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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57화 (257/488)
  • 257화

    *

    “밀로라고 했었나?”

    “예?”

    “용 말이야. 폐하 곁에 있었다던.”

    이엘이 맡긴 임무 준비를 위해 잠시 황궁을 떠났다가 돌아온 앤디를 보자마자 패티스가 다짜고짜 밀로의 존재를 물었다. 겉옷을 벗어 들고 인사를 마치던 앤디가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그놈은 갑자기 왜 찾으시는 겁니까?”

    “놈이 정말 용이 맞았나?”

    “예. 그건 확실합니다. 본체로 돌아간 모습을 보기도 했고, 제가 그 본체에 타고 이동한 적도 있으니까요.”

    “폐하께서 내 영지에 계실 때도 하늘에 있던 게…… 그 용이었다고?”

    “예. 아무래도 그 당시엔 뱀과 전쟁 중이었으니 용의 능력이 필요했거든요. 독수리의 영지에서 매를 공격했던 것도 밀로였고, 세잔티노 때 도망쳤던 턱수염을 잡는 데 공헌한 것도 밀로입니다.”

    근데 뜬금없이 밀로의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지? 앤디가 의아함을 품고 패티스를 쳐다봤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다른 기사단들에게 듣기로는 이엘이 자리를 비운 뒤로 저렇게 계속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던데. 황궁도서관도 수십 번씩 드나들 정도로 뭔가 깊게 파헤치는 것 같다고.

    “저…… 패티스 님.”

    “말하게.”

    “혹시 폐하께서 따로 명령을 내리신 게 있으십니까?”

    “별것 아니니 경은 경의 임무에 신경 쓰도록.”

    “……네. 알겠습니다.”

    하여간 저 하이에나 백작은 폐하 앞에서만 살갑지. 겉과 속이 가장 다른 놈을 고르라고 하면, 앤디는 곧장 패티스를 고를 것이다.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기사단 정리를 위해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패티스가 앤디를 불렀다.

    “앤디 경.”

    “예?”

    “밀로라는 자가 혹시 암컷에 관한 이야기는 안 하던가?”

    “암컷이요? 글쎄요. 따로 말은 안 하던데요.”

    “놈이 폐하를 극진히 아꼈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지나칠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쏟아붓긴 했죠. 근데 그거랑 무슨 상관이……,”

    “용의 암컷이 존재한다면 폐하께서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으셔도 되니까.”

    “…….”

    “혹은 폐하를 그 암컷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갈 수도 있고.”

    즉, 이엘을 언제든 숨겨 줄 수 있던 게 밀로라는 소리구나. 앤디가 미간을 찌푸리며 패티스의 말을 곱씹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암컷에 대한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만, 아마 놈도 용의 암컷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지 않을까요?”

    “…….”

    “용은 암컷과 수컷이 따로 산 지 꽤 됐으니까요.”

    용은 이종족 사이에서 신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존재라고 알려져 있지만, 수컷 용들은 이미 그 반열에서 벗어난 지 오래라고 들었다. 피만 보면 흥분하며 달려드는 습성이 생긴 게 그 방증이었다. 신과 가까운 종족이 살육에 미쳤을 리 없으니.

    그렇다면 남은 암컷들만이 신과 가까운 곳에 존재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이종족은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 추측도 의미가 없다.

    “암컷 용들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알려진 게 없으니까요. 아주 오래 산 우논이 아니고서는 용의 암컷을 본 적도 없을 테고요. 근데 또 그렇게까지 오래 살아 있는 우논은 없으니,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요.”

    애초에 우논이 영존하기는 해도 긴 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개체는 별로 없었고, 그렇게 오래 산다고 해도 인간들이 가만두지 않았으니. 결국 용의 암컷과 수컷에 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이종족은 이 땅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기만 하던 패티스가 앤디를 슬쩍 떠보듯 입을 열었다.

    “밀로란 자는 영영 떠난 건가?”

    “마지막으로 대면한 게 폐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잘 모릅니다, 왜 떠났고 언제 돌아오는지.”

    “…….”

    “백작님.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폐하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라면 저희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별일은 아니네. 그냥 요새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니, 용의 암컷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져서.”

    “암컷 용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던가요?”

    “아니, 전혀.”

    사실 그 용의 암컷이란 게 정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신께서 만드셨으니 존재하기는 할 텐데……. 누구도 눈으로 본 적이 없으니. 앤디는 그 생각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나치려다 뭔가 떠올린 듯 걸음을 멈춰 섰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스완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데요.”

    “스완? ……백조?”

    “예. 걔가 세상 물정 모르게 생기긴 했어도, 은근히 필요 없는 잡다한 지식은 좀 알고 있더라고요.”

    “…….”

    “스쳐 지나가듯 한 말이라 확실한 건 아닌데요. 용은 수컷과 암컷의 능력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다르다고?”

    “예. 사실 저는 놈의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아서 그때도 흘려듣기는 했는데요.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나네요.”

    용은 알려진 게 없으니 이종족 내에서도 이런저런 소문이 많이 도는 편이었다. 그러니 앤디도 대충 흘려들었겠지. 진짜 용인 밀로에게서 직접 듣지 않는 한, 어떤 자에게서 듣더라도 신빙성이 없는 건 똑같다.

