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알겠습니다.”
결국 오드와의 대화를 끊고 돌아섰다. 원래 저가 지휘하던 현장으로 돌아가면서도 패티스는 갑갑한 속을 어쩌지 못하고 깊은 한숨만 연이어 쉴 뿐이었다.
……정말 피시를 보내도 될까? 그곳은…….
그곳은 피시가 살아 돌아온 곳인데. 끌려간 모든 동족들이 눈앞에서 처참하게 도륙되는 것을 목도하고, 혼자만 살아 돌아온 게 피시인데……. 패티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웃기지도 않는군. 꼴에 피붙이라고……. 내가 그딴 연약하고 모자란 것을 신경 쓰고 있다니…….
“미치겠군…….”
걷던 걸음을 멈춰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시끄러운 접전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고, 하늘엔 성전기사단이 방어를 위해 쳐 둔 불투명한 결계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불투명한 막이 일렁이며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패티.’
‘왜?’
‘그냥. 소중한 내 동생이니까 불러 봤어, 헤헤.’
한날한시에 태어난 네쌍둥이 중에 머리가 가장 좋았던 건 조이나였고, 그 뒤를 이은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아주 어린 시절의 제 동기들을 잊을 리 없다. 그들이 했던 말 하나하나 빼먹지 않고 전부 기억한다.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게 제 형제들이었다.
당연하게도 인간의 글자를 먼저 깨우친 건 조이나였다. 그러나 아주 간발의 차였다. 자신도 느리지 않았다. 아주 조금. 아주 근소한 차이로 조이나가 자신보다 먼저 글자를 배웠다. 하지만 패티스는 그것에 화나지 않았고, 되레 누님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어머니는 첫째이자, 암컷인 조이나만을 사랑하고 칭찬했다. 그녀가 자신들을 외면하거나 미워했던 것은 아니지만 하이에나의 세계는 그러했다. 암컷이 잘났고 암컷만이 찬양받는 종족이 하이에나였으니까.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패티스는 자신을 향한 대우에 못마땅하지도, 불만을 갖지도 않았다. 그건…… 그건 정말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패티! 정말이야?! 글자를 다 배웠어?! 우와! 우와…… 대단해! 역시 패티스는 천재야!’
‘뭐?’
‘나는 아직 잘 몰라. 아직도 어려워서 잘 모르겠거든. 패티가 알려 주면 안 돼?’
그 무렵의 피시는 주눅 들어 있지도 않았고 유약하지도 않았다. 그때는 발달이 늦는 편이라고만 생각했으니 모두들 직계였던 피시를 감싸 주었다. 그래. 그때만 하더라도 피시는 사랑을 받고 자라던 평범한 하이에나였다.
그런 피시는 언제나 자신의 뒤를 따랐다. 조이나를 따르는 게 하이에나의 본능이었다면, 자신을 따르는 건 그의 마음에서 나오는 순수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패티!’
좋아했나. 그 소년을. 제 형을. 그때의 가족을. 그 당시의 동족을…….
나는 사랑했나.
아아― 그래, 사랑했었나 보구나. 내 누님만큼, 내 어머님만큼. 나는 내 형이라고 불리는 그 두 사람도 사랑했었나 보구나.
그래서 지금 나는 후회하는구나. 지키지 못했음에. 힘이 없었음에. 갖고 있는 머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음에.
내 스스로 가족을 버렸음에.
“……누님. 제가 늦었을까요?”
돌이킬 수 있을까? 누님이 계시지 않아도……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갈라진 우리 사이를 이어 줄 끈이 없는데. 그게 가능할까. 패티스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고개를 내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더는 확률을 따지고 잴 때가 아니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
“폐하. 레타를 거쳐 가실 겁니까?”
“응. 거긴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라 오드가 합류하기 좋으니까.”
“그럼 예정대로 유클리드의 영지를 방문하실 생각이시군요.”
노아의 말에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들리던 만찬 자리가 조용해졌다. 모두 아닌 척해도 내심 유클리드의 영지를 피해 가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이엘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노아를 달래 주듯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왜. 설마 유클리드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되나?”
“놈은 음침하니까요.”
“그러니 직접 만나러 갈 생각이야.”
“놈이 어떤 계략을 짜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반대로 놈을 끌어들일 수도 있지.”
“…….”
“나는 이번 습격이 유클리드답지 않다고 생각하거든.”
안드로가 잡아 온 인간들을 며칠에 걸쳐 신문했지만, 그들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적었다. 현재로서는 모든 정황이 유클리드를 가리키고 있다고 표현할 수밖에는.
그러나 아무리 거래 물건에 광물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게 무조건 유클리드의 소행이라고 확정할 순 없다. 정말 유클리드가 꾸몄다면 이렇게 대놓고 흔적을 남겼을 리가. 제 관심을 받고 싶어 하던 과거의 유클리드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는 이런 짓을 꾸밀 만큼 한가하지 않을 텐데.
“유클리드가 이용당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걸 알아봐야겠지.”
“…….”
“이용당한 건지, 아니면 이용당하도록 유도한 건지.”
유클리드는 상상을 초월하는 자니까. 이엘은 계속 식사하라는 듯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눈짓했다.
그렇게 만찬이 파한 뒤, 이엘은 별저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낮에 패티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자신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누군가 제도를 습격했으나, 패티스를 비롯한 기사단들의 활약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생각보다 습격이 빠르게 마무리된 터라 큰 걱정 없이 떠날 수 있게 됐다.
