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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58화 (258/488)
  • 258화

    “응. 예전에 새끼 늑대들이랑 많이 다녔던 곳이니까.”

    “그리고 제 아버지가 저를 빠뜨렸던 곳이기도 하지요.”

    “후후. 공이 수영을 못하던 때를 말하는 거지?”

    “예.”

    “공작이 그 얘기를 내게 해 주었을 때를 나는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해.”

    선황의 학대로 엄숙한 분위기에서의 예법이 트라우마로 남았던 제게, 노아는 가르쳐 주었다. 괜찮다고 알려 주었다. 언제든 도와줄 수 있으니, 그런 건 괜찮다고.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

    “그때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

    “아. 내 아비와 다른 왕이 있었구나.”

    “폐하.”

    “……내 오라비가 꿈꾸던 세상이, 미래상이 여기 있었구나. 바로 당신이었구나.”

    이온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노아는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노아에게 황자의 존재는 어렵고 무겁고 괴롭기만 했다.

    “내가 그대에겐 이온의 이야기를 많이 안 한 듯한데.”

    “예.”

    “왜 내게 묻지 않았나?”

    “황자의 목숨을 뺏은 게 저니까요.”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황자를 죽였다는 것엔 후회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도 예외를 둘 순 없다. 선황의 피를 이어받아 다음 황제가 될 자였으니까.

    “하지만 후회합니다.”

    “…….”

    “폐하를 외롭게 만들어서요. 제가, 폐하에게서 모든 걸 빼앗아 가서요.”

    르네는 황녀를 죽인 것을 후회했다. 어린 황녀에겐 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건 르네가 그녀를 닮고 싶어 동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생각이고, 제대로 된 이종족이라면 노아처럼 생각하는 게 맞다. 원흉이 된 황가는 멸문되고 몰살당해야 마땅하다. 예외는 없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이기적입니다, 폐하. 저는 저밖에 모릅니다.”

    “…….”

    “그리고 폐하밖에 모릅니다.”

    “노아.”

    “제가 황자의 이야기를 꺼내면, 폐하께서 슬퍼하실 테니. 또 그 슬픔이 저를 슬프게 할 테니. 저는 이렇게나 이기적이라, 저희 두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엘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노아를 마주했다. 그의 짙은 눈동자 안엔 자신만 오롯이 담겨 있었다. 이 넓은 세계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의 동공 안엔 오직 자신밖에 없었다. 그는 그렇게 이기적이라.

    “원망하지 않아.”

    “…….”

    “그대도, 르네도, 레온도. 다 어쩔 수 없었잖아. 난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

    “…….”

    “이거 하나만 기억해 줘.”

    “말씀하십시오.”

    “나는 이 자리를, 내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노아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졌다.

    “이 자리는 이온의 자리야.”

    “폐하.”

    “죽은 자의 이름을 올리니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

    “아마 이온이 살아 있었다면 응당 그의 자리가 되었을 테니까.”

    “폐하의 자리입니다. 제가 그렇게 지킬 거니까요.”

    “응, 고마워. 공에게 늘 고마워.”

    “폐하. 사랑하는 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겁니다.”

    그의 단언에 이엘이 빙긋 웃으며 팔을 벌려 노아를 꽉 끌어안았다.

    “지켜 줘.”

    “예.”

    “나중에…….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내 피붙이가 존재한다면.”

    역시…… 아이를 말하시는 건가. 노아는 그렇게 받아들이며 잠자코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게 뭐가 됐든 그대가 꼭 지켜 줘.”

    “당연합니다.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안 돼. 목숨은 걸지 마.”

    “…….”

    “내겐 노아도 소중해. 내겐 그대도 내 피붙이만큼이나 소중해.”

    노아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던 이엘이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저를 향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나 저 미소에 마음이 녹았다. 언제나 저 미소에 불안이 사라졌다.

    그는 제 사랑이었다.

    “노아.”

    “예, 폐하.”

    “사랑해.”

    “저는 그보다 더 사랑합니다.”

    “…….”

