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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61화 (261/488)
  • 261화

    *

    쾅쾅―! 아수라장이 된 곳에 모인 사람들이 제각각 귀를 틀어막았다. 공중에 불투명한 막이 잠깐 일렁거리다가 사라졌다.

    “역시 보여주기식의 공격인 듯합니다. 솔직히 백작님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언제든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해요.”

    “오드 님은?”

    “현장에 계십니다.”

    “알겠다. 자리를 지키도록 해라.”

    “예.”

    예상은 했지만……. 패티스는 섬광으로 번쩍번쩍 빛이 나는 하늘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엉망이 된 주변을 향해 손을 뻗고 시선을 집중했다. 난장판이 됐던 현장이 그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공격을 받아 형체도 없이 박살 난 게 아니라, 혼란에 빠졌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서로를 밀치다 떨어진 물건들이 대부분이라 원래 상태로 복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패티스는 대충 큼지막한 것들을 정리하고 나머지는 주변에 있던 하이에나들에게 맡겼다. 그러곤 뒤로 돌아, 모여 있는 인간들을 쳐다봤다.

    의외였다. 소리를 지르며 공황에 빠져서 무력하게 울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인간들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더니 곧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2차 전쟁 때 자신이 보았던 그때의 인간들과 전혀 다른 모습들이었다. 지난 여러 차례의 전쟁들이 남긴 상처의 흔적을, 자신들의 방법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런 모습 때문에 그녀가 인간들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작게나마 변하는 모습이 기특해 보이겠지, 폐하껜. 패티스는 인간들이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돌아서 오드가 있다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보고받은 대로 하찮은 공격들이 여러 번 오가고 있었고, 그마저도 이쪽에서 ‘당해 주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정도로 의미 없는 공격들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오드가 나설 것도 없이, 성력을 빌려 쓰는 성전기사단의 미약한 결계만으로도 막아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대체 누가 이따위 눈 가리기식의 무의미한 공격을 지시한 걸까. 황제가 자리를 비운 제도를 그냥 둘 리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무작정 습격할 줄이야. 그것도 몇 개의 기사단과 오드가 지키고 있는 곳을 겁도 없이.

    혹시 모를 공습을 대비하여 이엘은 떠나기 전에 패티스에게 수호를 단단히 하라는 지시와 함께 제도민의 안전을 부탁했다. 그녀의 말처럼 습격은 갑자기 터졌으나, 사전에 준비해 둔 덕에 큰 혼란 없이 마무리될 것이다.

    한편 오드는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하기 위해 중앙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간 패티스가 들고 온 물병을 건네주며 말을 붙였다.

    “오드 님.”

    “아, 백작.”

    “물 좀 드십시오.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니 수분을 보충하시면서 쉬십시오. 나머지는 저희와 성전기사단에게 맡기셔도 됩니다. 3기사단이 수색을 하러 나갔으니 금방 끝날 테니까요.”

    패티스로부터 물병을 받아 목을 축인 오드가 빙긋 웃으며, 그가 온 곳을 바라보고 상황을 물었다.

    “백작. 저쪽은 괜찮습니까?”

    “예. 모두 안전합니다. 오드 님이야말로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저는 괜찮습니다. 성전기사단이 제 대신 일을 해 주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그 근본은 오드 님의 성력을 빌려 사용하고 있는 것이니, 오드 님의 상태와 아예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신경 쓰겠습니다, 백작. 걱정해 줘서 고맙군요.”

    “……오드 님. 역시 놈들은 폐하를 노리고 있는 걸까요?”

    “그렇다고 봐야겠죠.”

    관건은 인간과 이종족이 손을 잡고 있는가 아닌가의 유무다. 인간이 주도했다는 것은 확실하고, 그 꼬리를 잡는 것 역시 오래 걸리지 않을 텐데. 거기에 엮인 이종족이 과연 누구일지……. 놈들이 진정 인간과 손을 잡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잡는 척하고 있는 건지.

    오드는 입가를 손등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민에 빠진 듯한 패티스를 힐긋 쳐다봤다.

    “백작. 황궁도서관을 자주 왕래한다고 들었습니다.”

    “예, 뭔가 좀 알아낼 수 있을까 싶어서.”

    “내가 너무 어려운 문제를 냈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느껴집니다.”

    패티스의 솔직한 고백에 오드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사람들에게 밟혀 옆으로 쓰러진 꽃 위에 제 손을 뻗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백작은 무엇을 가장 사랑하나요?”

    “예? 사랑……이라니.”

    “백작이 가장 사랑하는 건 무엇이냐고 물어본 겁니다.”

    “당연히 폐하입니다. 제 모든 걸 바쳐서 사랑해야 할 분이시지요, 저의 주군은.”

    “그럼 백작은 폐하를 만나기 전엔 무엇을 사랑했지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오드의 손이 닿자마자 엉망이 되었던 꽃이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갔다. 다행히 완전히 생명이 꺼졌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볼 때마다 신기하다. 그가 있는 곳은 언제나 생명이 박동했다.

    오드의 성력은 패티스가 봤던 이전의 그 어떤 나자르보다 강력하고 특별했다. 만일 그가 죽거나 이엘을 떠나게 된다면, 그녀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겠지.

    패티스는 그 생각을 하며 오드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또 그가 낸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오드 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런 식으로 돌려 말씀하시면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오드 님께서 굳이 저를 불러 이야기하는 건, 제가 그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세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를 위해서라면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백작, 그대가 폐하를 만나기 전에 분명 사랑했던 존재가 있었을 겁니다.”

    “…….”

    “그 존재가 사랑했던 존재도 있었겠지요.”

