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수업이 늦게 끝났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어머니.”
“아니야. 우리 귀여운 아가. 이리 오렴.”
작았다. 마지막으로 이온과 눈을 마주하고 대화를 할 때도 저렇게 작았다. 성력으로 억지로 성장시키지 않은, 작지만 살아 있는 아르세니온이 그곳에 있었다.
“이엘. 울었니?”
“…….”
“눈가가 빨개. 왜 울었어? 누가 울렸어? 응? 엘,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뭔가를 말하고 싶어도,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려서 결국 꾹 다물고 말았다. 정말로 정신 연령까지 어려진 모양인 걸까. 이엘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려 애썼지만 결국 아무 소용없게 돼 버렸다.
“나의 엘. 이리 와. 내가 안아 줄게.”
이온이, 그 작은 이온이 자신을 폭 끌어안았을 때. 그녀는 참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오빠의 품에서 목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구원자였다. 지독하게 외롭고 지독하게 괴로울 때마다 어떻게든 자신을 찾아내 안아 주었던 유일한 구원자. 이렇게 작은 품 안에서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이곳에 파묻혀 눈을 가리면 아버지도 자신을 못 찾을 것만 같은, 그런 안도감을 느꼈다.
“이온……. 오빠…….”
“응, 엘. 나 여기 있어. 어디 안 가.”
어머니와 같은 말을 중얼거린 그의 품에서 이엘은 새삼 스완의 능력이 무섭게 느껴졌다. 지독하구나, 정말. 내 감정까지 제어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그의 능력은 무섭고 잔인하다. 그러니 이 능력에 일단 걸려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아마 스완이 작정하고 능력을 사용하면 지금의 몇 배는 더 강력할 것이다. 몇 년 전에 호수에서 당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 스완이 제게 사용한 건 정말 장난 수준인 모양이었다.
“자, 내 아가들. 그렇게 울면 엄마 마음이 아프잖니.”
이때의 우린 정말 평화로웠구나. 우린 정말…… 가족이었구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내 과거는 이토록 행복했었구나.
자신이 늑대들 틈에서 배웠던, 그리고 하이에나들 틈에서 배웠던 가족애가 제 기억 속에 존재했었다. 그저 잊고 살았던 모양이다. 스완은 아마 안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잊어버렸던 기억 속으로 들어왔다. 여긴 내 소실된 기억의 일부였다.
황실 같지 않았다. 마치 평범한 가족처럼 단란하고 화목한 풍경이었다. 어린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품에 안겨 있었고, 어린 이온은 커다란 피아노 앞에 앉아 작은 손을 움직여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따금 그들의 어미는 아들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고 어린 이엘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깨고 싶지 않은 평화가 이곳에 있었다.
“엘, 너도 해 볼래?”
연주를 마친 이온이 그녀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 리카르디스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웃음을 터뜨렸던 어린 이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카르디스는 오빠에게 가 보라며 그녀를 내려 주었고 이온은 엉덩이를 움직여 이엘이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자, 어서 올라와.”
“잘 못 치는데…….”
“괜찮아. 내가 알려 줄게.”
이온의 옆에 나란히 앉아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렸다. 그러나 양손을 쫙 펼쳐도 이온만큼 벌어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이엘은 불안한 듯 이온을 힐끔 봤다가, 다시 리카르디스를 쳐다봤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타니엘. 못해도 좋아. 해 보는 게 중요해, 아가.”
“그치만…….”
“괜찮아! 내가 도와준다니까?”
이온이 이엘의 머리 위에 제 이마를 콩 찧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장난스러운 행동에 이엘은 용기를 얻고 음을 하나하나 누르기 시작했다.
역시나 엉망이었다. 음악엔 언제나 소질이 없었기에, 형편없는 솜씨로 아무렇게나 음을 눌러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엉망진창인 피아노에도 이온과 리카르디스는 비웃지 않았다. 그 대신 이온은 어울리는 코드를 눌러 음을 맞춰 주었고, 리카르디스는 그 자리에서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불렀다.
“봐! 이렇게 하면 되지?”
이온의 칭찬에 이엘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행복했다. 이 기쁨은 누구도 채워 주지 못하는 행복이었다. 제아무리 노아가 사랑을 퍼부어도, 설령 주드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이건 동족에게서, 피로 이어진 가족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 사랑이었으니까.
……이 시간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겠다. 이게 현실이었으면 좋겠어. 다시 시작하고 싶어. 다시, 여기서부터 시작하고 싶어. 어머니와 이온이 있는 이곳으로 돌아와 여기에서 시작하고 싶다. 그 생각을 하며 다시 건반을 누르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을 무렵이었다.
‘그 음이 아닌데.’
부드럽지만 어울리지 않는 장난기 묻은 목소리가 제 귀에 들려왔다.
‘그 박자도 아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제게 장난을 치고 있었나 보다. 이엘은 제 옆에 앉은 이온을 쳐다봤다. 생글생글 웃던 소년의 얼굴이 어느샌가 선이 아름다운 미형의 남자로 변해 있었다.
“르네…….”
“잔소리하지 않을게.”
“…….”
“네가 원하는 대로, 친절히 알려 줄 테니 여기 있지 마.”
“…….”
“미안해. 네 과거를 망쳐서. 네 행복을, 네 소중한 가족을…… 죽여서. 미안하다, 나타니엘.”