    “폐하의 사랑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당신이 절 사랑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게만 보여 주는 달큰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노아는 고개를 푹 숙여 볼에 입술을 묻었다. 주변은 푸르른 들판뿐이었고 저 멀리서 폭포 소리만 작게 들려왔다. 노아는 입술을 조금씩 움직이며 그녀의 입술 위를 점했다.

    “하지만 제게 우선은 엘. 당신입니다.”

    “…….”

    “스스로를 포기하지는 마세요. 당신과 아이는 제가 지킬 겁니다.”

    “응.”

    노아의 목 뒤로 제 양팔을 걸었다. 입술이 맞부딪치자마자 말캉한 혀가 안으로 파고들어 질척하게 입 안을 긁어 댔다.

    포기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마치 그가 일러 주는 것 같았다.

    *

    “폐하!”

    검은색 중단발을 한 스완이 이엘을 발견하자마자 늑대의 등 위에서 내리더니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제 옆으로 테르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나쳐 간 것이다. 아! 그냥 저것들을 타고 갔어야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꼴찌가 되어 있었다.

    “폐하!”

    어느덧 모두 성체에 접어든 테르들이 이엘의 가까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빙빙 돌며 하울링을 했다. 마음 같아선 이엘에게 달려들고 싶은데 주변에 보는 눈이 있어서 그러지는 못하고, 그런데 또 참을 수는 없어서 저렇게 뱅뱅 돌기만 하는 것이다. 그사이 다가온 안드로가 테르들을 가볍게 통제하며 이엘을 향해 인사했다.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을 뵙습니다.”

    “오랜만에 보는군, 안드로 경.”

    “자주 입궁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렇게라도 보게 되니 기쁘구나.”

    “제겐 큰 영광입니다, 폐하.”

    공손히 절한 안드로를 지나쳐 낑낑거리는 테르들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 안드로가 격식을 차려 인사한 것을 본 테르들은 재빨리 움직여 이엘의 앞에 정렬했다.

    “제국의 높은 분을 뵙습니다!”

    그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고함치는 테르들 때문에 안드로와 알폰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래서 조기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는 건가. 어릴 때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이엘을 너무 친근하게 느끼는 테르들 때문에 우논들은 골치가 아팠다. 보다 못한 알폰스가 주의를 주려고 움직였지만, 이엘이 되레 알폰스를 말렸다.

    “경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엄하구나.”

    “이제 아이가 아닙니다. 성체입니다, 폐하.”

    “알폰스 경. 지금 폐하께 말대꾸하는 건가.”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노아가 한 소리 하자, 알폰스가 입을 꾹 다물며 뒤로 물러났다. 테르도 테르지만, 제 상관도 상관이다. 그는 살짝 한숨을 쉬며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왜 난 위아래로 전부 치이는 것 같지…….

    이엘은 두 사람을 보고 작게 웃더니 이내 테르들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한 마리씩 이리 와.”

    “내가 먼저!”

    “아냐, 내가 먼저야!”

    “내가 먼저거든?!”

    “비켜! 앞이 안 보이잖아! 나와!!”

    우당탕탕 자기들끼리 치고받는 사이, 새카만 늑대가 유유히 다가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언제나처럼 기회를 잘 엿보는 빌이었다. 전보다 더 커진 빌이 얼굴을 치대며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테르들이 다툼을 멈췄다.

    “뭐야! 저 기회주의자가 또!”

    “와. 쟤는 진짜 옛날부터 약았다니까.”

    “얌전한 척은 다 하면서 저럴 땐 꼭 먼저 선수 치더라!”

    “내 말이!”

    계속 웃음을 눌러 삼키고 있던 이엘이 끝내 참지 못하고 아하하하! 큰 소리로 폭소했다. 저렇게까지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 늑대들은 저희끼리 시선을 마주치다가, 결국 그녀를 따라 웃고 말았다.

    “오헬!”

    “보고 싶었어, 오헬!”

    “오헬∼!”

    이번엔 안드로가 불경하다며 잔소리를 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엘이 테르들 틈에 파묻혀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노아의 눈치를 살폈다.

    “노아 님. 말려야 할까요?”

