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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64화 (264/488)
  • 264화

    *

    “폐하. 레타입니다.”

    “저기가 레타…….”

    이엘이 하트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저 멀리 버려진 땅을 쳐다보았다. 제 1르뷔 제국은 인간들에게 살기 좋은 나라였지만, 모든 인간에게 평등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종족에 비해 나았을 뿐. 특히 모리아와 레타는 버려졌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정도였다.

    황녀였던 이엘에겐 루시우스 러셀이라는 좋은 검술 스승과 함께, 그녀에게 바깥세상 이야기를 해 주던 스승이 또 한 명 있었다. 그는 출신지를 숨겼던 터라 끝내 처형당하고 말았지만, 죽기 전까지 이엘이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출신지가 모리아였다. 그래서 이엘은 제국을 건국하기 전, 늑대들과 함께 스승의 고향이었던 모리아에 들러 그곳의 거주민들을 살폈던 것이다.

    그러나 모리아와 비슷한 곳이었던 레타는 찾지 않았다. 표면적 이유는 모리아엔 인간들이 여전히 살고 있었지만 레타는 아니었기 때문에.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경에게 얘기한 적이 있나? 짐은 레타를 싫어해.”

    “…….”

    “선황만큼이나 무섭고 잔인했거든.”

    루시우스가 이끄는 기사단이 자신을 구하러 오기 전. 이엘은 유모와 함께 레타에서 도망친 도적들과 마주쳤다. 그들이 유모에게 얼마나 잔악무도한 짓을 했는지…… 어렸던 황녀는 모든 것을 지켜보며 두려움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마치 세잔티노에 함께 끌려갔다가 홀로 살아 돌아온 피시처럼.

    “모리아는 짐에게 애틋한 곳이 되었지만, 레타는 여전히 혐오스럽다.”

    “폐하께서 짓밟으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야.”

    언제나 이런 쪽으로는 적극적인 하트 때문에 잠깐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이미 황폐해진 땅을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레타는 모리아에서 빠져나온 자들이 살기 시작한 지역이라, 두 지역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독특한 억양과 사투리 같은 것들이 특히 그랬다. 그래서 과거에 이엘이 턱수염 일당들에게 레타 출신이라고 속이는 게 가능했던 이유도, 제 스승에게서 배운 모리아의 억양 덕분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레타와 모리아는 과거엔 비슷한 게 많았을지 몰라도 지금에 와선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레타 출신들은 거의 사라졌고 모리아 출신들은 제도에 들어와 조금은 편한 삶을 살게 됐으니까.

    아냐.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자. 이엘은 더는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아 눈가를 꾹꾹 누르며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오드와 약속한 날짜에 잘 맞췄네.”

    “그럼 야영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날이 밝는 대로 2기사단의 부단장과 늑대들은 유클리드의 영지로 먼저 가서 전언을 전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제 2기사단과 노아를 비롯한 늑대들까지 합류한 터라 제도를 떠날 때에 비해 인원이 확 늘어난 상태였다. 처음 브라가 산맥에서 야영할 때에 비해 많아진 막사를 쳐다보던 이엘이 품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레타를 거쳐 다음으로 갈 곳은 유클리드의 영지였다. 모두 그녀가 그곳에 가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엘은 그곳에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그래서 안전을 위해 이곳에서 오드와 합류하기로 한 것이다.

    “폐하! 잠깐 여기로 오세요!”

    어떻게 하면 유클리드의 속셈을 알아낼 수 있을까, 그 생각에 잠긴 그녀를 스완이 깨웠다. 모두가 진을 치고 있을 때 중앙에 피워 둔 모닥불 앞에 앉은 스완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스완?”

    “어차피 제가 껴 봤자 걸리적거린다고 비키란 소리밖에 안 하니까요. 알아서 자리 피한 거예요. 폐하도 여기 오셔서 잠깐 몸 좀 녹이세요.”

    스완이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제 옆자리에 깔아 주었다. 그러곤 그녀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조금 더 옆으로 이동해 앉았다. 이엘은 아직 막사를 치고 정리를 하느라 바쁜 주변을 한번 확인하고는 스완의 로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폐하. 잠깐 눈 붙이실래요? 아니면 제가 능력이라도 써 드릴까요?”

    “능력?”

    “네. 어차피 여긴 안전하잖아요. 다 정리될 때까지 제가 능력으로 좀 편하게 해 드릴게요.”

    “어떻게……?”

    “저를 봐 주세요. 혹시 가고 싶은 곳이나 보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해 주시고요.”

    그동안 스완의 능력을 타인에게 환각을 걸어 함정에 빠뜨리는 용도로만 봐 온 탓인지, 그녀는 그의 제안이 딱히 내키지 않았다. 떨떠름한 듯한 모습에 스완은 자신 있게 제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

    “믿어 보셔도 된다니까요? 제가 설마 폐하께 허튼짓을 하겠어요?”

    “알겠어……. 음, 그냥 눈만 쳐다보면 되는 거야?”

    “네.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아니면 보고 싶은 거라든가.”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하지만 보고 싶은 건 있었다.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볼 수 있어?”

    “기억하지 못하는 거요? 잊어버리신 게 있어요?”

    “비슷하긴 한데, 어릴 때 기억인데 흐릿해서. 혹시 잊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가능할까?”

    “글쎄요. 그건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안 될 것 같은데요.”

    “…….”

