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
“피시 님. 그럼 저희는 여기 있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부르십시오.”
“그래, 알겠어.”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피시는 황량해진 땅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세잔티노. 이름만 들어도 손이 떨리던 시절도 있었다.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피시는 손으로 제 가슴께를 지그시 눌러 천천히 심호흡했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괜찮아…….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이나의 죽음 이후로 두 번째 방문이었다. 그러나 세잔티노는 여전히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한 채 버려진 모습 그대로였다. 몇 년 전에 이엘과 함께 턱수염 일당을 소탕하기 위해 왔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여기에 뭐가 있다는 걸까.”
패티스가 일부러 제게 말을 아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 다급한 표정만 봐도. 오드 님이 정말로 어떤 단서도 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어떤 한 지점에서 걸음이 멈췄다.
흙의 모양이 아주 미묘하게 주변과 달랐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새 흙을 퍼서 덮은 것처럼. 아마도 여기가 몇 년 전에 턱수염 일당을 소탕하기 위해 내려갔던 통로의 입구일 것이다. 그 습격 이후로 하이에나들이 입구를 메웠다고 했으니까.
피시는 그때도 땅 아래엔 내려가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하트가 그녀와 함께 내려갔을 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위에서 그녀의 무사 귀환을 기도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 돼. 내가 해내야 해.”
그렇게 다짐했지만 이유 없이 찾아온 떨림을 이겨 낼 도리는 없었다. 지하는, 땅 아래는 가 본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스산하게 느껴지는 걸까. 원인 모를 공포가 자신을 덮쳤다.
그러나 피시는 두려움을 이겨 내며 손을 땅 아래로 향하도록 뻗었다.
“집중해서…….”
하이에나의 능력은 눈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손은 정밀함을 더해 준다던 하트의 말을 떠올렸다. 단계별로 천천히 능력을 배워야 하는 어린 시절을 건너뛴 피시는, 하트를 통해 뒤늦게 급진적으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하트는 피시에게 자신의 방법은 다른 하이에나들과 달리 폭력적이고 폭발적인 공격에 특화되었다며, 완전히 똑같이 따라 하지는 말라고 했다. 내재된 능력의 크기만 놓고 보면 하트보다 피시가 더 강했기 때문에 똑같이 했다가는 모든 게 부서질 거라며.
그래서 피시는 하트가 가르쳐 준 방식에서 힘이 빠지도록, 손의 정밀함에 집중하는 훈련을 주로 했다. 그러나 이렇게 실전에서 사용하는 건 처음이라 벌써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입 안은 퍼석하게 말랐다.
피시는 심호흡 끝에 땅을 바라보던 눈엔 힘을 풀고 손에 온 신경을 쏟았다. 아주 천천히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메워 놓았던 땅이 눈에 띄게 흔들리며 흙바람이 불었다. 작은 돌조각들이 먼저 떠오르고 그 뒤를 이어 흙도 느릿하게 솟아올랐다.
“됐어……! 조, 조금만 더…….”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눈으로 쏠리는 압력을 버티며 어떻게든 힘을 조절해 보려 했지만, 몸속에서 솟아오르는 능력의 증폭을 견디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눈에 힘을 주고 만 것이다.
콰쾅―! 폭발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지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핏발이 섰던 눈동자에 찌릿한 느낌이 들더니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피시 님!”
저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오던 우논 중 하나가 무너지는 바닥과 함께 밑으로 떨어지려던 피시를 공중에 띄웠다. 피시는 하늘에 띄워진 채 밑도 끝도 없이 꺼져 가는 땅바닥을 멍하니 쳐다봤다.
역시 난 구제 불능이야……. 또 실패했다.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 실패를 거듭하는 제 모습이 몸서리치게 끔찍했다. 피시가 아랫입술을 당겨 깨물며 짤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원래는 덮어 놓았던 토양을 조금씩 띄워서 이동시킨 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결국 능력을 조절하지 못해 폭발시키듯 무너뜨리고 말았다.
