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내뱉는 단어에 힘이 실려 저도 모르게 발음이 뭉개졌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대화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는데, 마치 처음 그녀를 마주했을 때처럼 뭉개진 발음으로 엉성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게 궁금한 것인가?”
이엘은 그가 자신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고심 끝에 던진 주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끌어 산책을 이어 갔다.
“음, 글쎄. 나는 잘 몰라. 선황에게 듣기는 했는데, 누구인지는 잘 모르네.”
“……그렇습니까.”
“아마도 대단한 귀족의 영식이었겠지? 아아, 영식이 아닐 수도 있겠군. 나를 팔아 치우려던 선황이라면 귀족의 후처였을 수도 있겠어.”
씁쓸한 그녀의 대답에 일라이저가 손을 말아 쥐었다.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며 갈등하고 있다. 아니라고. 내가 당신의 약혼자였다고. 내가 당신의…….
“뭐가 됐든 약혼자는 싫어.”
“…….”
“거기엔 내 의지가 하나도 들어 있질 않잖아.”
……내가 당신의.
“나는 지금이 좋아. 내가 선택했어, 노아는.”
“…….”
“그를 만날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해.”
“…….”
“과거의 황녀였다면, 이종족이고 기사였을 그를 절대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당신의……,
“그러니 부군을 들이는 일도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할 것이다.”
“무엇이든 지시하실 것이 있으시면.”
“…….”
“저를 부르십시오, 폐하.”
저는 당신의 영원한 기사입니다.
“일라이저.”
일라이저가 걷던 걸음을 멈추고 이엘의 앞에 섰다. 그러곤 그녀의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댔다. 마치 순결한 기사 의식을 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게 무엇이든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러셀 후작.”
“저는 당신의 첫 번째 그림자입니다.”
저는 그림자입니다. 영원히 당신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으면서, 동시에 영원히 당신을 만질 수도 없는.
“폐하께서 시키시는 일이 무엇이든, 목숨을 걸고 이행할 것입니다.”
“후작.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은 아니야.”
“제가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주한 일라이저의 눈동자가 어쩐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해서. 이엘은 더 이상 그러지 말라며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일라이저는 제 손을 놓아 주었다.
“폐하.”
“응?”
“어리석고 모자란 제가…… 감히 폐하의 은혜를 입어, 한 가지 청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응.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 그대가 원하면 들어줄게.”
이엘이 활짝 웃으며 조금 전의 그의 맹세에 대꾸하듯 답했다.
“아기 님이 태어나시면.”
“…….”
“제가 아기 님의 후견인이 되고 싶습니다.”
“대부……를 말하는 건가?”
“그렇게 큰 의미는 아니지만, 제가 아기 님을 지키고 싶습니다. 후견인이 되었든 기사가 되었든.”
아기. 그래…… 얼마나 예쁠까. 까르르 웃는 아기의 웃음소리를 자신도 들어 보고 싶었다. 자신과 이어진 핏줄을 갖고 싶어서, 어떤 때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던 적도 있었다. 저를 닮은 아이가 꿈에서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제 배를 쓸어 보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후작이 내 아이의 대부가 되어 주게.”
“가문의 영광입니다, 폐하.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그대의 말처럼 후작은 나의 첫 번째 그림자가 아닌가.”
황실에 묶인 그녀를 위해 움직이는 그림자는 총 세 집단이었다. 첫 번째는 일라이저였고, 두 번째는 노아와 스완을 필두로 한 늑대 일부. 그리고 세 번째가 패티스였다.
그러니 그녀가 지금 말한 의미는 글자 그대로 첫 번째 그림자라는 뜻이겠지만…….
“나의 그림자로서 함께해 줘서 고마워, 일라이저.”
“……영광일 뿐입니다.”
“그대가 있어 줘서 든든해.”
“…….”
“앞으로도 그림자로, 힘들겠지만 부탁해.”
“예, 폐하.”
일라이저에겐, 영원히 넌 그림자밖에 안 된다는…… 그런 사형선고처럼 들려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
황궁의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패티스는 무례하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자를 무뚝뚝하게 맞아 주었다.
“어서 와, 피시.”
“폐하는? 폐하께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쯧. 사색이 된 피시의 얼굴을 보니 혀 차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패티스는 새하얗게 질린 채 금방이라도 그녀가 있는 늑대의 영지로 달려갈 것 같은 제 형을 집무실 안으로 끌어당기고 문을 닫았다.