    “제 환각은 기본적으로 당하는 대상의 기억을 기반으로 걸어요. 가령 제가 폐하께 제 아버지의 얼굴을 환각으로 걸고 싶어도, 폐하께서 제 아버지를 보신 적이 없으니 그건 불가능하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반면에 네가 내게 내 아버지의 얼굴을 환각으로 보여 준다면, 너는 내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 아비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능력이 통한다는 얘기지?”

    “맞아요. 뭐, 제가 직접 환각에 들어가서 나타나는 건 또 가능하지만요. 예전에 일라이저 놈에게 능력을 썼던 것처럼.”

    어쨌든 스완과 함께 환각에서 뛰노는 게 아니라면 결국 제 기억이 존재하는 것들만 능력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럼 이따금 꿈에서 보는 그 사람은 환각으로도 느끼지 못하겠구나. 내가 얼굴을 모르니까. 이엘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다가 스완을 쳐다봤다.

    “……난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어머니요? 선황후?”

    “응.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아. 그냥 얼굴만 보고 싶어.”

    어차피 백조의 능력으로 만나는 제 어머니의 모습은 껍데기만 그녀일 뿐, 알맹이는 스완이 만든 허상이다. 그러니 그녀와 뭔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얼굴만 보고 싶었다.

    “그리고 네가 개입하지는 마. 그냥 내 기억속의 어머니와 눈만 마주치고 싶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스완은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조금씩 힘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이엘은 순식간에 능력으로 빨려 들어갔다.

    *

    기분이 이상했다. 스완을 잡기 위해 고니가 사는 호수에 갔을 때 당했던 능력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확실히 그때의 스완은 날 공격할 목적으로 능력을 썼던 거구나. 지금은 마치 고요한 들판에 누워 있는 것처럼 잔잔하고 편안한 느낌만 들었다.

    “이엘.”

    이 목소리는…….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개입하지 말라고 했으니 스완이 그녀인 척 말을 걸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저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인 걸까.

    “엘. 내 귀여운 아가. 이리 오렴.”

    그녀를 향해 걷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속도가 느렸다. 뿐만 아니라 보폭도 좁았고 심지어 숨도 벅찼다. 이엘은 걸음을 멈추고 제 손을 눈앞에 갖다 댔다.

    “작아…….”

    아. 어릴 때의 모습이구나. 이건 흐릿한 기억 중 일부인 걸까? 이엘은 어머니에게 걸어가고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 자리에 서서 멀뚱멀뚱 작아진 제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위로 둥실 떠올랐다.

    “귀여운 내 아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니, 나타니엘?”

    “어머니……?”

    “응, 그래. 나타니엘, 내 소중한 아가. 엄마가 여기 있어.”

    제 볼에 그녀의 보드라운 뺨이 닿았다. 예쁜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뺨을 마구 비볐다. 그와 동시에 이엘의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엄마!”

    아― 내가 정말 아이라도 된 모양인가. 믿기지 않게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정신 연령까지 어려진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동안 억눌렀던 것들이 터져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쨌든 펑펑 울기 시작한 이엘을, 그녀의 어미 리카르디스는 몸을 흔들흔들 움직이며 달래기 시작했다.

    “나타니엘. 그렇게 무서웠니?”

    “어, 엄마…… 엄마가 없어서 무서웠어요…….”

    “내 아가. 엄마는 절대 우리 나타니엘과 아르세니온을 떠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포근했다. 이렇게 따뜻한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언젠가부터 마음을 놓고 산 적이 없던 이엘이 그녀의 따뜻한 품에서 차차 안정을 찾아갔다. 딸을 다독이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준 리카르디스는 부드럽게 이엘을 불렀다.

    “나타니엘.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니?”

    “네?”

    “뭐라고 하셨길래 우리 아가가 이렇게 무서웠을까?”

    “…….”

    “아가야. 폐하는 우리 아가들을 사랑하신단다. 응? 그러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그녀의 말에 이엘은 냉정을 찾았다. 그러곤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을 똑 떨어뜨리며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타니엘. 왜 그러니? 엄마 얼굴에 뭐가 묻었어?”

    병색이 완연했다. 이미 병이 상당히 진행된 것 같았다. 정말 오늘 밤에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처럼.

    왜지? 무슨 병이었지? 얼마나 심한 병이었길래 이렇게 될 때까지 손도 대지 못한 거야. 성전에 나자르인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텐데……. 그만큼 성전과도 상당히 틀어졌다는 건가?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는 선황과는 달리 성전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될 때까지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몰랐던 걸까. 그게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간 걸까.

    “나타니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응? 엄마에게도 말해 주렴.”

    “엄마. 어디 아파요?”

    “…….”

    “여기가 파란색이야.”

    이엘이 검지로 리카르디스의 눈 밑을 가리키며 중얼거리자,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피곤해서 그래. 잠을 많이 못 잤단다. 우리 아가는 엄마랑 달리 잘 자서 다행이네.”

    제 뺨에 입술을 쪽쪽 붙였다가 떨어진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안고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하얗기만 하던 주변이 점점 색채를 가진 익숙한 배경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배경이 완전한 색을 되찾았을 때, 두 사람은 피아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곧 올 때가 됐는데.”

    자신을 바닥에 내려 준 리카르디스는 시간을 확인하려는 듯 창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누가 온다는 거지? 이엘은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가 제 키의 두 배만 한 피아노를 올려봤다. 이 피아노가 이렇게 컸었구나, 그런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어머니!”

    “아르세니온!”

    등 뒤에서 들려온 그리운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자신과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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