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
“아직도 날 물러 터진 인간으로 보나 보군.”
탕―! 소음기가 달리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총 소리가 고요했던 침실을 깨웠다. 마치 경고라는 듯 허공을 향해 총을 한 발 발사한 그녀가 다시 해머를 당겨 유클리드의 입 안에 총구를 욱여넣었다.
“그럼 그동안 수고했네, 유클리드 백.”
거침없이 총을 쏘려는 듯한 이엘의 태도에 되레 놀란 건 뒤에 서 있던 하트였다. 정말로 쏘시려나? 물론 저런 놈 하나 사라진다고 문제가 될 건 없겠지만, 의외로 강경한 그녀의 태도가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아아에으이아.”
총구로 입이 막힌 유클리드가 눈을 뜨며 뭔가 중얼거렸다. 이엘은 서늘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총을 빼며 조르고 있던 그의 목에서도 힘을 뺐다.
“뭐라고?”
“말하겠습니다.”
“말해.”
“우선 저를 놔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폐하?”
“…….”
“못 미더우시면 조금처럼 제게 총을 겨누시고 근위대장의 능력으로 제 손발을 묶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
“지금 이 상태로는 제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나의 아름다운 폐하.”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는구나. 살아온 시간이 헛된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이엘도 이번만큼은 쉽게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네가 불편한 게 나와 무슨 관계지?”
“…….”
“말해, 유클리드.”
“…….”
“내가 널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헛소리 집어치우고 말해라.”
금방이라도 총구가 다시 입 안에 욱여넣어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한숨도 자지 못했던 건지 이엘의 눈동자엔 핏발이 선 채였다. 그녀는 새빨개진 눈동자로 유클리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죽이실지도. 뒤에서 지켜보던 하트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무렵이었다.
“폐하를 납치하기 위해서?”
“뭐?”
“약속을 했었거든요.”
“…….”
“폐하를 제가 납치하기로.”
유클리드의 말에 이엘과 하트 모두 정적을 유지했다. 하트는 기가 찬 모양이었고, 이엘은 그가 순순히 대답한 게 의심스러운 듯했다. 각기 다른 두 사람의 반응을 지켜보며 킬킬 웃던 유클리드가 자유로워진 손으로 여태 졸렸던 제 목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근데 제 마음이 바뀌어서요.”
“유클리드.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건가?”
“아직 저지르지 않은 죄를 고백하고 있는 거겠죠?”
“…….”
“제가 무슨 말을 해도 폐하께선 절 믿지 않으실 듯하니, 아예 처음부터 다 털어놓는 거랍니다.”
그제야 이엘이 유클리드의 몸에서 내려왔다. 완전한 자유가 된 유클리드는 얼얼한 목과 입가를 여러 번 문지르다가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더니, 제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하트를 쳐다봤다.
하트는 자신이 이 지경이 될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눈 깜빡임 없이 줄곧 부릅뜬 채였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주인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만 가득해선, 쯧. 그는 속으로 혀를 차곤 하트에게서 시선을 돌려 자신의 황제를 바라봤다.
“하여 제가 이 침실에 들이닥친 이유는, 폐하를 납치.”
“…….”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서?”
“유클리드. 내가 아직도 장난하는 걸로 보이나?”
“폐하. 지난 3년간 폐하의 곁에 머물면서 저를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
“제가 예전처럼 폐하께 무례하고 허튼짓이나 하는 그런 놈이었던가요?”
확실히 3년 전과 확연히 달라지긴 했다. 그때의 가볍고 진중하지 못한 언행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아슬아슬한 선을 쉽게 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신뢰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녀의 무덤덤한 반응에 유클리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간을 좀 봤어요.”
“…….”
“제가 어느 쪽에 줄을 대는 게 현명할지.”
이번 건 발언 수위가 셌다. 금방이라도 하트가 능력을 쓸 것만 같아서, 이엘이 빠르게 손을 들어 뒤에 서 있는 그를 제지했다. 아까부터 유클리드를 응시하느라 하트의 눈에도 핏발이 붉게 서 있었다.
“감히 짐에게 간을 봤다는 말을 하는 건가, 유클리드 백작?”
“이걸로 폐하께서 제 작위를 박탈하시고 제 목을 거두신다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 그대가 간을 봤다던 다른 한쪽은 누구지?”
“윌터 남작입니다.”
역시나……. 역시나 윌터 남작이었다. 얼굴 한번 제대로 본 적 없는 놈이 골치 아프게 설치고 있는 꼴이었다. 이엘은 짧은 한숨을 쉬며 긴장을 조였던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해서 백작은 남작이 아니라 내 손을 잡기로 한 건가? 내가 그대를 죽일지 파면시킬지 모르는데도?”
“그저 그 멍청한 인간의 제안이 고까워서요.”
“백작답군.”
“폐하. 이대로 영지 순회를 계속 진행하실 겁니까? 폐하께서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어느 영지를 가도 위험하다는 것을요. 폐하의 동맹이 아닌 종족이라면 누구나 폐하를 노릴 겁니다. 아아, 동맹인 자들 중에서도 노릴 수도 있고요.”
“…….”
“종족을 넘어선 영원한 동맹 같은 건 없으니까요.”
“윌터 남작이 무슨 거래를 그대에게 건넸는지나 밝혀라.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자고 네 목숨을 살려 준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이엘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하트의 얼굴엔 균열이 생겼다. ……어느 영지를 가도 위험하다고? 감히 근위대와 기사단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어떤 미친놈이 죽고 싶어 달려들겠는가. 단언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근데 하필이면 그 말을 한 게 유클리드라서.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폐하. 만일 모든 사람들이 폐하에게서 등을 돌리면 어떨까요?”
