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말을 하다가 말고 뜬금없이 와 보라니. 그러나 르네는 하트와 달리, 무릎을 접고 이엘의 옆에 똑같이 쭈그리고 앉았다.
“자, 화관이야.”
엉성하기 짝이 없는 화관이 제 머리 위에 올라왔다. 잠깐 미간을 찌푸렸던 르네가 화관을 벗어 들고 그것을 가만히 쳐다봤다.
“마음이 어려우면 잊지 않아도 좋아.”
“폐하.”
“물론 힘들고 아픈 기억은 잊는 게 좋지.”
“…….”
“하지만 억지로 잊어버렸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면, 아픔과 슬픔은 배가 되는 것 같으니까.”
지금의 나처럼.
잊어버린 기억들은 전부 행복한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어서. 끔찍한 기억 속에 홀로 두고 온 이온이 너무 가엾고 불쌍해서. 잊는 것만이 온전한 답이 아님을 알았다.
“그냥 르네,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해.”
“…….”
“잊어도 좋고, 잊지 않아도 좋아.”
화관의 모양을 하고는 있지만, 누가 봐도 화관 같지 않은 엉성한 꽃 뭉치를 바라보며 르네는 저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이엘은 고갯짓으로 화관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그건 내 선물이야.”
“감사합니다.”
“음, 예전에 늑대의 영지로 공작이 날 찾아왔었잖아. 그때 공작의 영지에서 핀 야생화를 가져와 내게 주었던 것. 기억하고 있나?”
“예.”
“그것에 대한 내 답례라고 생각해 줘. 조금 부족한 실력이지만.”
이엘의 마지막 말에 르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이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렇게 웃는 건 정말 처음 보는데……. 그를 알고 지낸 지 몇 년인데, 이렇게 시원하게 웃는 모습은 정말 처음 봤다. ……그렇게 엉망이란 말이야? 미간을 찌푸릴 무렵이었다.
“폐하.”
“응?”
“역시 저는 폐하를 포기하지 못하겠습니다.”
“…….”
“저는 폐하가, 나타니엘 당신이 너무도 좋습니다.”
화관을 든 르네가 후련해진 낯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엘은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려 주었다. 지척으로 다가온 그가 조용히 제 이마 위에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졌다.
“나타니엘.”
“응.”
“언젠가 당신께 속죄할 수 있도록, 그것만 허락해 주십시오.”
“속죄? 그런 건……,”
“이전에 당신께서도 저희에게 점자를 알려 주심으로써 속죄를 원하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때의 일을 언급하는 거야? 이엘은 미간을 좁히며 항변하려다 한숨을 내쉬고는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겠어. 대신 그대의 목숨을 걸겠다느니, 전부를 바치겠다느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마. 알고 있지?”
“그건 폐하의 궁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됐어, 내가 뭘 바라. 그보다 얼른 영지로 돌아가 있어. 금방 만나게 될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접었던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여전히 자세를 낮추고 있던 르네가 제 오른손을 잡은 탓이었다.
그는 이엘의 손을 잡아 검지에 끼워진 에메랄드 반지 위에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졌다.
“당신을 살려 주신 신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 부디 저희와 오래 함께해 주십시오, 폐하.”
르네도 노아와 비슷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인간인 그녀는 언젠가 죽을 텐데, 그 뒤의 자신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 벌써부터 두려워서……. 결국 그는 사랑한다는 말은 아껴 두고, 살아 달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예, 폐하. 폐하의 은혜를 입어 풍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성문 밖까지 나와 그녀를 맞이한 유클리드가 시종일관 웃음꽃을 피운 채 아직 보지도 못한 제 영지 곳곳을 자랑했다.
