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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70화 (270/488)
  • 270화

    시모네가 ‘그 애’라고 지칭할 수 있는 존재는 한정적일 텐데. 적어도 하이에나 내에선 없을 것이다.

    ‘네 부탁이어도?’

    ‘네. 저는 물어볼 수 없어요. 그 애만 제게 말할 수 있을 뿐이에요.’

    억지로 쥐어짜 낸 기억의 조각은 거기서 끝이었다. 피시는 다시 다리를 움직여 벽을 타고 내려가면서 머리를 굴렸다. 시모네가 ‘그 애’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를 추측하기 위해.

    시모네는 피시처럼 하이에나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약한 개체였다. 피시가 자신의 강한 능력을 무서워했다면, 시모네는 이종족으로서 능력을 쓰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렇게 꺼리고 도망치다 보니 무리 내에선 외톨이가 되어 버려 이따금 무리를 떠나 다른 종족과 어울리기도 했던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평가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시모네는 처음부터 별난 존재였다. 사고방식이 조금 남달랐다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 어떨 땐 이종족보다 인간에 더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그 애는, 다른 종족에 있는 시모네의 친구인 걸까? 누구……!”

    그 순간이었다. 분명 돌이 박힌 지점에 발을 갖다 댔는데 생각에 빠져 제대로 보지 못했던 건지, 발이 허공에 닿더니 순식간에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크윽!”

    피시는 그 순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저도 모르게 제 몸에 능력을 사용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본능이었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조금 전까지 억누르고 있던 능력을 사용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몸이 떴다. 정확히는 한 손이 묶인 것처럼 허공에 붙잡혔고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였지만.

    “아……!”

    능력이 나가는 곳이 눈이므로 원래대로라면 자기 자신의 몸을 띄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무의식이 한쪽 손에 능력을 걸었고, 정교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발동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눈을 깜빡이거나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면 이 까마득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리라. 피시는 사력을 다해 눈을 부릅뜬 채 허공에 매달린 손을 바라봤다. 그러곤 눈동자를 굴리며 띄워진 몸을 천천히 아래로 낙하하게 만들었다.

    살아야 해. 죽으면 안 돼. 이대로는 죽어선 안 된다. 그 마음 하나가 정말로 자신을 살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떨어지던 피시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그제야 안도하듯 숨이 터졌고 피시는 해방된 제 손으로 재빨리 두 눈을 덮었다. 손바닥이 흥건할 정도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 흐으…….”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약해지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지만 육체의 통증이 이렇게나 견디기 힘들 줄이야. 그 상태로 피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피가 조금이라도 멎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시모네의 존재를. 자신의 친구였지만, 자신은 잘 몰랐던 그를. 계속해서 그와의 추억을 되짚으며 그 안에서 세잔티노와의 연관성을 찾으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정말 믿기지 않게도 그 순간 잊어버렸던 기억 하나를 찾는 것에 성공했다.

    ‘피시. 잘 들어. 괜찮아, 넌 죽지 않을 거야.’

    ‘어, 어떡해……. 어떡해……. 나, 나 때문에 조이, 조이가…… 종족이…… 어머니가…….’

    ‘정신 차려!’

    그때의 충격이 너무 큰 탓에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세잔티노에 도착하자마자 그날의 기억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찾아왔다. 1차 전쟁, 조이나와 함께 이곳으로 끌려왔던 그날의 기억이.

    당시 세잔티노인들은 제 영지를 습격해 하이에나를 닥치는 대로 죽였고, 그중 일부를 잡아 이곳으로 끌고 왔다. 대다수가 암컷이었지만 피시나 시모네와 같은 수컷도 몇 마리 있었다.

    그렇게 끌려온 뒤로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자신을 흔들어 깨운 건 시모네였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도 냉정을 잃지 않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정신 차려, 엘피시오.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엘피시오. 자신이 어미의 배 속에 있을 때, 그가 암컷인 줄 알고 지어 주었다가 수컷임을 알고 바꿔 버렸던 그 이름을 부르며. 시모네는 피시가 그 빼앗긴 이름에 애착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러 그 이름을 외친 것이다. 피시를 정신 차리게 하려고.

    엘피시오! 연달아 들린 이름에, 마침내 피시가 혼몽한 정신을 깨고 시모네와 눈을 마주쳤다. 시모네의 옅은 갈색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자주 울기는 했지만, 지금은 다른 때와 달랐다. 온갖 감정이 담긴 눈동자에 피시가 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리자 시모네가 그를 끌어안았다.

    ‘엘피시오, 미안해.’

    ‘……시몬?’

    ‘너밖에 없어서 그래.’

    ‘…….’

    ‘내 소중한 친구는 너야, 엘피시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고 한 명 더 있어. 너도 아는 사람이야. 기억해야 돼, 알겠지? 그 사람이야. 엘피시오, 기억해! 제발…… 기억해 내야 돼.’

    ‘…….’

    ‘모든 해답은 지하에.’

    그걸 끝으로 시모네의 목이 뎅강 잘려 바닥으로 나뒹굴었던 것 같다.

    아아……. 피시가 짧게 침음하며 땅에 엎드려 몸을 둥글게 만 채 숨을 멈췄다. 이곳에 오니까 이제야 묻고 살았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른다. 왜 나는 그동안 무섭다는 핑계로, 떠올리기 싫다는 이유로, 끔찍하다는 변명으로 이 모든 것을 외면했던 걸까.

    “모든 해답은 지하에……. 지하는, 여기를 말하는 걸까.”