그녀는 무거워진 어깨를 주먹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 창문을 활짝 열었다. 달빛이 아름답게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도 내일이면 떠나는구나. 그렇게 중얼거린 이엘은 발코니로 나가 시원한 밤바람과 마주했다. 역시 그 어떤 곳보다 노아의 영지에 있는 이 별저가 가장 편하다. 왜 노아의 아버지가 부인에게 이 별저를 선물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 바람을 쐬며 복잡한 머리를 식히던 이엘은, 저 멀리 일렁거리는 인영을 발견했다.
“……일라이저?”
일라이저가 이 시간에 왜 여길……. 그러나 황제만 홀로 쉴 수 있도록, 심지어 근위대장인 하트마저도 출입하지 못하는 곳이라 감히 들어서지 못한 채 먼발치서 지켜보기만 하는 모양이었다.
“러셀 후……!”
이엘은 일라이저를 부르려다가 입을 닫았다. 맞아, 그는 듣지 못했지. 일라이저는 작위를 받은 뒤로 오드에게 치료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한동안 깊은 고민을 했었다. 작위와 영지가 생기면서 영지 경영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치료하는 것을 포기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흔적을 놓고 싶지 않다며.
애초에 오드의 성력으로도 완전한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에, 차라리 그럴 바엔 정말 치료가 필요한 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대신 그는 사람의 입 모양을 보는 걸로도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나름의 훈련과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
이엘은 일라이저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의자에 걸쳐 놓았던 숄을 어깨에 두르고 빠른 속도로 별저를 빠져나왔다.
“일라이저!”
그녀의 외침이 닿기도 전에 일라이저는 이엘의 존재를 눈치챘다.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이 이엘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일라이저는 황급히 자세를 낮춰 그녀에게 절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만. 단둘이 있는 데서까지 예의를 갖출 것인가?”
이엘이 일라이저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그 짧은 순간의 마찰에도 일라이저는 불꽃이 튀는 듯한 화끈함을 느끼고 숨을 죽였다. 표정은 숨길 수 있었지만,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되레 숨기기 어려워졌다.
“괜찮으면 나와 함께 산책을 가 주겠나?”
이엘은 일라이저와의 어색한 공기를 풀고 싶었다. 그가 무슨 이유 때문에 자신을 피하는지, 그게 정치적이든 사적이든 무슨 연유인지 알고 싶었다.
일라이저는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 보는 그녀의 작은 얼굴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산책을 나서게 된 일라이저는 계속해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느라 고생이었다.
감정이란 건…… 참 얄궂구나. 아무리 억누르고 부정해도, 이렇게 얼굴만 보면 다시 솟아오르는 걸 보면. 아니. 그보다 더 커지기만 해. 처음보다 지금 더, 당신을 깊게 사랑하게 된 걸 보면…….
“일.”
“예, 폐하. 말씀하십시오.”
“혹 짐이 후작을 섭섭하게 하였는가?”
걷던 걸음을 멈춘 이엘이 걱정을 담은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일라이저는 달빛이 얼비친 그 녹색 눈동자에 홀린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응? 그랬다면 말해 주지 않겠나?”
“…….”
“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서툴러. 사회성이 필요한 시기에 거의 홀로 자랐으니까.”
그렇지 않다고 말해 줘야 하는데. 일라이저는 입 안에 끈적끈적한 무언가를 머금은 것처럼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욕심도 많아. 한번 내 손에 들어온 사람이면……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아.”
정을 주지 않은 척 굴다가 놓친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이엘은 이제 눈 뜨고 코 베이는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만이라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들었는데. 얼른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서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상하다. 내가 이렇게 나쁜 놈이었나? 일라이저는 순간적으로 지독한 욕망에 사로잡혀 번민했다. 지금처럼 그녀가 제게 관심을 더 주기를.
당신의 눈동자에 내가 잠깐이라도 담겨 있기를…….
“나도 사람이야. 그것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니까.”
언제나 당신의 눈동자는 늑대를 향했는데. 언제나 공작에게만 닿았고, 언제나 공작에게만 향했는데……. 지금은 당신의 보석 같은 그 눈동자 속에 내가 오롯이 담기네요. 그래서 이런 나쁜 욕망에 사로잡히나 봐요, 폐하.
“혹 내가……,”
“폐하.”
“응?”
“……폐하께서는 언제쯤 부군을 들이실 것입니까?”
부군? 뜬금없이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걸까. 이엘은 열었던 입을 꾹 다물고 일라이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게 그대의 마음과 관계있는 건가?”
“아닙니다. 그저 궁금하여 여쭤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아냐. 죄송할 일은 아니지.”
“늘 귀족들에게 시달리셨을 대목인데, 제가 한순간 눈이 어두워져…….”
“아냐. 됐어, 그대는 그런 일로 내게 사과하지 마.”
이엘이 다정하게 웃으며 일라이저의 팔뚝을 도닥거렸다.
“글쎄. 얼른 일이 끝나야 공작을 부군으로 들일 텐데.”
“…….”
“일이 언제쯤 끝날지 모르겠군.”
역시 늑대를…….
사실 실낱같은 희망조차 그는 갖지 않았다. 다른 이면 몰라도 자신은 감히 그녀의 곁에 설 수 없는 사람이니까. 부족하고 못난 곳밖에 없다. 설령 과거의 찬란했던 러셀 가문의 떳떳한 후계자로서 그녀와 마주 선다 할지라도, 존귀한 그녀와 자신은 시작부터가 달랐을 테니까.
그래도 감정이란 건 통제할 수가 없어서. 이따금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서 괴로워질 때가 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어머니와 누님들이, 그리고 나의 가문과 식솔이 든든했더라면…….
그랬다면 폐하께선 내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서.
“폐하께선…… 황녀였던 시절의 약혼자를…… 기억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