이엘은 깨어나자마자 이곳, 유클리드의 영지까지 쉬지도 않고 달려왔다. 근위대는 그녀의 상태를 고려해 하루만 더 쉬었다 가자고 했지만, 이엘은 더 지체할 수 없다며 여정을 강행했다. 이미 예상치 못한 일로 사흘을 버린 탓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지시대로 2기사단과 늑대들은 일정에 맞춰 유클리드의 영지로 먼저 떠났고, 그들이 말을 잘 돌려 준 덕에 유클리드는 별 의심 없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백작의 영지는 처음인 듯한데…… 듣던 대로 정말 화려하군.”
“가진 게 재물뿐이니까요.”
2차 전쟁 이후의 암흑기에도 유클리드는 제 영지의 광산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새 제국이 건국되었을 때에는 황실보다 더 부유하게 된 것이다.
“그래. 그런데 이상하지? 백작령으로부터 들어오는 세금이 전보다 줄어들었으니 말이야.”
“…….”
“그저 확인차 물었을 뿐이니 오해하지는 말게.”
“거짓을 고한 적은 없습니다, 폐하. 사정이 있었으니까요, 저는 정직하게 영지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정직하다고? 네가 청렴해? 유클리드의 낯짝 두꺼운 대답을 들은 노아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곳을 제도라고 해도 믿겠군. 오히려 제도보다 더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는 관심을 접고 유클리드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백작. 폐하께선 긴 여정으로 곤란하신 듯하니, 우선 성으로 안내해 드리시오.”
“오, 그렇군. 오랜만에 폐하를 뵈니 기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어 정신을 못 차렸군.”
“…….”
“그나저나 폐하. 예정보다 늦으신 듯한데, 오시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가벼운 감기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행렬이 다소 지체됐지. 지금은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네, 백작.”
“예, 알겠습니다.”
유클리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엘의 뒤로 늘어선 엄청난 인원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처음에 듣기론 늑대로 이루어진 1기사단 전원은 제도에 남을 거라고 했었는데, 노아가 왜 여기에 따라왔을까? 그것도 사병인 다른 늑대 놈들까지 이끌고.
……역시 한심하게 실패했나?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된다. 그렇게 대충 생각을 정리한 유클리드가 제 성을 향해 몸을 돌리려던 차였다.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다시 시선을 그녀의 뒤로 돌렸다.
“왜 그러지, 백작?”
“아. 못 보던 자들이 꽤 있는 듯해, 궁금함에 시선이 갔나 봅니다.”
“지난달에 있었던 기사 서임식에서 서임을 받아 정식으로 기사가 된 자들이 2기사단에 상당수 배속되었지.”
이엘은 별것 아닌 듯 이야기하며 유클리드를 지나쳐 성이 있는 쪽으로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앞섰기 때문에 유클리드도 별수 없이 시선을 돌리고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조금 전까지 유클리드의 시선을 받았던 스완은 마른침을 삼키며 2기사단 속으로 더 깊게 파고들어 몸을 숨겼다.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오드는 스완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세요, 스완. 들키지 않았으니까요.”
“오드 님. 제 머리색 검은색 맞죠?”
“예, 그럼요. 성력은 그대로입니다. 저녁에 가져온 약으로 물들이시면 예전처럼 티가 나지 않을 거예요.”
“저 스라소니가 눈치챈 줄 알았어요. 놈은 눈치가 빠르니까요.”
스완과 유클리드는 이전에 서로 마주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경황이 없었던 터라, 유클리드가 스완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당시 유클리드는 이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빴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여유가 생긴 스라소니에게 자신이 백조라는 사실을 들키면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
어쨌든 오드의 말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린 스완은 잔뜩 긴장한 채 인파에 섞여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시야에 작은 등이 들어왔다. 누구보다 작은데, 또 누구보다 커다란 그녀가 당당히 앞에서 걷고 있었다.
‘스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말해 줘. 나에겐 중요해.’
‘그게 왜 중요해요? 나한텐 중요하지 않아. 이엘, 넌 인간이라서 모르겠지만 난 내 종족을 지켜야만 해. 내가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 우리가 또 저주를 받게 되면? 그럼 네가 책임질 거야?’
‘…….’