    시모네는 이런 것까지 알고 있었을까. 이곳에 끌려왔던 그 많은 하이에나들 중에서 자신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시모네는 죽기 전, 자신에게 너는 죽지 않을 거란 말을 남겼다. 그건 단순한 위로였을까, 아니면 그가 뭔가를 알고 있었던 걸까.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피시는 피가 멎은 것을 확인하고는 마지막으로 지압하듯 손으로 꾹 눌렀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 하나 없이 온통 깜깜하다. 그는 벽을 짚으며 잔뜩 긴장한 채 안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단지 흙을 짚으며 걸어가고 있을 뿐인데, 왜 손끝에서부터 슬픔이 묻어나는 걸까. 이곳은 마치 누군가의 눈물로 만들어진 곳 같다. 그 슬픔과 서러움이 안쪽으로 갈수록 진해지고 짙어져서 피시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여긴…… 인간들이 만든 공간이 아니었나?”

    피시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바닥과 벽을 만지며 눈을 감았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진 곳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급하게 판 공간 같은데…….

    턱수염 일당이 이곳에 있을 때, 자신은 땅 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 지하가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패티스나 하트의 대화로 언뜻 듣기에는 규모가 작은 영지 하나 정도는 될 것 같았다던데.

    “아아―!”

    소리를 크게 한 번 지르고 그 소리가 퍼지는 정도를 파악하려 했지만 이런 쪽으로는 무지해서 잘 모르겠다. 그저 생각보다 이곳이 깊고, 넓고, 크다는 것 외에는. 인간이 이렇게 큰 공간을 대충 만들었다고……? 마음이 급했나?

    피시는 계속해서 걷기 시작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온갖 냄새가 제 코에 들이쳐서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이곳은 이엘과 뱀의 습격으로 화마에 휩싸였다고 했으니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은데, 그것 외에도 별의별 냄새가 가득했다.

    “사체 냄새도 나고…….”

    내뱉고 보니 사체 특유의 냄새가 미미하게 남아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누가 여기서 죽은 게 아니라면, 그 향이 남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사체가 이곳에 파묻혔다는 얘기일 텐데.

    1차 전쟁 때만 하더라도 이런 땅굴 같은 곳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세잔티노는 다른 곳처럼 지상에 세워진 영지였고 하이에나의 것들을 수탈하기 위해 릴프 강을 이용했으니까. 사실 땅 아래는 인간들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럼 턱수염 일당의 흔적이 아직도 남은 걸까?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얼마나 걸었을까. 입구보다 더 큰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비록 빛 한 점 없어 아무것도 볼 수는 없지만, 이종족의 기민한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 여기가 인간들이 거주하던 곳이겠지.

    피시는 그렇게 또 무작정 걸었다. 해답은 지하에 있다고 했지만, 여전히 시모네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명이 더 있다고 했어.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시모네의 하이에나 친구라면 자신밖에 없지만, 다른 종족까지 합치면 그 수가 꽤 될 터였다. 그중에 피시가 아는 종족만 해도 양손을 넘어간다.

    “근데 내가 어떻게 알아, 누구인지…….”

    게다가 확실한 것도 아닌걸. 이렇게 무작정 세잔티노에 와서 시모네와의 기억을 되짚어 봐도 여기까지가 한계다. 더는 기억나지 않아.

    그나마 자주 거론하던 종족이라면 백조 정도인데……. 백조는 확신할 수 없다. 예전부터 백조와 관련된 것들은 금세 잊혔으니까. 심지어 시모네에게 백조와 관련해, 같은 질문을 몇 번씩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설령 백조가 맞다 해도…… 고니는 만나는 게 쉽지 않아. 저주를 받아서 호수에 묶였는걸. 심지어 그곳이 어딘지도 알지 못한다.

    게다가 정말로 백조와 관련된 것이라면, 오드는 자신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는 스완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게 더 효율적일 텐데……. 피시는 그렇게 정리하며 안쪽으로 더 깊게 걸어갔다.

    “근데 이름이 뭐라고 했지? 시몬의 친구라던 백조의 이름이…….”

    비올레? 아냐. 비슷했는데…… 빈센트? 역시 잘 떠오르질 않는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볼까?”

    그녀의 살벌한 목소리에도 유클리드는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제 하얀 뺨 위에 생긴 자상에서 흐르는 피를 혀로 날름 핥았다.

    그 태연자약한 행동에 이엘이 무릎을 세워 침대 위에 눕혀진 유클리드의 배를 눌렀고, 한 손으로는 그의 목을 거세게 움켜쥐며 더 강하게 위협했다. 그런데도 유클리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컥컥! 숨이 막힌 듯 헛기침을 하면서도, 제 몸에 올라탄 그녀를 황홀하다는 듯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대가 백작 위와 왕위에 꽤 오랜 시간 머물러 있었나 보군. 이제 스라소니들도 슬슬 뿌리를 갈아 치울 때도 된 것 같은데. 너무 고여 있었어.”

    철컥. 해머 당기는 소리와 함께 이마를 누르는 총구에 힘이 실렸는데도 유클리드는 평온해 보였다. 되레 눈까지 감으며 여유를 부려, 뒤에서 대기하던 하트의 분노만 더 커질 뿐이었다. 그는 이엘의 명령 때문에 직접 나서진 못하고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지만, 그녀가 위험에 처한다면 언제든 능력으로 놈의 숨통을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하트는 이미 한 번 스라소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경험이 있었다. 자신이 보호해야 할 이엘을 지키지 못해 하마터면 스라소니에게 그녀를 빼앗길 뻔했던 지난날의 아픔이 상처로 남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날 이후로 능력의 활용도를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했다.

    그러니 이번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그 마음으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침대 위에 눕혀진 유클리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클리드. 끝까지 함구할 생각인가? 왜 내 침실에 숨어들었는지,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면 널 처리하고 다른 스라소니 놈들을 족쳐서 알아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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