“…….”
“폐하의 동맹마저도 말입니다. 저놈들 하이에나와 독수리, 심지어 오드 님마저!”
유클리드는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극적인 표정을 짓고는 양손을 벌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빙긋 웃었다.
“왜. 백작이 이간질이라도 시키려고?”
“제가 아니라 윌터 남작이요.”
“그자가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지?”
“황위계승권.”
“……기가 막히는군.”
더는 상대할 필요도 없는 내용이다. 황위계승권? 그런 걸 노리고 있었단 말인가? 이엘은 자조하며 제 손가락에 끼워진 에메랄드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나 하나 죽인다고 저가 황위를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멍청해도 여간 멍청한 게 아니다.
“황위계승권이 윌터 남작에게 있다고? 그가 그렇게 얘기하던가?”
“현존하는 귀족 중 황족에 가장 가까운 자는 윌터 백작과 윌터 남작이니까요. 나머지는 전쟁 통에 모두 죽거나 나이가 많아 황위계승권을 갖기엔 어렵지요.”
과거 르뷔 제국의 황가는 굉장히 폐쇄적이었고 황손 자체도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대부분 황자였고, 황녀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 적은 수의 황손들은 아무나와 혼례를 치르지 않았으므로,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한 일정 가문 몇몇과만 결혼했다.
그러니 올리세스 윌터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정말 ‘혈통’ 자체로 후계를 정한다면…… 그가 황위계승권을 갖는 게 어불성설은 아니란 소리였다.
“윌터 남작, 그러니까 올리세스 윌터는 제 아비보다 야망이 있더군요. 제게 직접 거래를 제안해 왔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 섞였던 피를 갖고 황족이라 운운하는 건가?”
“폐하께서 죽으신다면 저가 황족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지금의 제국은 제 1르뷔 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곳이다. 이엘이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게 단순히 그녀가 황녀였기 때문만은 아니란 소리다. 그녀는 이종족과 인간 사이를 조율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고, 무엇보다 오드의 지지를 단단히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현재로선 보호석의 유무가 이종족과 인간 사이의 긴장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데, 그 보호석을 만들고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은 오드뿐이었다. 유일한 나자르인 오드의 지지가 황권을 결정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지지를 받는다는 건 막강한 힘을 등에 업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우습다는 얘기다. 단순히 이엘이 죽는 것만으로 쉽게 황위에 오를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대가 돌아선 이유를 알겠군. 터무니없을 정도로 하찮은 계획이네.”
“과연 그럴까요?”
“…….”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의 인간들은 예전과 달리 불안하고 예민하죠.”
“…….”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이,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폐하의 곁을요.”
이미 미래가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들은 현재의 안전만이 중요할 뿐이다. 유클리드의 말처럼 지금 당장 그녀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면 떠나겠지.
하지만 그럴 걱정은 없다.
“유클리드. 시답잖은 심리전으로 짐을 농락하려는 거라면 그만해라.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해 줄 정도로 멍청하지 않으니까.”
“저도 잘 모릅니다, 깊은 내막은요.”
“…….”
“다만 올리세스 윌터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유클리드의 벽안에 새벽빛이 얼비쳐 더 요요하게 반짝였다. 가뜩이나 소년에 더 가까운 외형이라 음흉한 속내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타입인데, 자신을 저렇게 쳐다보고 있으니 마치 그가 하는 말이 전부 진실인 것처럼 느껴져서. 이엘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무턱대고 습격을 당할 줄은 또 몰랐다. 그것도 유클리드가 제 침실에 찾아들어서 납치를 하려 했다니.
그러나 그 모든 과정들이 참 어설펐고 유클리드답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 보여도, 그는 아주 오랜 시간 스라소니를 완벽하게 이끌었던 노장이다. 인생을 허투루 산 게 아니란 뜻이다.
그런 유클리드가 새벽에 홀로 이곳에 찾아와 자신을 납치하려고 했다? 그것도 침실 안엔 근위대장인 하트가, 침실 밖엔 2기사단장 일라이저를 비롯한 근위대가 끊임없이 경비를 서고 있는 곳을?
“유클리드.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말해.”
“진심을 다한 동맹.”
“…….”
“저는 하이에나도, 성전도 아닌. 폐하, 당신의 동맹이 되고 싶습니다.”
“동맹에 관한 얘기는 건국하기 이전에 마무리되지 않았나?”
“하지만 진심을 다한 동맹은 아니었지요. 게다가 그때의 폐하는 하이에나의 우두머리로서 저희 스라소니와 협상을 하셨던 게 아닙니까?”
“…….”
“저는 제 자신과 폐하, 두 사람 사이의 동맹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어쩐지 이 전쟁의 결말이, 저는 폐하의 낙승으로 끝날 듯하거든요.”
“…….”
“제가 이런 쪽으로는 감이 좋습니다.”
그러면서 또 헤실헤실 웃었다. 이엘은 천연하게 웃는 유클리드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하트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하트 경. 창문과 문을 모두 닫고 커튼도 전부 쳐라.”
“예, 폐하.”
이 상황이 조금 웃겼다. 몇 년 전에 제 제안을 걷어차고 거절했던 그가, 벌써 두 번째 제게 매달리고 있는 이 상황이.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이번에도 제 몫을 단단히 챙겨 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