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그자’에게 목숨을 쥐여 주었더군요.”
“어쩔 수 없었어요. 대가가 제 목숨이었으니까요.”
“왜 쉽게 포기했나요?”
“포기한 게 아니에요. 저는 이온을 살려야 했어요. 이온이 살아야……!”
“왜 늘 당신의 오빠에게 양보하나요?”
정곡이 찔렸다. 여자의 단 한마디에 이엘은 열었던 입을 도로 다물고 말았다.
“단정하지 마세요. 신께선 당신의 오빠만 보신 게 아니에요.”
“…….”
“신께선 두 사람 모두를 지켜보고 계세요.”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벌어진 건지, 해명해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말이 너무 좋아서. 신께선 내 오빠만 본 게 아니라는 게……. 신께선 나도 지켜보고 계셨다는 게, 참 웃기게도 그 말이 너무 좋아서. 이 나이 먹도록 여전히 나는 사랑에 고팠구나 싶어서.
“나타니엘.”
“네.”
“맞서 싸울 건가요?”
“누구와요?”
“누구든요.”
“…….”
“그게 ‘그자’일 수도 있고, 반란을 꾸미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혹은 당신 자신일 수도 있죠.”
이엘은 괜히 손끝만 만지작거리며 쉽게 답하지 못했다. 이젠 정말 모르겠다. 자신이 뭘 더 할 수 있을지, 뭘 더 해야만 하는 건지. 왜 이런 일이 자꾸만 닥치는 건지……. 이젠 정말 모르겠다.
“모르겠어요.”
“나타니엘.”
“솔직히 말하면 언제나 제 마음은 반반이에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싶은 마음이 반. 이렇게라도 살고 싶은 마음이 반.
이온을 꼭 살릴 필요가 있나 싶은 마음이 반. 이온이 꼭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
‘그’와의 거래 이후로 몇 년이 지났지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마음은 반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온에게 물어볼 수나 있다면 좋을 텐데. 이온의 마음은 어떤 건지 물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타니엘. 간단해요. 왜 고민하죠?”
“하지만…….”
“당신의 어깨엔 과한 짐이 지워져 있군요.”
“…….”
“신 앞에선 솔직해지길 바라요, 나타니엘.”
“…….”
“마치 15년 전에 그 불타는 황궁에서처럼요.”
15년 전에 불타는 황궁에서라면, 2차 전쟁 때를 이르는 말인가? 이엘이 여자에게 더 물어보기 위해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순간적으로 공간이 크게 휘청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런. 나자르가 왔군요.”
맞아. 레타에서 오드와 만나기로 했었지. 시간이 그렇게 흐른 건가?
“게다가 힘이 더 세지고 있어요. 나자르 없이도 여길 들어올 정도로.”
“네?”
“당신의 백조 말이에요.”
“스완이요?”
“그와 목숨이 이어져 있죠? 생각보다 그는 당신을 많이 생각하나 봐요.”
“…….”
“그의 힘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어요. 덕분에 내가 이렇게 스며들 수 있었지만, 또 이번엔 내가 쫓겨나게 되겠군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여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빙긋 미소를 짓더니 이내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봐요, 나타니엘. 날 만나고 싶다면 이런 식으로 백조의 힘을 빌리면 돼요.”
“잠시만요! 당신은 용이잖아요. 백조와 무슨 상관이 있죠? 스완의 힘이 강해져서 날 만날 수 있었다고 했잖아요. 말해 주고 가요.”
“그 전에. 내 능력이 뭔지 알겠나요?”
“꿈.”
“…….”
“꿈으로 만났잖아요. 당신들, 용은 암컷과 수컷의 능력이 다른가요?”
“맞아요. 역시 잘 맞혔네요.”
공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억지로 뭔가가 공간을 깨뜨리고 들어오려는 것 같았다. 아마도 스완이 능력을 써서 본인이 직접 개입하려는 모양이다.
그동안은 이엘과 스완의 목숨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개입하지 못하게 노아나 다른 자들이 말린 모양이지만,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건지 스완이 직접적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백조는 꿈을 사용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왜 스완의 능력을 통해 들어온 거죠?”
“나타니엘. 그에게서 비슷한 누군가가 느껴지지 않나요?”
“…….”
“그가 특별한 거예요, 백조가 아니라.”
……비슷하다. 언젠가부터 스완에게서 오드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그렇게 ‘느껴지기만’ 했기 때문에, 정확히 표현할 순 없었지만……. 그녀의 말을 들으니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저 여자. 용의 암컷에게서도 스완이 느껴진다.
“더 이상은 말해 주기가 나도 곤란하군요.”
“하지만…….”
“시간이 된다면 백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 봐요. 생각보다 알게 되는 것들이 많을 테니.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와자작― 결국 작게 생겼던 균열이 순식간에 퍼지면서 공간이 크게 뒤틀리고 말았다.
“폐하!!”
그리고 저 멀리서부터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스완이 보였다. 이엘은 여자를 놓칠까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벌써 형태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제 손이 그녀에게 닿았을 땐 이미 몸의 절반이 사라진 뒤였다.
“잠깐만요!”
“곧 다시 만나요.”
그 말을 끝으로 겨우 유지하고 있던 공간이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제 몸을 꽉 끌어안았다.
“이엘! 괜찮아?!”