“진정해, 피시.”
“지금 진정이 되게 생겼어?”
패티스가 제도로 떠나면서 하이에나의 영지는 피시가 임시로 맡게 되었다. 그런 정신없는 상황에서 이엘이 영지 시찰을 위해 제도를 벗어나자마자 그녀의 뒤에 미행이 붙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뒤따라가고 싶었으나 그에겐 하이에나의 영지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떠날 수 없었다. 다름 아닌 패티스가 제게 맡긴 임무였으니까.
그래서 피시는 제 영지에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부디 폐하께서 안전하시기를……. 아무 일 없으시기를.
하지만 나쁜 일은 거듭해서 몰려왔다. 그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내기도 전에, 이번엔 패티스가 지키는 제도가 습격당했다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럼 네가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는데.”
“…….”
하지만 패티스는 냉철했다.
“폐하가 계신 곳에 가면. 넌 거기서 뭘 할 수 있냐고.”
그의 말에 피시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패티스는 피시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걸 세잔티노로 보낸다고 해도 뭘 알아낼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일단 제도로 불러오기는 했는데,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패티. 진정할게.”
한참 만에 흥분을 가라앉힌 피시가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도 패티스는 지끈지끈 아픈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생각을 정리 중이었다.
“날 제도로 불렀다는 건…… 내가 할 일이 따로 있다는 소리지?”
“그래. 맞아. 잘 이해했네. 오드 님이 네가 적격이라고 하셨어.”
“뭘 해야 하는지 알려 줘. 할게. 근데 그 전에 폐하께서 안전하신지, 그것부터 확인하고 싶어.”
“오드 님께서 직접 연락을 취해, 폐하의 안전을 확인하셨어. 폐하께선 무사히 늑대의 영지에 도착하셨고 곧 레타로 출발하실 거다. 거기서 오드 님이 합류할 거고.”
“다행이다.”
피시가 안도의 숨을 돌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는 내내 얼마나 손이 떨렸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녀가 안전하다니 다행이다.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피시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래……. 괜찮아. 그녀가 힘겹게 만들어 놓은 제도 역시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그걸로 됐다. 이엘이 이곳을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만일 제도가 습격으로 무너졌다면 그녀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걸 보고 참담함을 느꼈을 테니까.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된 건지, 피시가 심호흡을 길게 한 번 하고는 패티스를 향해 물었다.
“내가 할 일이란 게 뭐야?”
“그보다.”
“응?”
“…….”
패티스가 자신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다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왜 저러는 걸까? 자신이 한심한 짓을 할 때나 나오던 반응을 오랜만에 봐서인지, 피시는 또다시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제 동생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세잔티노에 다녀와.”
“세, 세잔티노? 거긴 왜?”
“싫어?”
“아니. 싫지 않아! 다녀올게.”
세잔티노라면 치를 떨며 싫어하던 패티스가 제 앞에서 그 지명을 꺼내다니……. 세잔티노에 심각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설마 저번처럼 인간들이 그곳에 숨어 살고 있다든가 하는 건 아니겠지. 피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거기서 뭘 좀 알아 와.”
“뭔데?”
“뭔지는 모르겠어. 그냥 샅샅이 뒤져.”
“…….”
“그리고 네 친구 놈.”
“내 친구?”
“그 빌어먹을 놈.”
아. 누굴 지칭하는지 알겠다. 자신에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시모네……?”
“그래, 그 자식.”
“갑자기 시모네는 왜?”
“혹시 그놈이 세잔티노와 관련해서 뭔가를 했었어?”
“시모네랑 세잔티노? 아니. 나는 처음 듣는 소리야.”
그럼 대체 왜 놈의 이야기와 세잔티노를 같이 꺼낸 거지? 대체 거기서 우리가 뭘 놓쳤다는 거야. 여전히 난해한 오드의 과제에 패티스는 골머리를 앓았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해 봤지만 소득이 없었다. 남은 건 직접 현장에서 찾는 것밖에는 없는데.
문제는 그곳으로 갈 사람이 하필 피시라는 점이었다.
“정말 알고 있는 게 없어? 놈이 살아 있을 때 세잔티노를 언급한 적도 없고?”
“응. 내 기억엔 없어.”
