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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60화 (260/488)
  • 260화

    노아의 성은 가로로 길게 뻗은 본성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 세로로 지어진 성이 또 하나 있었다. 본성은 자신과 일부 우논이 지내는 곳이었고 옆에 딸린 성은 손님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즉, 저 빛이 새어 나오는 곳엔 하이에나들과 2기사단, 그리고 스완뿐이란 소리다. 낯익은 빛에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빠진 새에 새하얗게 퍼졌던 빛이 꺼졌다. 잠시 후 그곳은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완이 잠깐 램프에 불을 밝혔나? 아니면 2기사단들이 불침번이라도 서는 건가. 전기를 쓰지 않는 터라 램프로는 저 정도 밝기의 빛을 만들지 못할 텐데. 하지만 그런 유의 빛이 아니었다.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던 빛이라, 노아는 한참이나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겉옷을 들고 성을 빠른 속도로 나왔다.

    “폐하!”

    제 외침에 쭈그리고 앉아서 꽃을 바라보기만 하던 이엘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염려와는 달리, 그녀는 전혀 추워 보이지 않았다. 어깨 위에 모포가 몇 겹이나 둘러져 있었기 때문에.

    아마 자신만큼이나 지독한 잔소리를 퍼붓는 하트의 성화에 못 이겨 저렇게 나왔겠지. 멀리서 언뜻 보면 눈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단단히 꽁꽁 싸맨 모습이었다.

    “공작? 이 시간까지 뭘 하느라 안 잤나?”

    “폐하야말로 지금까지 침실에 안 드셨습니까? 건강에 해롭습니다. 바람이 차니 들어가십시오.”

    “오늘 오랜만에 늦게까지 잔 탓인지 졸리지 않는군.”

    “그럼 제 성으로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니면 근위대장을 시켜서 숙면에 좋은 차를 드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괜찮네. 공의 영지는 시원하니까. 이렇게 밤에 좀 돌아다니면 잠이 잘 오거든. 몇 년 전에도 이런 식으로 곧잘 돌아다녔어.”

    뭘 하고 있나 봤더니, 손으로 땅을 파서 꽃을 옮겨 심는 모양이었다. 어제 잠깐 들렀을 때 한참을 바라보던 꽃이었다.

    “폐하. 말씀하시면 제가 옮기겠습니다. 손 더러워지십니다.”

    “이 꽃은 말은 못 하지만 굉장히 예민한 아이야.”

    “…….”

    “옮길 때 각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금세 시들고 다시는 개화하지 못해.”

    투박한 공작의 손이 닿으면 꽃이 자다가 놀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이엘은 조심스럽게 꽃을 옮겨 심는 행동을 이어 갔다. 황궁에서도 이런 일이 많았던 건지, 하트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슬렁거리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공작은 이 수많은 꽃과 나무들 중에 왜 일부만이 사람의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지 알고 있나?”

    “아니요. 잘 모릅니다. 다만 신의 손길을 받은 몇몇 씨앗이 뿌리를 내려 잘 자랐을 때, 저희처럼 말을 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보통 그렇게들 알고 있지.”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까?”

    “응, 정반대의 이야기야.”

    “…….”

    “사실 생명이 있는 모든 생물은 날 때부터 말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해. 그런데 어느 순간, 너무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걸 보며 충격을 받은 아이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게 됐다는 거야.”

    “…….”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기 싫어서. 유일하게 닮았던 ‘말’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대.”

    커다란 정원에는 이엘의 듣기 좋은 목소리와 흙이 떨어지는 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전해지는 동화 같은 이야기 중에 하나지만.”

    “네.”

    “어릴 때 어머니께서 해 주셨던 이야기야.”

    “기억이 또 돌아오셨군요.”

    “맞아. 며칠 전에 떠올랐어, 이 이야기가.”

    이엘은 노아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자신의 기억이 어딘가 듬성듬성 잘려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소실된 기억의 대부분이 어머니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오드 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달리 말을 붙이진 않았어. 평소랑 똑같이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지.”

    “폐하. 혹시 꿈도 여전히 꾸고 계십니까?”

    “응, 맞아. 계속 꾸고 있어.”

    “그날을…….”

    “아니. 그건 아니고 다른 꿈을 꾸는데……. 이게 내가 피곤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뭔가 자꾸 보이는 건지를 모르겠네.”

    “반복되는 꿈인가 보군요.”

    “응. 깨고 나면 기억이 나질 않아서, 언젠가부터 비슷한 꿈을 꿀 때면 의식적으로 꿈에서 깨어나 기록을 해 두었거든.”

    “…….”

    “그랬더니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더라고.”

    그래 봤자 조각난 꿈의 기억은 많지 않았다. 그것으로는 어떤 단서도 되지 않는다. 다만…….

    “혹시…… 성에 고서가 있나?”

    “제 영지 내 도서관에 있는 책 중에 필요한 책은 오드 님께서 선별해 황궁도서관으로 옮겼습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오드가 일부러 가져오지 않은 책도 있을 것 같아서.”

    오드 님이 왜? 의문을 담은 노아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엘이 고개를 하늘 위로 향했다.

