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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54화 (254/488)
  • 254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숨기는 게 있지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이엘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오드가 자신에게 맡긴 임무라는 점이었다. 그 얘기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신의 뜻이 그렇다는 거겠지.

    노아는 미간을 찌푸린 이엘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웃어 주었다.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그녀의 뺨 위에 입술을 길게 붙였다가 떨어졌다.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폐하.”

    “나더러 알면서 묻지 말라는 거야?”

    “예. 그렇게 해 주십시오.”

    노아가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짓더니 제 뺨에 다시 입술을 짧게 붙였다가 뗐다. 다 알고 저러는 거지. 그렇게 웃으면 내가 아무 소리도 못 하는 걸 다 알고……. 그렇게 중얼거렸는데도 노아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알겠어. 더 묻지 않을게. 다만 그게 위험한 일은 아니길 바라.”

    “예, 폐하. 그런 건 아닙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서로의 비밀을 덮어 주듯 두 사람은 조용히 입술을 부딪쳤다.

    *

    “남은 고서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 그나마 남아 있던 것들은 이전에 뱀의 영지를 습격할 때 전부 태워 버렸으니.”

    패티스는 난감한 표정을 짓는 사서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잰걸음으로 도서관을 나왔다.

    역시 쉽지 않군.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도서관 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놓친 게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황궁 도서관으로 걸음을 향했지만, 역시나 별 소득은 없었다. 애초에 제 1르뷔 제국의 자료는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전소했으니까. ……그런 게 남아 있을 리 없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 거지.”

    내가 인간이었다면……. 그랬다면 나자르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 생각을 하던 패티스가 미간을 좁히며 손으로 제 긴 머리를 쓸어내렸다. 미쳤군. 인간이 어떤 종족인데.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다니,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인데.

    차라리 오드를 찾아가 제대로 설명해 달라고 부탁해 볼까? 어차피 그는 스스로가 그녀를 위해 존재한다고 했으니, 폐하를 위한 일이라면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작은 실마리라도 알 수만 있다면…….

    그러나 곧 고개를 저으며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아냐. 이건 내 힘으로 알아내야 하는 거야. 나만 할 수 있다는 거겠지. 쉽게 알려 줄 거였다면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을 터.”

    그럼 거기서부터 천천히 짚어 보자. 왜 나일까. 나만 할 수 있기 때문이라면, 내가 다른 놈들과 다른 점이 있다는 소린데.

    패티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먼저 자신의 특수성을 생각해 보는 쪽으로.

    제 종족, 하이에나의 권한이 닿는 곳이라고 해 봤자 영지가 전부이다. 그리고 제국이 있던 시절엔 이쪽 영지는 철저하게 고립된 채 살았기 때문에, 직계인 자신이 영지 내의 일을 모를 리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영지에선 별다른 게 없는데.

    그렇게 한참이나 생각을 덧대며 걷던 패티스가 일순 눈을 크게 뜨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세잔티노.”

    그래. 내 영지이지만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곳. 세잔티노가 있었다.

    *

    “차라리 폐하는 나와 경이 호위해서 먼저 영지로 가는 편이 나을 듯한데. 경의 생각은 어떠하지?”

    “폐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또한 저는 폐하의 명만 듣습니다.”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하트의 대답이 딱히 싫진 않았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트를 지나쳐, 그녀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식사를 끝낸 이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그를 발견하곤 먼저 말을 붙였다.

    “출발 준비는 다 마쳤나?”

    “예, 폐하. 바로 출발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지금처럼 근위대가 전부 움직이면 산맥을 넘는 데, 계속해서 시간이 지체될 것 같습니다. 저와 하트 경을 비롯하여 소수의 인원으로 먼저 출발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안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 하루라도 빨리 공작령에 도착해 일 처리를 해야 하니까.”

    미간을 좁히며 다시 생각에 잠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아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시선을 제게로 돌렸다.

    “폐하.”

    “응?”

    “출발 전에 산책이라도 다녀오시겠습니까?”

    “뜬금없구나. 더 지체하면 안 되니 선발과 후발로 나누어 떠나자고 말하던 게 조금 전인데, 산책을 다녀오라니.”

    “너무 피로하신 듯하여.”

    그녀의 눈가를 엄지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잠을 못 잔 탓도 있겠지만, 늘 갑갑한 황궁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정신적으로 시달린 것도 한몫했을 터였다. 노아는 그녀에게 휴식을 조금이라도 주고 싶었다.

    “물론 제 영지에 있는 당신의 정원만은 못하겠지만.”

    농담하듯 제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닥거린 공작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혹시나 밖에서 근위대와 문제가 생겨 제 시선을 돌리려는 건 아닐까 싶었으나 그의 눈엔 거짓이 없었다. 정말 주인과 함께 산책 나가기만을 바라는, 순진한 어린 늑대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엘이 주저하는 듯 선뜻 답하지 못하자, 노아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다시금 다정하게 속삭였다.

    “폐하.”

    “…….”

    “제게 당신의 귀한 시간을 조금만 나눠 주십시오.”

