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하트 경. 어서 가까이 와. 그대에게도 주려고 하나 만들었어.”
엉성하게 엮은 화관을 흔드는 여자의 뒤로 금방이라도 본체화를 할 듯한 남자가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걸 받았다가는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서, 하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딱히 노아가 무섭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괜히 연적으로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아서.
……연적. 그래, 내가 폐하께 갖고 있는 이 마음은 연심일까?
“폐하. 그것도 제게 주십시오.”
“공작은 욕심이 많구나.”
“폐하의 손을 탄 것은 무엇이든 갖고 싶으니까요.”
“또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어서 주십시오. 버리면 아깝습니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그녀를 살살 구슬리는 늑대의 모습에 기가 찼다. 잠깐이지만 두 사람에게서 조이나와 시모네를 겹쳐 보았던 제 자신이 순식간에 우스워졌다. 물론 시모네가 제 딴에는 적극적으로 조이나에게 구애하기는 했다마는, 저렇게까지 앞뒤가 다르진 않았다.
그 녀석은…… 그냥 순수했지. 그 순수하고 여린 마음씨 하나로 조이나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시모네는 제가 아는 모든 하이에나를 통틀어 가장 순수한 자였다.
아, 그래. 이제야 알겠다. 끊임없이 그녀를 바라보게 되는 지금의 이 마음은 연심이라기보다는…….
“예쁘구나.”
“…….”
“공을 닮아 참 예뻐, 꽃이.”
“폐하께서 좋으시다면, 이 꽃을 전부 제 영지로 옮기겠습니다.”
“농담도. 지금 이 상태로 공의 영지에 가는 길도 벅차다며. 됐어.”
“그럼 그 화관은 제가 갖겠습니다.”
“그래, 가져가. 욕심도 많구나, 정말.”
이엘이 배시시 웃자 남자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화관 두 개를 모두 가져가서 능력을 사용해 순식간에 얼려 버렸다. 그러고는 화관을 잡지 않은 손으로 이엘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이끌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시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알겠다, 이 마음은 연심 같은 게 아니었다.
이건 사랑. 정확히 말하자면 가족애.
“하트 경. 잘 따라와. 여기서부터는 바닥이 질퍽거리니까.”
“……예.”
저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돌보던 그 손위 누이의 애정 어린 걱정을, 자신의 주군이 제게 하고 있었다.
하트는 그 순간 그토록 부정했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보이지 않는 장벽을 모조리 허물고, 저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녀를…… 저 인간 여자를 나의 가족으로 인정했음을. 받아들이기로.
그녀는 더 이상 조이나의 대신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나의 또 다른 동기가 되어 있었다.
*
간소한 짐만 챙겨 먼저 출발한 선발대는 순식간에 정상을 넘어 반대편 중턱에 도착했다. 확실히 이쪽 길을 자주 오간 노아가 무리를 이끈 덕분에 전보다 속도가 붙었다.
근위대장인 하트의 자리를 대신해 늑대가 무리를 이끄는데도, 하이에나들은 딱히 불만을 갖지 않는 듯했다. 그것마저도 대장인 하트를 닮았다.
사실 노아는 처음 제국이 세워지고 이엘이 자신의 근위대를 하이에나로 꾸리겠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줄곧 불안했다. 겉으로는 폐하의 명령이니 따르겠다는 말 따위를 했지만 속내는 전혀 아니었다. 여전히 제게 하이에나들은 믿을 수 없는 종족이었으니까.
물론 암컷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그들의 습성상, 그녀를 절대 위험에 빠뜨리게 하지는 않겠지만 실전은 마음가짐과는 다른 문제였다. 하이에나는 좋게 말하면 젊은 피가 많았지만, 달리 말하면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제아무리 공격에 특화된 종족이라 할지라도 경험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러나 제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놈들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뭉쳐 있을 때 능력이 증폭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군집력이 좋아질 줄은 몰랐다.
게다가 어린놈들이라 전부 피시처럼 철없고 떼만 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무던하고 차분한 모양새가 근위대장인 하트를 닮아서. 솔직히 어떤 부분에선 자신이 이끄는 늑대들이 더 철없어 보이기도 했다.
“근위대가 훈련이 잘 되었군.”