힘을 쓴 탓인지 검은색으로 물들였던 머리가 도로 분홍색으로 돌아온 스완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는 이엘이 뭐에 홀렸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녀의 어깨를 마구 흔들어 댔다.
“정신 차려, 엘!”
“스완? 나 괜찮아.”
“이엘! 이러면 안 돼!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자, 잠깐만……!”
“이엘! 제발 정신 차려! 뺨이라도 쳐야 정신을 차리나? 어떡하지?”
“스완! 난 제정신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이엘 때문에 놀란 건지 안 그래도 커다란 스완의 눈동자가 더 크게 떠졌다.
“지금 멀쩡하다고!”
“어……?”
“르네 경에게 못 들었어? 금방 돌아간다고 했잖아.”
그녀에게 조금 더 물어봤어야 했는데. 여자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확신이 없었다.
“폐, 폐하.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다니까. 그걸 못 참아서!”
“죄, 죄송해요…….”
졸지에 호되게 혼난 스완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서 눈만 껌뻑거렸다. 그사이 두 사람이 있던 공간이 완전히 깨져 사라지더니, 순간적으로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숨이 확 터졌다.
“커헉……!”
“폐하!”
“폐하!”
“엘!”
어수선한 주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하늘이 빙빙 돌고 있었고 누군가 제 입 안으로 물을 밀어 넣고 있었다.
“정신 차려, 엘. 제발…….”
칠흑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애타게 자신을 훑고 있었다. 이엘은 떨리는 손을 뻗어 노아의 뺨에 얹었다.
“괜찮아.”
“엘…….”
“머리가 아파서 그런데 잠깐 부축해 주겠나?”
그녀의 부탁에 노아가 빠르게 이엘을 부축해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엘은 지끈지끈 아픈 관자놀이를 손등으로 꾹꾹 누르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긴 어디지?”
“아직 레타입니다.”
“시간은 얼마나 흘렀고?”
“……사흘입니다.”
수척해진 노아가 힘겹게 답하더니 곧 이엘을 품에 끌어안았다.
“폐하. 제발……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
“무서웠습니다.”
자신을 끌어안은 노아의 단단한 팔에서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이엘은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조용히 팔을 뻗어 그의 등을 그러안는 걸로 대신 답했다.
“금방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걸 못 참았어?”
“그 자식은 누구예요?!”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 놓은 스완이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 이엘은 물끄러미 스완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에 얹었다.
“색이 돌아왔어.”
“능력을 과하게 써서 그런가 봐요.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가 폐하를 만났을 때! 희미하게 있던 놈! 그놈 누구냐니까요?!”
“그러고 보니 나도 네게 물어볼 게 있어. 잠깐 스완을 제외하곤 자리를 비켜 줘. 그리고 오드, 너도 잠깐 남아.”
이엘의 명령에 오드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스완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무슨 일인데요, 폐하?”
“스완. 혹시 아는 용이 있어?”
“용이요? 제가 아는 용이라고는 밀로가 전부인걸요.”
“그럼 암컷 용은 만난 적이 없다는 거지?”
“네, 맞아요.”
그럼 스완이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건 아니란 소리인가? 이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곁에 서 있던 오드에게로 방향을 돌렸다.
“오드. 내게 끝까지 말해 주지 않을 거야?”
“무엇을?”
“내가 모르는 것들 말이야.”
“엘, 우선 진정해. 네가 누굴 만났는지도 우리는 모르는걸.”
“맞아요! 맞다, 그 얘기 중이었지. 폐하. 그놈 누구였냐니까요?!”
“용이었어.”
“네?”
“그것도 여자. 암컷인 용이었다고.”
스완이 입을 쩍 벌렸다. 용의 암컷이 살아 있다는 건 자신도 아는 이야기였지만 진짜로 만날 수 있는 존재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아버지로부터, 아버지는 또 그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선대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진짜로 용의 암컷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꿈으로 만난 거군요? 제 능력과 겹쳐져서?”
“응, 맞아. 그 사람이 그랬어, 네가 강해졌기 때문에 네 능력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고.”
“그래요? 그게 무슨 뜻이지? 우리 능력이랑 비슷하다는 건가?”
역시 스완은 크게 놀라지 않은 듯했다. 전에 노아에게 꿈을 능력으로 사용하는 이종족이 있냐고 물었을 때 그가 없다고 단언했던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스완은……. 이엘은 미간을 좁히며 오드를 쳐다봤다.
“오드. 이제 그만 내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그동안 숨겼던 것들 말이야.”
“숨긴 건 없어, 나의 엘. 네가 물어봤다면 언제든 대답했을 거야. 무엇이든 물어봐.”
“그럼 먼저……. 고니가 특별한 거야, 아니면 스완이 특별한 거야?”
“예? 갑자기 저요……?”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스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온 오드의 대답이 그를 더 놀라게 만들었다.
“스완이 특별한 거야.”
“……네? 오드 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 내가 특별하다고……?”
“…….”
“물론 고니는 모두 특별해.”
“…….”
“그리고 스완은 그중에서도 더 특별하지.”
이엘과 오드의 시선이 모두 제게 닿았다. 스완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죄송하지만 폐하. 제가 저희 무리 중에서 능력이 특출난 편에 속하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특별할 게 없는데요. 뭐, 폐하와 결속을 맺은 것도 특별하긴 하지만요.”
“스완. 당신은 당신의 종족 고니가 왜 호수에 묶이게 된 건지 알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