르네가 울고 있었다. 이엘은 뻑뻑하게 굳은 목을 돌려 주변을 쳐다봤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는 것 같았던 공간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닥엔 이온이 엎어진 채 쓰러져 있었고 그녀의 어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커다란 피아노 위에 검붉은 피가 찌득찌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나타니엘.”
“…….”
“나의 폐하. 여기 머물지 마십시오.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
“저희에게 돌아와 주십시오, 폐하.”
무섭지 않았고 슬프지 않았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이엘은 무덤덤했다. 주변에 핏물이 진득진득하게 눌어붙어 있어도 그게 제겐 아주 익숙했다. 그녀는 울고 있는 르네를 물끄러미 보다가 피로 얼룩진 피아노에 시선을 박았다.
“르네.”
“……예, 폐하.”
“내가 여기 있고 싶다고 하면. 그러면 경은 어떻게 할래?”
“폐하.”
“여긴…… 여긴 지독할 정도로 행복한 곳이네. 내가 마음껏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위험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아.”
“폐하. 이건 스완의 능력이 아닙니다.”
“알아.”
“…….”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어. 이온이 나올 때부터 뭔가 잘못된 건 느꼈어.”
그런데도 부정하지 않았던 건 정말로 행복했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 내 잃어버린 기억의 일부인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느끼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마 밖은 난리가 났겠지. 스완은 제 능력 안으로 누군가가 침입한 걸 느끼자마자 노아와 하트를 불렀을 테고, 어쩌면 그것 때문에 르네까지 이곳으로 왔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깨우기 위해.
“폐하. 모두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죄송합니다. 이렇게 이기적인 저라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돌아와 주십시오.”
이엘은 손을 뻗어 아직도 흐르고 있는 르네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경이야말로 돌아가.”
“폐하!”
“만나고 돌아갈게.”
“…….”
“날 부른 자를 만나야 돼.”
꿈이다. 매번 꿈으로 만나려고 시도하던 자가 스완의 능력 속으로 스며든 게 틀림없었다. 이엘은 그렇게 판단을 내리곤 르네를 꼭 끌어안았다. 여전히 작은 꼬마의 모습인 터라 끌어안았다기보다는 그에게 파묻혔다는 표현이 옳았지만, 온 힘을 다해 그를 달랬다.
“르네.”
“예, 폐하.”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하지만……,”
“알아. 여긴 누가 봐도 행복한 곳이지만 현실이 아니란 것, 그런 것쯤은 나도 알아.”
그래. 그래서 차라리 죽음이 내게 더 편한 것이다. 내겐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너무 버거우니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라도 살아남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내 의지로 살고 싶었다.
남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엘에게 삶은 그런 양가감정을 느끼는 곳이었다.
“모두에게 걱정 말라고 전해 줘.”
“…….”
“위험한 것 같지는 않아. 괜찮아.”
위험한 쪽을 고르라면 오히려 ‘목소리’와의 만남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 여긴 ‘그’와 만날 때처럼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었지만 그보다는 숨 쉬기가 편했다. 자신만 홀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던 그곳과는 달랐다. 보이진 않지만 곳곳에 생명이 박동하는 게 느껴졌다.
“곧 만나, 르네.”
“……기다리겠습니다.”
눈을 한 번 깜빡하자 르네는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자신 혼자뿐이었다. 이엘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누군지 모를 그 존재를 만나기 위하여 끊임없이 걸었다.
“어서 와요.”
얼마나 걸었는지 모를 정도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건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서야 희뿌연 존재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네 왔다.
“누구시죠?”
“도망치지 않았군요.”
“누군지 물었습니다.”
“나타니엘. 당신은 이런 공간을 찾지 않았나요?”
“…….”
“당신의 오빠를 숨길 수 있는 공간을 찾았잖아요.”
‘목소리’가 자신을 불러내는 그 공간처럼.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공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그곳은 ‘신’의 공간일 거라고.
“신……이십니까?”
“아니요.”
“…….”
“신의 대리자쯤으로 해 두죠.”
나자르……? 그러나 곧이어 그녀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나자르 특유의 은빛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동자가 아니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의 여자.
“나자르가…… 아니신가요?”
“추측에 거의 가까워졌는데. 그새 잊었나 봐요.”
그녀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대충 성년을 막 넘은 듯한 소녀였다. 이엘은 그녀를 관찰하듯 쳐다보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과 함께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용……이군요.”
“맞아요.”
용의 암컷이다. 역시 용의 암컷들은 살아 있었던 거야.
“아주 오랜 시간 당신을 부르고 찾았는데, 당신 주변에 있는 지독한 독기 때문에 접촉이 쉽지 않더군요.”
“독기라면…….”
“네, 목소리요. ‘그자’요.”
“…….”
“하지만 아주 좋은 사람을 곁에 두었어요. 다행히 그의 능력에 스며들어서 이렇게 만났네요.”
“스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는 좋은 이종족이에요. 아, 내가 말하는 좋은 이종족이란 건 착하다는 의미가 아니랍니다.”
후후,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엘을 향해 팔을 펼쳤다. 그러자 제 뒤에 커다란 의자가 나타났고, 돌풍이 불어와 자신을 밀쳐 내 의자에 앉게끔 만들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이엘이 굳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물었다.
“왜 저를 오랜 시간 찾으셨던 건가요?”
“당신을 살리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