노아의 칭찬에도 하트는 별 반응이 없었다. 문득 노아는 똑같은 칭찬을 이엘이 했더라면 이 무뚝뚝한 근위대장의 반응이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세쌍둥이라면서 성격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뭐가 됐든 셋 다 제겐 골치 아픈 놈들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하트는 저를 쳐다보는 노아의 시선을 무시하듯 외면하더니, 저 앞에서 분주히 근위대에게 지시를 내리는 이엘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제 주군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적어도 자신에겐 그랬다. 다른 하이에나들은 종족의 리더를 가족보다 우선시하겠지만, 자신은 아니다. 하트에겐 가족이 남다른 존재였으니까.
“근위대장. 잠깐 여기로 오겠나?”
이엘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손짓했다. 하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면서도 쿵쿵 뛰는 제 심장 소리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마음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감정이 달라지는구나 싶어서. 이런 낯간지러운 감정은 25년 만인가……. 피시나 패티스를 향한 마음보다는 조이나를 향한 마음에 더 가까운…….
“생각보다 빨리 산을 넘었어. 쉬지 말고 이대로 곧장 달려서 최대한 빨리 공작령에 도착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폐하께서 피곤하실까 걱정입니다.”
“괜찮다. 오히려 여기서 지체하는 게 더 피곤해. 차라리 공작의 영지에서 쉬는 게 낫겠어.”
“알겠습니다. 조금 더 속도를 올려서 최대한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백조 쪽은 연락이 없었습니까?”
“아직 상황을 살피고 있는 모양이야. 스완의 능력 정도면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까 그쪽은 크게 걱정되지 않아.”
“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세잔티노 습격 때도 느꼈지만 확실히 놈은 보통 고니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능력을 구사한다. 그때는 능력을 사용하는 게 갓 태어난 새끼처럼 미숙하기 짝이 없었는데도 엄청난 범위 내에서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다른 것엔 무관심한 하트도 눈여겨볼 정도로 인상 깊은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경은 스완을 딱히 싫어하지 않는 듯하네.”
“관심 없습니다.”
“패티스는 싫어하던데.”
“패티스는 백조 자체를 싫어합니다.”
“왜?”
“폐하께서 패티스에게 물어보시면 그는 답해 줄 겁니다.”
말할 수 없다는 의미로군. 이엘이 하트를 빤히 쳐다봤지만 그는 입을 다문 채였다. 스완이 자신과 계약을 해서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것 외에도 뭔가 숨겨진 내막이 있는 듯했다.
하트의 말대로 물어보면 답을 해 주긴 하겠지만, 패티스가 말하지 않은 걸 굳이 알아낼 생각은 없으니까.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근위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하트 님. 공작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알겠다.”
하트는 노아가 있는 곳으로 몸을 틀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오늘, 자꾸 잊고 지내던 시모네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무리에서 겉돌던 시모네는 다른 종족에 친한 개체가 많았는데 그중엔 백조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연약한 종족만 친구로 갖는 멍청한 놈이라며, 다른 수컷 우논들이 낄낄거리던 것을 들었으니까.
패티스가 스완을 싫어하는 이유. 물론 백조가 이엘과 목숨을 가지고 계약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패티스는 시모네라고 불리던 하이에나를 그가 죽은 지금까지도 싫어한다. 그러니 그와 관련된 것이라면 치를 떨고 혐오하게 될 수밖에.
하트는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모네.”
노아나 레온처럼 타 종족이어도 우정이 생기는 경우가 왕왕 있다. 모든 종족이 자신들만의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건 아니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이에나는 절대 다른 종족과 친교를 다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폐쇄적이며 독립적으로 살아온 종족이 그들이었으니까. 제 종족 외에는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다.
그걸 깨뜨린 자가 시모네였다.
그는 동족의 비웃음을 사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타 종족에 절친한 친구를 두었고 그중 하나가 백조였던 것이다. 특히 그 백조가 사는 호수에 자주 왕래했기 때문에, 하이에나들은 시모네의 이름만 들어도 백조를 자연히 떠올렸다.
하이에나와 백조가 친구가 된다고? 종족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꼴이라며, 패티스는 시모네와 백조를 싸잡아서 멸시했고 시모네가 죽은 지금까지도 치를 떨고 있다.
“예? 시모네라면…… 그 시모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됐다.”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굳은 하트의 눈치를 살피며 노아의 말을 전언하러 왔던 우논이 빠르게 사라졌다.