    하지만 패티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스완에게서 더 들은 건 없나?”

    “예. 그 외에는 별다른 얘기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용에 관해 본격적으로 얘기한 게 아니라, 스완에게 밀로가 떠난 이야기를 하다가 놈이 용이었다는 걸 알려 주면서 들은 거라서요.”

    “…….”

    “혹시 폐하와 관련된 중요한 사안이라면, 당장이라도 스완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아니. 됐다. 경은 폐하께서 경에게 내린 일을 잘 마치도록. 이 일은 내게 일임하고. 후에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직접 백조를 만나겠네.”

    “예.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앤디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쳐다보던 패티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백조가 어떻게 용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 거기다 놈은 할 줄 아는 거라곤 이종족의 능력밖에 없는 철부지 어린애였는데.”

    패티스는 백조 이야기만 나와도 미간부터 찌푸리는 성격이라, 스완과도 대면한 횟수가 한 손에 꼽혔다. 그때마다 백조를 향한 반감만 늘어날 뿐이었다.

    하필 계약을 해도 저런 철없고 어리광만 있는 어린놈과 하다니. 그를 선택한 게 이엘이라 대놓고 불만을 표현할 순 없었지만, 어쨌든 패티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스완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와 제대로 만난 적도 없었다.

    근데 그놈이 용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그럼 둘 중 하나다. 그냥 허풍 떨 듯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거나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고니는 집단생활을 한 세월이 꽤 되니 다른 고니들에게 들었을 확률도 있다.

    고니는 아주 오랜 시간을 호수에 발이 묶인 채 저희끼리 고립된 생활을 해 왔다. 먹이사슬의 하위 종족은 포식자를 피해 집단적으로 생활하기도 하지만, 고니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알려지지 않은 어떤 저주로 인해 뭍으로 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동도 할 수 없게 서식지도 한 군데로 지정된 채 오랜 시간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개체 수가 적지 않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

    아무리 능력이 환각이라고는 해도……. 고니를 노리는 이종족도 제법 있었을 테고, 심지어 인간들 역시 고니를 그냥 뒀을 리가 없는데. 물론 고니도 1차 전쟁으로 암컷을 잃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왜 우리가 고니의 존재를 잊고 살았던 것 같지? 마치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고니라는 존재가 기억에서 흐릿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 역시 직접 눈으로 보게 되기 전까지는 고니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젠장. 머리가 아프군.”

    “백작님. 집무실로 가시겠습니까?”

    “그래. 일단 좀 쉬어야겠어.”

    고니가 호수에 발이 묶인 게, 정말 저주였을까? 아니면 역으로 누군가의 보호는 아니었을까?

    패티스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동하면서도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것들이 왜 자꾸 머릿속을 떠다니는 걸까. 오드와 대화한 뒤로 좀처럼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알아서는 안 되는, 그러나 알아야만 하는 것들과 마주하기 직전이라는…… 그런 찝찝한 느낌이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혔다.

    *

    “엘.”

    “……으응.”

    “많이 피곤하십니까?”

    “응, 피곤해.”

    노아는 웅얼거리는 이엘의 목소리에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새하얀 얼굴 위에 붉게 자리 잡은 홍조가 귀여워, 그는 고개를 숙여 이엘의 뺨 위에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졌다. 그러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그녀의 자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눈을 붙인다는 건, 내가 네 안식처가 될 자격이 있다는 거겠지?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자신은 모든 서러움과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다. 하루빨리 모든 일을 해결하고 당당하게 네 곁에 서고 싶은데, 이런 내 마음을 네가 알까.

    엘, 나의 귀여운 황녀. 나의 사랑스러운 황제……. 당신은 이런 제 마음을 아십니까?

    그렇게 한참이나 이엘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이엘의 등 위에 입술을 짧게 여러 번 붙였다가 뗐다. 그녀는 제 입술의 온기가 간지러웠던 건지 잠깐 웃음을 흘리다가 다시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졌다.

    “각하. 조금 전에 안드로 경이 먼저 보낸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아마 오늘 저녁 중으로 도착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침실을 나와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들이닥친 업무를 보느라 노아도 꽤 바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건, 전부 그녀 때문이겠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영지에 있는 그녀의 정원에도 이전보다 햇빛이 더 많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이엘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알폰스를 통해 따로 찾아올 필요 없다는 전갈을 받은 터라, 노아는 집무실에서 잔업을 보고 있었다.

    똑똑. 정신없이 밀린 일을 처리하는 와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이엘이 들어왔다. 그녀를 발견한 노아가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폐하.”

    “일이 많나?”

    “아닙니다. 알폰스를 통해 저를 부르셔도 되는데, 어떻게 직접 오셨습니까.”

    “잠깐 시간이 괜찮다면 짐과 함께 산책하지 않겠나?”

    “영광입니다, 폐하.”

    그녀가 좋아하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의 영지 내에 그녀가 좋아하는 산책길이 꽤 많았는데도, 이엘이 그를 끌고 간 곳은 성 밖이었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계속 걷다 보니 어디로 가려는 건지 노아도 알 것 같았다.

    “폭포가 보고 싶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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