 오드는 제게 그렇게 말했다. 그래, 맞아. 알아야 할 타이밍이 지금인 거야. 스완은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이엘을 향해 빙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폐하. 전 폐하의 편이니까요.”
“그런 뜻이 아냐.”
“알아요. 폐하께서 뭘 걱정하시는지도요.”
“…….”
“이상하지 않아요?”
스완의 물음에 이엘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뭔가 엄청난…… 알면 안 되는 비밀들이 있는 것 같아요. 폐하나 저에게요.”
“응.”
“저는 저랑 폐하가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거든요.”
“…….”
“알아 올게요.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계약 기간이 곧 끝나니까.”
처음 스완이 계약 기간을 5년으로 잡았을 때만 하더라도 꽤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어느덧 1년 정도만을 남겨 뒀을 만큼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엘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이 모든 시험의 끝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
“냄새가 역하군.”
“뿌리까지 태우느라 땅을 몇 번이나 갈아엎었습니다.”
“이걸 전부 윌터 남작이 했다는 건가?”
“예, 맞습니다.”
이엘이 불에 타서 거뭇해진 모리아 땅을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을 때, 유클리드는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오드를 쳐다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우논인 자신이 미친 듯이 달려도 이틀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이렇게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니. 나자르의 성력을 가까이서 보고 체험한 건 처음이라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엘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감상을 깼다.
“유클리드 백.”
“예, 폐하.”
“그 일이 있고 모리아 거주민들 대부분이 제도로 들어온 걸로 아는데, 여기 남아 있던 인간들은 대다수가 백작의 광산에서 일하던 자들이 아니던가?”
“예, 맞습니다. 덕분에 저희는 일할 수 있는 자들이 줄어들어 자본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고요, 말씀드렸듯이.”
몇 달 전부터 유클리드의 영지로부터 들어오는 세금이 줄어들어 행정 파악을 위해 보냈던 자들에게 광산이 멈춘 걸 보여 주었다더니. 유클리드는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텅 빈 모리아 땅을 이엘에게 안내했다.
“게다가 남아 있던 자들 중 일부는 윌터 남작이 보낸 세작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럼 지난번에 있었던 마찰로 윌터 남작과는 연락이 아예 끊긴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자는 제가 폐하를 놓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
“제가 다시 연락하기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유클리드로부터 들은 올리세스 윌터의 계획은 이러했다. 그는 현재 이엘을 제외하고 가장 황족에 가까운 피를 갖고 있으며, 그걸 정당화할 만한 병력이나 자본도 꽤 모아 놓은 상태이다. 남은 건 이엘과 성전, 이종족, 인간과의 관계를 무너뜨려 그녀의 위치를 추락시키는 것.
솔직히 허무맹랑한 이야기이며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일차적으로 이엘과 오드, 노아를 비롯한 이종족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쉽게 끊어질 만큼 단순한 우호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이차적으로는 설령 그녀가 황위에서 쫓겨난다고 해도 아무도 그를 황제로 추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균형점이 된 그녀가 사라지면 세상은 다시 혼란이 찾아올 터였다. 그걸 알고 있는 인간들이 올리세스를 반길 리가.
다만…….
“백작 외에도 손을 잡은 자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예. 저는 그걸 뱀으로 보고 있습니다.”
로빈. 그 뱀이 그간 너무 조용히 지낸 게 수상하긴 했다.
“폐하.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왜 로빈이 폐하께 작위를 승격해 달라고 했을까요.”
“…….”
“왜, 소모라 땅을 반환해 달라는 요청을 했겠습니까.”
“그 은밀한 거래의 내용을 백작이 알고 있다는 게 나는 더 놀라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