근위대장은 자신이지만 어쨌든 종족 자체를 이끄는 수장은 패티스다. 즉, 이곳에서 이뤄지는 일에 관하여 빠짐없이 보고를 받는 것도 패티스란 소리였다. 공연히 시모네의 이름이 근위대 내에 퍼지면 패티스가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니 그 이름은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편이 좋겠다.
패티스가 시모네를 떠올리기라도 하면 곤란해……. 그 이름을 떠올리면 조이나의 이름도 함께 떠오를 터였다. 그녀의 이름이 좋은 쪽으로 추억되면 다행이겠지만 시모네는 안 좋은 과거만 헤집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시모네는 피시의 절친한 친구이자, 세잔티노에 끌려가 무자비하게 도륙당했던 조이나의 하나뿐인 연인이었으니까. 세잔티노에서 피시처럼 그녀를 지키지 못하고 죽어 버렸던, 무능력한 놈이었으니까.
*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을 뵙습니다.”
“알폰스 경. 오랜만이군.”
“폐하를 이렇게 뵐 수 있으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예정보다 빠르게 공작령에 도착한 이엘은 자신을 맞이하러 나와 준 늑대들과 인사를 마쳤다. 부재한 노아와 안드로를 대신해 영지를 지키던 알폰스가 우아하게 절하곤 그녀의 손등 위에 입술을 묻었다가 뗐다.
그 옆에 서 있던 노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영지 상황을 먼저 체크하곤 알폰스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영지를 지키느라 수고 많았다. 별일 없었나?”
“예, 각하. 혹시 안드로 님과 연락이 되셨는지요.”
“걱정할 것 없다. 2기사단과 합류하고 새벽에 습격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겉옷을 벗어 넘겨주던 이엘이 알폰스의 질문에 대신 답했다. 새벽녘, 스완의 능력으로 손쉽게 습격에 성공한 뒤 포로 몇 명을 붙잡아 영지로 돌아오는 중이라고 했다. 예정보다 늦어진 이유는 도착한 뒤에 보고하겠다고 한 걸로 보아,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선은 쉬시는 게 좋으실 듯합니다. 머무실 곳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알폰스. 근위대의 거처를 안내해 주도록.”
“예, 각하.”
하트를 제외한 하이에나들이 알폰스의 안내를 받아 공작성 근처에 배치된 저택들로 사라졌다. 여전히 입매를 고집스럽게 꾹 다문 채, 피로한 기색 하나 없는 하트는 이엘의 뒤를 굳건히 지키고 서 있었다.
“하트 경. 여긴 안전하다. 괜찮으니 경도 조금 쉬는 게 어떠한가.”
“각하께서 오는 길을 이끌어 주신 덕분에 충분히 쉬었습니다. 폐하를 지키는 것엔 어려움이 없을 터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여간 저놈의 고집.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놓고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엘조차 입을 다문 걸 보니, 저가 아무리 말한다고 해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한편 이엘은 떳떳하게 들어온 늑대의 영지를 둘러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가 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삭막하기 그지없었는데, 지금은 온갖 생물들의 생명력이 요동치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폐하. 정원에 가 보시겠습니까?”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노아가 웃으며 정원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관리를 잘해 두었으니 보시기에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럴까.”
언제나 쫓기듯 왔다가 쫓기듯 떠나야 했던 신세라, 영지에 들르긴 했어도 정원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그곳에 묻어 둔 주드 역시 만나지 못한 지 꽤 오래였으니까.
이엘은 노아와 함께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간 노아의 영지도 많은 변화를 거친 덕에 몇 년 전에 저가 살던 곳과는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가는 길목 곳곳은 여전히 익숙했다. 그곳에 쌓아 놓은 추억이 한가득이라서.
“정원 관리는 누가 하고 있지?”
“보통은 앤디가 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짐이 앤디 경에게 일을 많이 준 터라 영지에도 못 왔을 텐데.”
“그럴 땐 제가 하고 있습니다.”
“공이? 직접 한다고?”
“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에 이엘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춘 채 폭소했다.
“공은 땅 파는 것만 잘하지 않던가?”
“……그건 예전입니다, 폐하. 폐하의 어깨너머로 배운 덕에 정원쯤은 손쉽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리고 레온의 도움도 받았으니까요. 가서 보시면 믿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