    “그냥 둬. 폐하가 행복하시면 됐으니까.”

    “폐하는 여전히 테르들에게 약하시군요.”

    “폐하께서 키우신 거나 다름없지. 성장기의 테르들은 주변의 성체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으니까.”

    그 성장기를 이엘과 보냈으니. 테르들에게 이엘은 친구 이상이겠지. 어쩌면 부모와 비슷한 수준의 애착일지도.

    “폐하! 나는 잊었어요?!”

    아, 맞다. 저놈도 있었지. 노아가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시선을 돌려 스완을 쳐다봤다. 헉헉거리며 손등으로 땀을 훔친 스완이 늑대들을 쏘아봤다. 인정머리 없게 진짜 나만 두고 자기들끼리 가 버리냐고. 이래서 육지 종족들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와, 저 배신자 늑대들.”

    “그러게 얌전히 내 위에 올라타 있었으면 좋았잖아. 먼저 뛰어내린 바보가 누군데.”

    “와, 이 꼬맹이가 어디 어른한테 바보래.”

    “누가 꼬맹이야! 네가 더 꼬맹이거든?”

    “난 우논이야!”

    “난 늑대야!”

    로날드와 스완 사이에 유치한 말싸움이 붙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었던 건지 다른 늑대들은 그쪽을 힐끗 보고는 금세 시선을 돌리고 저희끼리 떠들기 바빴다. 이엘은 검은 머리카락이 제법 잘 어울리는 스완과 로날드를 보며, 언젠가의 밀로와 주드를 떠올렸다. 지금은 제 곁에 없는 두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

    “폐하.”

    노아의 낮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모두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짙게 깔린 석양을 등지고 한 무리의 기사단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후발대로 도착한 근위대와 2기사단이다. 가서 머물 곳을 미리 정리해 둬라, 알폰스.”

    “예, 각하.”

    그들의 정체를 먼저 알아챈 노아가 알폰스를 공작성으로 돌려보냈다. 이엘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이 가까이 올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근위대가 많이 늦는단 생각을 했는데 제 2기사단과 만나느라 그랬나 보군. 하이에나는 이엘 외에는 등에 누군가를 태우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데, 그 등 위에 2기사단의 일부가 버젓이 타고 있는 게 보여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그사이 그녀의 앞에 가까워진 기사단들은 하이에나의 등에서 내린 뒤, 단장을 따라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췄다. 가장 앞에 있던 금발의 기사단장이 고개를 올리고 그녀를 쳐다보며 보고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을 뵙습니다.”

    “반갑네, 러셀 후작. 후작은 정말……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제도로 자주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 됐어. 이렇게라도 보니 기쁘군. 모두 일어나게.”

    일라이저는 외부로는 제 2기사단의 단장이었지만, 내부로는 그녀의 첫 번째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도로 출입하는 횟수가 누구보다 적었다. 사실 그건 표면적인 이유고, 이카르와 마주하지 않으려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멀리서 보고 경의 아버지인 줄 알았어.”

    “그렇습니까?”

    “응.”

    원래도 훤칠한 미남이긴 했는데, 안 본 새에 체구가 커진 탓인지 정말로 루시우스 러셀을 쏙 빼닮아 있었다. 신기한 듯 그를 한참 쳐다보는데, 그녀의 시선이 익숙하지 않은 일라이저의 볼이 점점 붉어졌다.

    그러다 결국 제 감정을 숨기려 고개를 숙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자세한 보고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 우선은 쉬는 게 좋겠군.”

    “피곤하지는 않으나 오랜 시간 야영을 한 터라 몸이 깨끗하지 않습니다. 몸을 단정히 한 뒤에 다시 보고드리러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공작, 2기사단과 근위대들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게.”

    “예, 폐하.”

    마침 성을 정리하고 나온 알폰스가 노아의 명령을 받고 근위대와 기사단을 안내했다. 이엘은 일라이저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가 자신을 피하는 듯해서 그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카르 때문에 제도에 못 오던 게 아니었나? 내가 무언가 섭섭하게 한 게 있었나. 이엘은 일라이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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