한편 그를 걱정하며 달려왔던 우논들은 커다란 구멍이 생긴 땅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하늘에 떠올라 있는 피시를 향해 다급히 물었다.
“피시 님. 이곳까지 들어가셔야 하는 겁니까? 찾으시는 게 무엇인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찾겠습니다.”
“아냐. 괜찮아. 어차피 너희가 들어간다고 해도 찾지 못해. 나조차도 그게 뭔지 모르니까.”
우논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패티스가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피시를 따라 세잔티노까지 오기는 했지만, 이 텅 빈 땅에서 뭘 찾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낯이었다. 게다가 저 아래는 패티스의 명령으로 메워 둔 터라 통로가 막혀 있을 텐데.
“날 여기 구멍 아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게 서포트해 줘. 지금처럼 공중에 띄워진 채로 내려갈 거야.”
피시의 말에 그를 띄웠던 우논은 재빨리 제 능력을 세밀하게 조절해, 피시가 구멍 안으로 내려갈 수 있게 도왔다. 그렇게 피시는 밑도 끝도 없이 꺼진 지하를 향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단서는 ‘시모네’ 하나뿐이다. 세잔티노와 시모네. 둘 사이에 접점이라곤 시모네가 세잔티노에 끌려와서 죽었다는 것 말고는 없는데. 하지만 분명 단서가 있을 거야. 내가 놓친.
“할 수 있어. 아니, 해야만 해.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렇게 주문을 외우듯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피시는 계속해서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그러던 와중 허공에 띄워진 제 몸이 멈췄다. 동시에 위에서 대기하던 우논 중 하나가 그를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피시 님! 그 이상은 제가 볼 수 없어, 능력으로 띄워 드릴 수 없습니다!”
“알겠어. 여기서부턴 내가 스스로 할게.”
피시는 벽 곳곳에 튀어나온 돌들을 밟으며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위에서 볼 때도 까마득해 보이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다. 인간들은 이렇게 아래까지 파서 숨어 있었구나…….
그때는 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곳을 습격할 수 있게 허가해 달라는 이엘의 편지 한 장에 설레서 앞뒤 재지 않고 그러라며 답신을 보냈을 뿐이다. 물론 그 이후에 길길이 날뛰는 패티스의 분노를 모조리 받아 내야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이 정말 철없는 왕자였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세잔티노는 자신들의 영지였는데, 그녀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영지 출입을 허가하고 말았으니.
하지만 역시…… 그때로 몇 번을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은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녀의 편지에 똑같이 설레고, 그녀의 요청에 똑같이 허락하겠지. 내 쓸모를 찾아 준 이엘에게, 나는 무엇이든 주고 싶었을 테니까.
“끝이 없네…….”
여전히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아래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바닥에 도착하면 뭔가 알 수 있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감과 함께 불안함도 엄습했다. 패티스의 염려처럼 자신이 이곳을 견딜 수 없을지 모른다는.
세잔티노는 하이에나들에게 있어 최전선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전쟁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지명만 들어도 종족 전체에게 트라우마를 안겨 주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한때는 먼저 이곳을 공습하자는 여론이 들끓기도 했었다. 피시가 기억하기로 그때의 제 종족은 단합이 좋았고, 막강한 능력을 가진 개체가 상당히 많았다. 무엇보다 강하고 든든한 암컷들이 살아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하나뿐인 주군도.
‘누님.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이대로 가면 나중엔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게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당장 세잔티노를 치는 건 어떠십니까. 지금의 저희라면 가능합니다.’
‘패티스. 무슨 소릴 하는 거니?’
‘…….’
‘세잔티노를 쳐서 뭘 얻을 수 있을까, 우리가.’
‘자유요.’
‘자유?’
조이나가 패티스의 목소리에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어머니를 대신해 서류 업무를 보고 있던 그녀가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우리 패티스는 영특한데 가끔씩 눈앞에 있는 이익에 급급해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구나.’
‘하지만……!’