‘우린 너희 인간들이나 다른 이종족들이랑은 달라.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게 우리들 자신이라고.’
그 말을 했을 때 아차 싶었다. 순간적으로 욱해서, 그동안 잘 제어해 온 감정의 끈이 그 순간 툭 끊어져서. 겉으로 보기에 이엘이 상처를 받은 것 같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시간을 그녀의 곁에서 지내온 자신은 안다.
아니. 그녀의 감정이 그때 제게 전해졌다. 그녀는 제게 미안함을 느꼈고, 동시에 마음이 아픈 듯했다.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그 아픔이 저로 인해서인지, 아니면 그녀가 처한 상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막 깨어난 사람에게 자신이 몹쓸 짓을 했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다. 사과를 해야 했다. 잘못했다고 그녀에게 빌어도 모자란데…….
그러나 우물쭈물거리다가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말았다.
“저기, 오드 님…….”
“네.”
“폐하는 화가 많이 나셨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제가 폐하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까요.”
저 작은 등에 얼마나 무겁고 많은 짐을 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모진 말을 했다. 나쁜 말을 했다. 속상할 말을 했다.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상처만 줬어요.”
“괜찮아요, 스완.”
“…….”
“폐하는 스완의 생각보다 더 강한 사람이랍니다.”
알고 있다. 그녀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고, 얼마나 큰 사람인지. 자신도 알고 있지만…….
늘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정작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자신은 냉정하게 돌아서고 말았다. 그것도 제 종족을 챙겨야 한다는 이유로. 마치 너와 나는 다른 종족이라는 듯이, 매정하게 덧붙이면서까지.
“스완이 말하지 못한다면, 폐하께선 다시는 묻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스완이 내킬 때 폐하와 이야기하도록 해요.”
“……오드 님은 나자르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계신 거죠?”
“네, 알아요.”
고니의 저주. 고니 외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지만 나자르는 알고 있다.
“마침 일정과 동선이 겹치니, 러셀 후작령에서 저는 호수에 잠깐 들렀다가 와야겠어요.”
“내가 함께 갈까요, 스완?”
“아니요. 아버지가 불편해할 거예요.”
“그렇겠죠.”
“아버지에게 물어봐야겠어요. 제게 모든 걸 말하지 않은 것 같거든요.”
저주의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암컷 용의 능력이 자신의 것과 비슷하다거나 하는 것들은 듣지 못했다.
“오드 님. 그것만 말해 주세요. 제가 저주에 관한 내용을 폐하께 말해도 되는 건지.”
“혹시 또다시 종족 전체에 저주가 퍼질까 봐 그런가요?”
“네. 한 개체의 실수로 종족 전체가 피해를 보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으니까요.”
“폐하껜 말해도 괜찮아요. 그녀는 특별한 사람이니까요.”
“…….”
“빈센트에게 물어보세요.”
빈센트는 제 아비의 이름이었다. 단 한 번도 그 이름을 오드 앞에서 꺼낸 적이 없었는데도 오드는 알고 있었다. 역시 나자르를 속일 순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스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역시 아버지는 정말로 제게 다 말하지 않았나 보네요.”
“알아야 할 때가 지금인 것일 수도 있죠.”
그렇게 오드는 빙긋 웃으며 제 곁을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2기사단의 끝 쪽까지 밀려난 스완은 제 뒷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나자르는 어렵다니까.”
그런 혼잣말을 하며 주먹을 쥐었다가 펼쳤다. 순간적으로 스완의 손바닥 위에 새하얀 빛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몸에서 이런 미묘한 빛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처음엔 잘못 본 건가 싶었는데 점점 그 지속 시간도 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는 알고 있니? 이게 뭔지…….”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게 참 많았다. 제 아비는 제게 모든 걸 말해 준 것 같지 않다. 자신이 계약을 맺어 뭍으로 나가게 됐다고 알렸을 때, 크게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모든 게 수상하고 이상하다.
아무래도 아버지를 만나서 확실히 물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