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오드의 물음에 스완이 조잘거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여유를 부리던 것과는 판이하게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그러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모르는데요.”
“그런가요?”
“…….”
“스완. 정말 모르는 거야?”
이엘이 그를 돌아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봤지만 스완은 그녀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스완.”
“종족의 비밀이에요.”
“…….”
“난 폐하가 좋아. 폐하가 좋지만, 내 동족의 비밀까지 말할 순 없어요. 말하면 안 된다고 배우기도 했고요. ……말했다가는 제가 죽을지도 몰라요.”
고니는 저주를 받아 호수에 묶였고 뭍으로는 나올 수 없게 됐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었고, 이엘은 오드로부터 고니가 나자르의 성력 아래 인간과 계약을 맺어 뭍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는 걸 알아냈다.
하지만 여전히 고니가 어떤 저주를 받은 건지는 알지 못한다.
“스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말해 줘. 나에겐 중요해.”
“그게 왜 중요해요? 나한텐 중요하지 않아. 이엘, 넌 인간이라서 모르겠지만 난 내 종족을 지켜야만 해. 내가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 우리가 또 저주를 받게 되면? 그럼 네가 책임질 거야?”
“…….”
“우린 너희 인간들이나 다른 이종족들이랑은 달라.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게 우리들 자신이라고.”
“…….”
“……미안해.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 죄송해요, 폐하.”
마른세수하듯 머리를 쓸어 올린 스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엘은 말없이 그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나야말로 미안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네게 알려 달라고 보챘네.”
“아니에요. 내가 지나쳤어요. 폐하께서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 아는데……. 이기적인 말을 해서 죄송해요.”
이엘은 고개를 끄덕여 다시 한 번 괜찮다고 말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머리 좀 식히고 올게.”
뒤따라 나오려는 오드까지 말리고 막사를 나왔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들을 물리고 이엘은 혼자 오솔길을 걸으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내가 너무 성급했어. 스완과 그 종족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도 잘 모르면서 너무 닦달했구나. 조금 전 스완이 흥분하며 소리칠 때, 미약하게나마 그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는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저주’라는 단어 자체가 가져오는 본질적인 두려움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여자는 제게 스완과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고, 오드는 스완이 특별하다고 했다. 결국 스완에게 열쇠가 쥐여져 있단 소리인데……. 하지만 본인이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말하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때였다. 바스락― 나뭇잎 밟는 소리에 이엘이 재빨리 검을 뽑고 몸을 틀었다. 그러나 검의 끝이 닿을 거리에 나타난 자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르네.”
“따라오지 말라고 하신 것을 듣고도 걱정이 되어 왔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르네는 이엘의 안색을 한참 살피다가 한 걸음 더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폐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냐. 잠깐 머리 좀 식히려고. 그보다 공작이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 거지?”
“오드 님이 절 찾으러 오셨습니다. 폐하께서 위험하시다고요.”
그러고 보니 스완과 용의 능력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 낸 건 르네였다. 당시 제 마음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능력을 파고들기 힘들었을 텐데.
“공은 어떻게 거기서 날 찾아올 수 있었던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곳에 왔을 땐 이미 노아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실패한 뒤였습니다. 오드 님은 능력의 본질이 너무 비슷해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고, 스완은 잘못하면 폐하의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독수리는 이성적이다. 노아나 하이에나들은 광분해 이성을 잃었을 테니. 그중에서 가장 이성적인 르네만이 성공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때마침 그와 접점이 있던 피아노가 매개체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그럼 모두가 실패해서 공작을 데리러 갔던 건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일라이저는? 러셀 후작이었어도 가능했을 텐데.”
“실패했다고 들었습니다.”
별일이네. 가장 이성적이면서 가장 충성적이라 르네보다도 성공할 확률이 높았을 텐데도.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건가? 하긴, 오드도 능력의 본질이 비슷해서 안 된다고 했다니까.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 어?
“잠깐만. 본질이 비슷하다고? 오드가?”
“예. 폐하께 능력을 사용한 자의 본질이 오드 님과 비슷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스완에게서 느껴지는 오드의 분위기, ‘그녀’가 스완의 능력에 스며들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녀의 능력이 오드의 본질과 비슷하다는 것. 세 사람을 엮어 주는 공통의 주제가 있다.
우선 ‘그녀’는 자신을 신의 대리자쯤이라고 소개했지. 거기서부터 추측해 보자.
“고마워, 공작. 나머진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는 걸로……,”
“폐하! 잠시만…… 제게 잠시만 시간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엘이 오드를 만나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지만 르네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보통 때였으면 다음에 얘기하자며 거절했을 텐데. 하필 그가 울었던 걸 본 탓인지 뿌리치지 못했다.
“알겠어. 그럼 좀 걸을까?”
“예.”
레타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어 공허한 땅이었지만 모리아처럼 작물이 나기 힘든 곳은 아니었다. 도리어 숲이 울창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갖 식물들이 자라 있었다. 걸음마다 코로 스며드는 풀 내음에 이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조용히 말꼬를 텄다.