    “옛날부터 오드는 내게 숨기는 게 많았거든. 근데 숨긴다기보다는…… 내가 찾아내길 바라는 것 같았어.”

    “…….”

    “그게 나를 키우는 오드의 방식이었으니까.”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 몇 년 전에 꿨던 그 예지몽……. 나자르인의 경우 꿈으로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쳐도, 자신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데 어떻게 예지몽을 꾸겠는가. 하지만 그 꿈은 느리지만 조금씩, 천천히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예지몽이 아니라면, 누군가 내게 보여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이엘은 그렇게 추측 중이었다.

    “꿈을 이용하는 이종족도 있을까?”

    “꿈……이라면 어떤 꿈을…….”

    “꿈을 통해 능력을 사용하는 이종족.”

    노아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이엘을 쳐다봤다. 자신이 알기로는 그런 종족은 없다. 과거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멸종한 종족이면 몰라도, 적어도 현존하는 종족 중에 꿈을 이용하는 종족은 없다. 고민할 것도 없이 그가 고개를 단호하게 흔들었다.

    “없습니다.”

    “그래, 지금은 없겠지.”

    “…….”

    “그러니까 고서가 필요해.”

    “…….”

    “멸종한 줄 알았던 종족 중에, 꿈으로 내게 접근하는 종족이 있을지 몰라.”

    물론 추측 중에 하나이다. 그냥 내가…… 너무 예민해서, 불면증이 찾아오다 보니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확실히 아니라는 증거도 없으니까.

    “알아봐 줘, 노아.”

    “예, 알겠습니다.”

    “고마워.”

    “그러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아무리 모포를 덮으셨어도 바람이 찹니다.”

    “후후, 공은 정말 걱정이 많구나.”

    노아는 손수건을 꺼내 흙이 잔뜩 묻은 이엘의 손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검지에 끼워진 녹색 반지에 시선이 닿았다. 그는 그 반지도 손수건으로 닦아 주다가, 반지를 손가락에서 쏙 빼냈다. 황권을 상징하는 황자의 반지를 뺐는데도 이엘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갖고 싶나?”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그저 웃으며 농담을 던질 뿐이었다.

    노아는 손수건에 싸인 반지를 손안에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제 품을 뒤적였다. 이엘은 그가 뭘 하는지 궁금했지만 채근하지 않았다. 곧이어 노아가 품 안에서 꺼낸 것은 비로드의 작은 상자였다.

    “그건…….”

    “예전에, 폐하께서 제 영지에 계셨을 때. 그때 암시장에 잡힌 주드를 위해 당신의 루비 반지를 인간들에게 파셨었죠.”

    “그랬지.”

    “그때 허전하게 빈 당신의 검지 위에, 저는 더 좋은 반지를 끼워 주고 싶었습니다.”

    “…….”

    “하지만 반지를 다 만들기도 전에. 폐하의 검지 위엔 다른 반지가 올라갔습니다.”

    황제의 증표가 된 황자의 반지가 그녀의 손가락에 걸렸다. 노아는 대관식에서 그 반지 위에 입을 맞췄었다.

    “대관식. 그날 제 품속엔 이 반지가 있었습니다.”

    작은 상자가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안엔 붉은 루비가 장미 모양으로 세공된 채 끼워져 있었다.

    “당신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엘.”

    황제를 섬기는 가신으로서가 아니라 그녀의 한 남자가 되길 바라며. 언젠가 이 반지를 네 손가락에 끼우고 사랑한다고, 그렇게 고백하고 싶었다고.

    “끼워 드려도 되겠습니까?”

    감히 황제의 반지를 뺀 것은 불충한 행위였으나 이엘은 화를 내거나 검을 빼 들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그 반지가 있던 자리에 다른 반지를 끼우고 싶다며 말하는데도. 저 멀리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하트만이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함을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응, 끼워 줘.”

    이엘이 저를 향해 웃었다. 얼굴엔 흙을 묻히고, 손수건으로 다 닦지 못한 손가락에도 흙을 묻히고. 수수하고 평범하게, 마치 몇 년 전의 그 어린 소녀로 돌아간 것처럼. 이엘이 자신을 향해 웃었다.

    노아는 루비 반지를 그녀의 검지 위에 끼워 넣었다.

    “예뻐, 노아.”

    “소중히…… 간직해 주십시오, 폐하.”

    “물론이야.”

    “…….”

    “그대가 주는 건 무엇이든 소중하게 간직할 거니까.”

    그녀가 행복하게 웃으며 반지 위에 입술을 짧게 붙였다가 뗐다.

    “붉은 장미는 유일하게 황궁과 늑대의 정원에만 자라는 꽃이었지.”

    “예. 황실에서 제 선조께 선물로 주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가문의 문양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붉은 장미는 내가 레온의 영지에서 어렵게 구해 온 거기도 해.”

    “예.”

    “그러니 나와 그대의 가문, 그리고 나와 공작. 모두와 엮여 있는 소중한 증표이다.”

    이엘은 반지를 낀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노아는 그녀의 따뜻한 손바닥에 제 뺨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소중히 할게.”

    내가 갖고 있는 그 어떤 반지보다, 그대가 준 이 반지를 가장 소중히 할게. 그렇게 말하며 이엘은 노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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