“그럼 죽을 때랑 관련이 있나. 놈도 거기서 죽었으니까.”
“패티스. 무슨 일인데. 시몬이 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제국 내의 비화가 있는 것 같아.”
“제국이라면…….”
“제 1르뷔 제국.”
제 1르뷔 제국은 이미 망했고 사라진 나라였다. 이름만 물려받았을 뿐, 지금의 제국은 이전과 전혀 다르다. 그런 망국의 과거가 이 상황에 왜 필요하겠는가. 그것도 다름 아닌 패티스에게.
그러니 이건…….
“폐하와 관련된 거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
“그걸 몰라서 이러는 거야. 오드 님이 내게 말해 준 건데 그 이상은 몰라.”
“알겠어. 다녀올게.”
“괜찮겠어?”
“응. 못 미더우면 다른 우논도 붙여 줘. 함께 다녀올게.”
“그게 아니라.”
피시의 말을 잘라먹은 패티스가 일순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숨과 함께 제 이마를 짚으며 입을 닫았다. 피시는 또 그가 자신을 비난하고 한심하게 볼까, 마른침을 삼키며 둘러댈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모자라니까 걱정이 되는 모양인가 본데, 유능한 우논 몇 마리와 함께 간다면 적어도 실수는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이엘과 관련된 일인데 그르칠 순 없다.
그녀와 관련된 이상, 자신에겐 사활이 달린 문제와 다름없었다. 패티스와 오드가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해낼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네가 괜찮겠냐고.”
“어?”
“전에 하트와 함께 갔을 땐 네가 폐하를 걱정하느라 못 느꼈겠지만, 지금은 세잔티노를 전부 다 뒤져야 돼, 어쩌면 너 혼자. 괜찮겠어?”
“아…….”
“무섭거나 싫으면 말해. 억지로 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 패티스가 날 걱정하는 걸까? 피시는 큰 눈을 깜빡거리며 제 동생을 빤히 쳐다봤다. 자신의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에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적거리기까지 했다.
“왜 대답이 없어? 싫어?”
“아, 아냐! 괜찮아! 정말로 할 수 있어. 안 무서워.”
“난 제도를 지켜야 해. 오드 님이 성전을 비웠다는 게 알려지면 안 되니까. 그런 피치 못할 이유로 널 보내는 거지만, 막중한 임무 따위를 네게 주는 건 아냐.”
“응, 알아.”
“그렇게 큰 기대도 안 하고.”
“…….”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그때 생각이 나면. 조이나 생각이 조금이라도 난다면 돌아와.”
그녀의 죽음이 누구에게나 슬픈 건 당연했지만 그 슬픔의 크기는 피시가 가장 클 터였다. 하지만 그걸 차치하고도, 세잔티노는 피시에게 끔찍한 곳이었다. 죽다 살아난 곳이니까. 조이나가 갈기갈기 찢겨져 죽는 것을 목격하고 조롱당하듯 혼자만 살아남은 게 피시였으니까.
“알겠어. 조이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포기하고 돌아올게.”
“그래.”
“하지만 네가 내게 맡긴 두 번째 일이야.”
“…….”
“첫 번째는 폐하의 미끼가 되라는 거였고 난 그걸 수행하는 중이야.”
오히려 제 생각보다 더 잘해 내고 있었다. 물론 그것에 관해 일일이 칭찬하거나 조언해 주지는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패티스는 어떤 긍정의 표시도 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피시를 쳐다봤다.
그 순간 피시의 얼굴엔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니까 두 번째 일도 해낼게.”
“…….”
“폐하와 관련된 일이라서 해내고 싶은 것도 있지만, 패티 네가 내게 준 일이니까.”
패티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순수한 제 형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게 되는 것만 같아서. 저 눈이, 자신을 닮았지만 닮지 않은 저 눈이 싫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저 눈동자를 좋아했다. 어떤 시기심도, 욕심도 없는 무구한 눈동자가 자신에게 올곧게 닿았을 때. 그는 큰 위로를 받았다. 모두의 인정과 사랑이 당연하게 조이나에게만 향했을 때 유일하게 자신을 바라봐 준 혈육이었다.
“그러니까 반드시 해낼게. 조금만 기다려 줘.”
“……그래. 조심히 다녀와.”
지켜야 할 게 늘어난 것 같아, 패티스는 피로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