    “……설마 시모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시모네를…… 어떻게 알고 있지? 패티스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오드를 당황한 낯으로 바라보았다. 나자르라서 알 수 있는 건가? 아무리 나자르라고 해도…… 어떻게 죽은 놈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만나 본 적도 없을 텐데. 패티스는 숨을 멈추듯 입술도 떼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백작. 당신은 여전히 그를 원망하나요?”

    “……그런 감정까지 품을 정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습니다. 제겐 그럴 가치도 없는 놈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주군이었던 사람이 사랑한 존재 아닙니까?”

    “…….”

    “예전에 폐하와 함께 세잔티노를 습격하러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세잔티노. 그리 달갑지 않은 지명에 패티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시모네, 세잔티노. 모조리 그가 싫어하는 이름들이었다.

    오드가 언급하는 그 사건은 자신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턱수염 일당이 뱀과 작당을 모의하던 곳이 그 세잔티노 지하였다. 자신들의 눈을 피해 땅을 파고 마치 왕국이라도 지은 것처럼 그곳에서 군림하던 인간들을 치기 위해 늑대와 독수리의 연합군이 세잔티노를 습격했다. 그때 습격을 허가했던 건 피시였고, 하트도 눈감아 줌으로써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물론 패티스 역시 그 이후에 턱수염을 잡겠다는 핑계로 늑대를 부려 먹었으니 앙금으로 남아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그 일로 이엘에게 잘 보여 호감을 샀던 것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때의 세잔티노 사건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하필 시모네와 세잔티노를 엮는 게 찝찝한 거였다.

    “세잔티노를 언급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오드 님.”

    “그곳에 백작이 놓친 무언가가 있을 겁니다.”

    “세잔티노와 시모네의 연결 고리를 찾으면 되는 겁니까?”

    “세잔티노는 생각보다 많은 게 묻혀 있습니다.”

    “…….”

    “그곳이 하이에나의 아픔이 있는 곳이라 오랜 시간 외면하지는 않았나요?”

    기실 그랬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아프게 해서. 세잔티노를 철저히 망가뜨리고 철저히 무너뜨리고 철저히 외면했다. 그곳을 버려지고 쓸모없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하이에나는 앞장서서 세잔티노를 짓밟았다. 그곳엔 그 어떤 영광의 흔적도 없어야 하니까.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가 왔을 뿐이에요.”

    “알겠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오드 님을 다시 찾아도 될까요?”

    “언제든지요.”

    “…….”

    “신을 찾는 분이라면 누구든. 저는 기꺼이 반기겠습니다.”

    아마 이번 일을 마무리 짓는 대로 오드는 이엘이 있는 곳에 합류할 것이다. 그쪽이 본격적인 공격지가 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자신은 이 제도를 철저하게 봉쇄해, 누구도 쉽게 드나들 수 없게 해야 한다. 그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자신 역시 제도에 발이 묶여 세잔티노로 갈 수 없게 되니 일이 꼬인다.

    세잔티노……. 그 지명을 곱씹던 패티스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러나 금세 그의 얼굴을 지워 버렸다. 안 돼. 아무리 급해도 놈을 보내기엔…….

    “백작은 폐하를 사랑한다고 했죠?”

    “예? ……물론입니다.”

    성전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던 오드가 여전히 제 뒤에 남아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다정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패티스는 늘 오드가 저렇게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부끄러운 죄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처럼. 그가 제 나쁜 마음을 모조리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마주하기 힘든 경건함에, 늘 기운이 빠지고 힘이 밀렸다.

    “과연 백작은 폐하만을 사랑하고 있나요?”

    “그분 외에는 사랑할 게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마세요.”

    “…….”

    “있잖아요. 당신 마음속에.”

    패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믿어 보세요.”

    “…….”

    “폐하께선 당신들, 하이에나 세쌍둥이를 무척 아끼십니다. 그리고 믿고 계셔요.”

    “…….”

    “그러니 백작도 남작을 믿어 보시는 게 어떤가요.”

    피시. 역시 피시밖에 없는 걸까. 패티스의 낯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지금 당장 믿고 맡길 만한 존재가 없었다. 세잔티노와 시모네. 두 가지만으로도 벅찬데 그 안에 숨겨진 내막을 공유할 만큼 믿을 만한 존재가, 제겐 없었다. 그는 긴 고민 끝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드 님. 당신은 미래를 보시는 나자르이니 이번엔 따르겠습니다.”

    “이건 예지와는 관계없는 문제입니다.”

    “…….”

    “백작, 당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면 돼요.”

    “저는 피시를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피시는 당신을 믿고 있죠.”

    “…….”

    “시모네는 피시의 하나뿐인 친구이지요? 그와 관련해서는 피시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는 것. 누구보다 백작이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유약하고 모자란 존재들이었다. 하나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조절할 줄 몰라서 바보처럼 누님의 뒤에 숨기 급급한 놈이었고, 다른 하나는 맹수로 태어난 주제에 누군가를 해치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멍청한 놈이었다.

    그러니 약한 것들끼리 친구가 되는 것도 당연하다. 무리는 두 사람을 끼워 주지 않았다. 아무리 조이나의 형제라 할지라도 말이다.

    “피시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놈은 도망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 하나뿐인 친구가 죽어 가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못 하던 놈입니다.”

    “그때와 지금의 피시는 다르잖아요.”

    “…….”

    “한번 상실을 경험했고, 다시 소중한 무언가를 갖게 됐죠.”

    눈앞에서 조이나와 시모네의 죽음을 목도하며 지독한 상실에 젖었던 피시의 앞에 이엘이 나타났다. 지금의 피시에게 그녀는 죽은 두 사람보다 더 애착을 줄 수밖에 없는 상대일 터.

    “피시는 겨우 갖게 된 것들을 쉽게 놓치지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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