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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56화 (256/488)
  • 256화

    그가 미간까지 찌푸려 가며 열심히 변명했지만, 이엘의 눈엔 그저 우스운 허세처럼 보일 뿐이었다. 흐음, 앤디 경이 모조리 맡아서 하느라 고생깨나 했겠는데. 후작도 꽤 골머리를 앓았겠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새에 정원 입구에 도착했다.

    아마 제국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꼽으라고 하면 모두가 황궁의 정원을 선택할 것이다. 그 어떤 곳의 정원보다 아름답고 특히 중앙에 위치한 유리 온실은 달빛을 밤낮 없이 머금은 것처럼 언제나 은은한 빛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그곳일 텐데…….

    “어떠십니까, 폐하.”

    저 멀리 정원이 손톱만 한 크기로 보일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가까이서 본 그의 정원은 과연 그가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폐하께서 좋아하셨던 그때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도록, 그 부분을 특별히 더 신경 썼습니다.”

    “싹 갈아엎었나?”

    “예.”

    뱀이 늑대들의 영지를 습격하기 전의 그 모습을 닮았다. 주드와 밀로와 새끼 늑대들과 함께 만들었던 그때의 어설픈 모습을 꼭 닮아 있었다.

    “레온은, 제 심미안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결과라며 불만을 토로했지만요.”

    “…….”

    “폐하께선 아름다운 황궁의 정원보다 이곳의 수수한 정원을 더 좋아하실 듯해서.”

    “응.”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중앙에 위치한 돔 형태의 유리 온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돔 천장을 만드느라 주드랑 미르가 꽤 고생을 했었지. 오드의 도움을 조금씩 받기는 했지만, 그때의 그 정원은 대부분 저희 손으로 직접 만들어서 가꿨던 곳이었다. 오직 노아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일념하에.

    그렇게 제 눈에만 예쁘던 정원은 뱀과 인간들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듯 짓밟혔고, 다시 영지를 복구하면서 꾸몄던 정원은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만 들게 했다. 오히려 노아가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온갖 꽃을 갖다 바친 덕에 이전보다 더 화려해졌지만, 그때의 정취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랬는데. 이렇게 다시 처음의 정원으로 돌아온 걸 보니, 이엘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밀려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노아가 웃으며 어울리지도 않는 너스레를 떨었다.

    “앤디의 주도하에 로날드나 다른 테르 녀석들이 앞장서서 꾸몄습니다.”

    “이걸 보여 주려고…… 그간 짐이 영지에 와도 정원 쪽은 권하지 않았던 건가?”

    “되도록 만개했을 때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봄이 되었을 때 그렇게 영지로 와 달라고 부탁을 했던 거구나. 올봄엔 일이 밀려서 제도를 비울 수 없었던 터라 오지 못했는데……. 이런 선물이 기다릴 줄 알았더라면 만사를 제쳐 두고 왔을 것이다.

    쭈그리고 앉은 그녀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노아가 미소를 지었다. 반년이 넘게 공을 들였던 곳이 바로 이곳, 그녀의 정원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주드와 함께 만들었던 그때의 정원 그대로가 될 순 없겠지만, 어떻게든 이엘이 그때를 추억할 수 있게끔 선물을 주고 싶었다.

    “폐하.”

    “응.”

    “여긴 여전히 당신의 정원입니다.”

    “…….”

    “그러니 황궁에서처럼 긴장하실 필요도, 격식을 차리실 필요도 없습니다.”

    “…….”

    “여긴 당신이 편안히 머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니까요.”

    노아의 말을 들으며 이엘은 눈앞에 아무렇게나 피어난 꽃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말을 하지 않는 꽃이라 그런지, 아무리 건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내 시클라멘은 조금만 건드려도 성질을 내는데. 근데 또 그게 참 귀여워. 그 생각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노아.”

    “예.”

    “주드의 무덤엔 혼자 다녀올게.”

    “그렇게 하십시오.”

    대충 옷을 털고 일어선 이엘은 하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그에게도 따라오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바로 코앞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모양인지, 하트는 평소완 다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정원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드의 무덤이 있다. 이곳만큼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였다.

    “주드.”

    너무 오랜만에 와서 미안해, 주드. 네 앞에선 바빴다고 핑계를 대는 것도 양심에 찔리네. 미안해, 주드.