“어릴 때.”
“…….”
“나는 오빠를 정말 많이 좋아했어.”
흐릿했던 기억이 이번 일로 또다시 선명해졌다. 이런 식으로 반복하다 보면 잃어버렸던 기억을 전부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나의 잃어버렸던 기억은 전부 행복했던 기억인 걸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두려워졌다.
어쩌면 나는…… 뭔가 떠올리기 싫은 것들을 방어기제로 봉인해 둔 건 아닌가, 하고.
“이온은 어떤 것보다 늘 나를 우선으로 생각해 주었거든.”
“…….”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이온에게 집착했던 것 같아.”
리카르디스의 죽음은 어린 자신에게 분명 큰 충격이었을 터였다. 의지할 데라곤 그녀와 이온뿐이었으니, 어미의 죽음 이후 자신의 시선이 이온에게로만 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빠는 내게 유일한 내 가족이었거든.”
그녀의 말에 르네는 주먹을 말아 쥐며 한숨을 집어삼켰다. 제게도 비슷한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았다.
“그때 그 피아노. 공작이 날 찾으러 왔을 때, 우리가 함께 봤던 그 피아노 말이야.”
“…….”
“그게 황궁에 딱 한 대 있었던 피아노였거든. 어머니가 론 후작가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부터 사용하던 소중한 피아노였어.”
결혼을 하면서 피아노를 황궁에 들고 왔다고 들었다. 딱히 소리가 좋거나 장인이 만든 악기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 피아노를 아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피아노에 묻은 소중한 추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빠가, 황자가 그 피아노의 주인이 되었는데. 어느 날 선황이, 내 아비란 자가 그곳에 들어와서 피아노를 박살 내려고 했어.”
무서웠다. 광기에 휩싸인 선황의 모습이 늘 자신을 옷장에 가두던 것과 똑같아서. 그래서 어린 황녀는 구석에 몸을 작게 말고 귀를 틀어막은 채 숨을 죽였다. 하지만 이온은 달랐다.
“처음이었어.”
“…….”
“오빠가 아버지에게 대드는 모습을 난 처음 봤어.”
그 작은 소년이 피아노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안 된다고 소리를 쳤다. 그러나 선황은 가차 없었다. 그대로 이온을 들어 피아노로 집어던진 것이다.
“머리가 깨진 것 같았어. 뼈가 부러진 것 같았어.”
“폐하.”
“손으로 때리는 게 차라리 낫겠다란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어떻게 오빠를…… 아이를 그렇게…….”
늘 아름다운 소리만 내던 건반이 악마의 소리라도 된 것처럼 굉음을 내더니 곧 깨지고 부서졌다. 그리고 그 위로 이온의 피가 찌득찌득하게 눌어붙었다.
자신과 똑 닮았지만 자신과는 달리 아비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줄로만 알았던 이온이, 자신과 다를 바 없이 넝마가 된 모습에 어린 황녀는 충격을 받았다. 이온을 아비의 폭력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무차별적인 폭력을 목도하기만 했다.
그리고 제 기억에서 그 부분을 지워 버렸다. ……이런 식으로 나는 기억을 지워 갔나 보구나. 조소하듯 씁쓸하게 웃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내게 시간을 달라고 했는지 알아.”
“…….”
“하필 공작이 마주했던 게 내 어릴 때 모습이라서. 나를 죽여야 했던 2차 전쟁 때가 생각나서 그런 거지?”
제 기억보다 더 어린 모습의 이엘이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르네는 참담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 내가 저렇게 어린아이를 죽였구나. 릴리보다 작은 아이였는데. 내가 저렇게 무구한 아이를 죽였구나. 저렇게……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선황의 자식이란 이유로 죽였구나.
……근데 그 아이는 사실 학대를 받은 아이였구나. 그 아이도 선황을 피해 숨 쉴 곳을 찾던 피해자였구나.
“그때의 난 죽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라. 꿈도 희망도 없었거든.”
“…….”
“비록 이렇게 살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폐하. 전……,”
“르네. 내가 전에 그대에게 그런 말을 했었잖아? 공작이 과거를 잊지 못하면 끝까지 내 곁에 머물 수 없을 거라고.”
“예.”
“사과할게.”
이엘이 몸을 낮추고 쭈그리고 앉아,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그 틈에 우수수 떨어져 있는 꽃들을 한데 모아 엮기 시작했다. 르네는 가만히 그녀의 곁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르네, 잠깐 이쪽으로 와 봐.”
늘 제 후원에서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 꽃을 보다가, 마음에 드는 꽃이 있으면 이엘은 손을 뻗어 옆에서 호위하는 하트의 바지 끝을 잡아당기곤 했다. 그 습관 그대로 그녀는 제 옆에 서 있던 르네의 바지 끝을 잡아 아래로 당겼다.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