‘세잔티노의 뒤엔 황실이 있단다, 패티스.’
‘…….’
‘그리고 우린 인간들을 이기지 못해.’
그들은 신의 사랑을 받은 종족. 신께서 버린 우리와는 다른 종족이다. 아마 평생을 걸쳐도 우린 그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기고 진다의 개념 같은 게 없었다. 날 때부터 인간을 따르는 역할을 부여받은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이기겠단 생각을 하겠나.
그저 바라기는 조금만 더 평화롭기를. 우리 종족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기를. 지금처럼, 약탈해 가도 좋으니 우리가 자치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영지에 관심 갖지 않기를. 어머니와 조이나는 그런 영주였다.
‘이렇게 억눌려 지내는 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의 것을 다 빼앗아 가는데.’
‘…….’
‘참는 게 능사는 아니잖습니까!’
‘패티스. 예의를 지켜라.’
패티스의 짜증에 하트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러나 정작 조이나는 두 사람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도 패티스의 씩씩거림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세잔티노의 약탈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으니까.
한참 만에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조이나가 기지개를 켜고는 턱을 검지로 문지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패티스를 향해 물었다.
‘어디 그럼, 보호석을 뺏어 볼까?’
‘…….’
‘인간들의 창과 방패가 되어 주는 게 보호석이 아니니. 그것만 처리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그건…… 그래요. 보호석만 처리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은데요?’
‘과연 그럴까?’
‘예?’
패티스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웃고 있는 조이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말처럼 보호석만 어떻게 빼앗으면 이종족인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올 것 같은데……. 그 이후에 찾아올 신의 징벌은 차치하고라도.
‘보호석을 빼앗으면 가능할까, 시몬?’
그녀는 제 동생들이 당황한 것을 외면하곤 소파에 앉아 글을 적던 시모네를 향해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때 조이나의 표정이 얼마나 서늘했는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피시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조이나가 원해서 참고 있었던 게 아니다. 그녀도 그 불합리하고 치졸한 상황에 분노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고 있었던 것이다. 힘만 있었다면, 그래. 정말 보호석을 빼앗을 수만 있다면 승산이 있을지 모른다. 그때의 그녀도 잠깐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피시가 불현듯 이 기억을 떠올리게 된 건 조이나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문을 구한 게 하필 시모네였기 때문이다.
‘시몬. 내가 묻잖니.’
‘아, 아가씨……. 저는 잘 모르겠어요…….’
집무실 한편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시모네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치떴다. 고개를 젓는 그를 향해 조이나가 재차 물었다.
‘정말?’
‘…….’
‘똑똑한 네가 아니라고 한다면 보호석을 탐내지 않을게.’
왜였을까. 왜 조이는 시몬에게 그런 걸 물었지? 그 아이가 똑똑한 건 나도 알지만, 그런 중요한 사안까지 시모네의 의견을 들은 이유가 뭘까.
조이나는 어머니를 닮아 호전적으로 태어났고, 군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똑똑하고 강한 하이에나의 표본 그 자체였다. 어려서부터 특출 났기 때문에 다른 이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모든 걸 해내는 여자였다. 그녀가 도움을 구하는 곳이라고는 오로지 어머니와 연륜 있는 암컷 하이에나들뿐.
그렇게 영지를 꾸려 가는 것을 기가 막히게 잘하던 그녀였는데, 그런 중요한 문제를 왜 시모네에게 물었을까.
그래, 생각해 보니 몇 번씩 시모네의 의견을 물어볼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왜 하필 시모네였을까, 패티스도 아니고.
‘시몬. 시간을 줄까? 물어보고 올래?’
‘……물어봐도 말해 주지 않을 거예요.’
‘…….’
‘그런 중요한 문제는 물어봐도 말해 주지 않아요, 그 애는.’
피시의 회상이 거기에서 멈췄다. 그는 벽을 타고 내려가던 다리를 멈추고 눈을 크게 치떴다.
“그 애? 시몬이 말한 그 애가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