    주드의 무덤이 있는 곳은 누군가의 각별한 손을 탄 것처럼 유달리 정돈되어 있었다. 앤디일까, 아니면 로날드를 비롯한 테르들일까. 누가 됐든 널 사랑하는 것만은 여전하다는 게, 내겐 못내 큰 위로가 돼.

    이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려 주드의 무덤을 품에 그러안았다. 옷이 엉망이 되어도 좋다. 이 풀물이 내 옷에 스며들 듯, 따뜻한 네 온기가 내게로 옮겨 올 수만 있다면. 따뜻한 내 온기가 네게로 옮겨 갈 수만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이렇게 안고 싶어. 언제까지고 네 곁에 있고 싶어, 주드.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렇게 네 무덤을 끌어안았던 것 같은데.”

    의식을 잃은 노아와 함께 르네의 영지로 쫓기듯이 몸을 숨겼다가 이곳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땐 정원이 아니라 가는 길목에 주드의 무덤이 있었다. 노아에게 분노한 밀로가 그와 대립하다가 탑에 갇혔던 게 화근이 되어 용은 심술을 부렸다. 늑대의 영지에 엄청난 눈을 퍼부었던 것이다.

    “난 몰랐어. 미르가 용일 줄이야. 넌 알고 있었어?”

    그래도 제법 잘 어울리는 단짝이었다. 단짝이라고 말하면 둘 다 아니라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가 보기에 밀로와 주드는, 서로가 인정하지 않는 우정을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때 네 무덤만 눈이 내리지 않았던 것. 너는 알고 있었니, 주드?”

    펑펑 쏟아진 눈 속에 노아의 영지는 잠기듯 파묻혔지만, 이엘이 머물고 있던 별저와 주드의 무덤만은 온전했다. 그땐 그게 신기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전부 밀로의 능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미르도 같이 슬퍼했어. 네가 없는 이곳을…… 같이 슬퍼했어.”

    그래서 주드 네 무덤엔 눈이 쌓이지 않았던 거야. 가뜩이나 차가운 땅속에 있는데, 더 차갑게 만들 수가 없어서. 투닥거려도 미르는 널 참 많이 좋아했나 봐, 주드.

    이엘이 그 생각을 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풀물이 든 손바닥을 펼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용은…… 알려진 바가 적어.”

    이종족은 종족마다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이를 테면 늑대는 얼음을 쓸 수 있고, 하이에나는 물체를 띄울 수 있는 것처럼. 용 역시 국지적이긴 하지만 날씨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노아로부터 들었다.

    그래. 용의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자신은 용의 능력을 몰랐다. 노아에게 듣기 전까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1차 전쟁은…… 용과 관련이 없었나?”

    용은 어디에 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지……. 같은 이종족들마저 용의 거처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구경시켜 줄 수 있어. 하늘도, 바다도.’

    ‘바다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해.’

    ‘나는 가능한데.’

    불현듯 언젠가의 밀로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고, 그 안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그 ‘바다’마저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땐 단순한 허풍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밀로는 제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저건 모두 진실.

    “그럼 1차 전쟁 때…… 용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단 소리 아닌가? 인간들은 용의 존재 자체도 몰랐을 테니 암컷 사건과도 무관하고.”

    하지만 밀로는 용의 암컷에 관한 이야기는 제게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숨긴 걸까? 변해 버린 이런 세상에 암컷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하니까, 내게도 숨긴 걸까? 밀로는 제게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을 택하는 편이었다.

    맞아. 1차 전쟁은 용과 무관할 거야. 애초에 1차 전쟁이 가능했던 것도 다 암컷 몸에 넣었던 인식표 때문이었다. 그 인식표가 있었기 때문에 암컷을 죽일 수 있었던 거고. 용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데 인식표를 넣었을 리 없다. 인간의 통제 범위 내에 용은 없었던 거야.

    그럼…… 용은 개체가 안전하다는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결국 끝의 끝까지 살아남는 건 용들이 유일하겠구나.”

    이엘은 고개를 들어 맑고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신께선 모든 종족을 버리신 게 아니었구나. 저기 어딘가에 용들은 계속 살고 있을 것이다. 역시 인간과 엮이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거였어.

    이엘은 그렇게 한참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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