    ……언제나 얼굴로 짐을 홀리는구나. 못마땅한 듯 중얼거리는 이엘의 목소리에 노아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그녀의 앞에 제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청했고,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의 친절을 거절하지 못했다.

    출발 준비를 마쳤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건지, 막사 밖은 짐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하트는 두 사람이 나란히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어수선한 주변을 한 번 훑어본 노아가 하트를 향해 말했다.

    “막사 정리를 하고 있게. 폐하께선 잠시 산책을 다녀오실 것이다.”

    “따르겠습니다.”

    “내가 있다. 경은 남아서 근위대를 정리하도록.”

    “근위대는 폐하의 기사입니다. 멀리서 따르겠습니다.”

    어제 잠깐이지만 이엘을 놓쳤던 것 때문인지 하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그의 고집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노아는 어차피 그가 제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이엘의 의견을 묻기 위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선 그녀가 명령이라도 해 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표정을 보니 놈을 데려갈 생각인 듯하다. 그럼 뭐, 자신이 별수 있나.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 하트 경.”

    노아의 예상대로 이엘은 고갯짓으로 그의 동행을 허락했다. 결국 하트를 뒤에 달고, 노아는 그녀와 함께 산책길에 올랐다.

    딴에는 숨긴다고 노력한 모양인데 불만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이엘은 그런 노아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그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꽃이 만개한 꽃밭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아름다운 꽃을 하나 꺾어서 그의 얼굴 옆에 갖다 댔다.

    “공과 잘 어울리는군.”

    “전에 주셨던 것처럼 화관으로 엮어 주십시오.”

    “……지금 날 놀리는 거야?”

    이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볼품없던 화관을 두고두고 놀릴 생각이지? 샐쭉한 그녀의 표정에, 노아가 스스럼없이 입을 벌리며 크게 웃었다. 그의 미소에 이엘도 투덜거리던 입을 닫고 따라 웃고 말았다. 그 해사한 미소를 견디지 못한 노아가 그녀의 뺨 위에 쪽쪽,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졌다.

    처음 보는 광경도 아니었는데 뒤따르던 하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움찔하며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빴다. 마치…….

    “경. 너무 멀리 있구나. 가까이 와도 돼.”

    황제가 깊은 생각에 잠긴 저를 불렀다. 하트는 그녀의 뒤로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빛 때문에 일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사이 이엘과 노아는 제게서 더 멀어져, 한참 앞에서 걷고 있었다. 어쩐지 두 사람의 뒷모습이 제게 익숙했다.

    ‘요새 누님 곁에 저 자식이 자주 보인단 말이야.’

    ‘……시모네?’

    ‘저러다 누님께서 저놈을 부군으로 들이시면 어떡하지?’

    질투에 사로잡힌 패티스가 눈을 치뜨며 조이나의 옆에 선 어수룩한 미소년을 노려보더니 한참을 씩씩거렸다. 큰 관심이 없던 하트의 시선도 패티스를 따라 조이나와 시모네의 뒷모습에 닿았다.

    시모네. 저희보다 더 어린 우논 소년이었고, 마음이 유약하고 심성이 여려 난폭한 수컷 우논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늘 피시와 함께 서재에서 책이나 보는 소극적인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꼴에 저도 수컷이라고 누님께 꼬리 흔드는 것 좀 봐. 짜증 나는군. 누님께서 저런 별 볼 일 없는 놈을 상대해 주실 리가 있나. 우리 누님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변경백이 되실 위대한 분이신데. 한 번만 더 누님 앞에 알짱거리면 그땐 내가 처리해야겠어.’

    패티스는 시모네를 향해 한껏 욕을 퍼붓더니, 혀를 차곤 성으로 먼저 돌아갔다. 하트 역시 제 동생의 뒤를 따라 성으로 돌아가려다 다시 몸을 틀어 두 사람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체구가 작아 연약해 보이는 여린 소년이, 들고 있던 꽃을 제 누님에게 건네고 있었다. 근데 그 모양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손을 바들바들 떠는 탓에 그 꽃은 그녀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고 말았다.

    ‘그, 그게…… 아, 아가씨께 드리고 싶었, 싶었는데…….’

    ‘예쁘구나.’

    ‘…….’

    ‘너를 닮아 참 예쁘구나, 꽃이.’

    조이나가 떨어진 꽃들을 손바닥에 담아 올리더니 그중 하나를 시모네의 귀 뒤로 꽂았다. 소년의 볼이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게 제법 귀여워 보였는지 그녀가 호탕하게 웃더니 선선히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시모네가 조용히 따랐다.

    ‘시몬.’

    ‘예?’

    ‘뒤에 있으니 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구나. 내 옆으로 오렴.’

    ‘하, 하지만…….’

    ‘어서.’

    그녀의 부드러운 채근에 소년이 머뭇거리다가 종종걸음으로 그 곁까지 다가왔다. 감히 닿을 수 없는 존귀한 존재를 눈앞에 두고, 시모네는 그 거리를 완전히 좁히지 못했다.

    그러나 소년의 팔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 조이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소년과 함께 즐거운 산책을 이어 갔다.

    그래……. 닮았다. 그때의 누님과 시모네를.

    폐하와 늑대 공작이, 무척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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