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53화 (253/488)
  • 253화

    “예, 폐하. 모시러 왔습니다.”

    “못 만날 줄 알았는데.”

    푸스스 웃으며 그녀가 손을 뻗어 잘생긴 남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정말 공이 왔구나. 여전히 잠에 먹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이엘이 한참 만에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오는 길에 별일은 없었나?”

    “에. 스완이 안드로와 함께 경계 지역으로 떠났으니, 뒤탈 없이 놈들을 잘 처리해 생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뒤를 쫓던 놈들은 일이 틀어지자마자 제도로 돌아갔어. 그 얘긴 경계 지역에 숨어 있는 놈들은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라 쉽게 버렸다는 의미지. 어차피 잡아서 신문해도 나올 게 별로 없을지 모른다.”

    “예. 그래서 일부러 도망치는 놈들은 쫓지 말라고 해 두었습니다.”

    어차피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영지 시찰엔 몇 달이 걸릴 테고, 지금보다 더 좋은 시기가 있을 테니 그때를 노리기 위해 간본 게 빤하다.

    문제는 누가 이런 짓을 꾸몄냐는 건데……. 신귀족은 황실에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위치이고, 이종족은 직접적으로 나설 입장이 되지 못한다. 이엘이 보호석을 갖고 있는 데다가 그녀를 공격할 경우 기사단과 성전까지 등을 지게 될 텐데, 그렇게 하면서까지 얻을 만한 수확은 없었다.

    그러니 남은 건 구귀족 세력뿐인데. 문제는 그쪽에도 타당한 이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비록 제 1르뷔 제국 때에 비해 성전과 이종족의 압박이 심하긴 했어도, 2차 전쟁 이후의 삶보다는 처지가 나아졌으니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일 텐데.

    오히려 상황이 조금만 변해도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곳은 그들이다. 구, 신귀족 간 알력은 존재했어도 그녀를 중간에 끼우면서까지 신경전을 할 때가 아니었다. 명분이 없다. 차라리 이전의 턱수염과 같은 자들이면 모를까. 하지만 그들도 정착시켜 놓았고, 주기적으로 정찰까지 하고 있어서 변수가 될 리 없는데.

    역시 윌터 가문이…….

    “폐하.”

    “…….”

    “폐하.”

    몇 번을 불러도 그녀는 자신을 보지 않았다. 가벼운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리 심각한 상황도 아니었기에 노아는 이엘이 잠깐만이라도 쉬기를 원했다. 그는 침대 옆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등 위에 제 손바닥을 올려 덮었다.

    “엘.”

    나지막한 목소리와 온기에 그제야 이엘의 눈동자가 제게 닿았다. 노아는 말없이 다른 손을 뻗어 그녀의 피로한 눈두덩 위에 제 손바닥을 얹어 한기를 흘려보냈다.

    “시원하십니까?”

    “응. 마침 눈이 아팠는데”

    “조금 더 눈을 붙이시겠습니까?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뵈었군요.”

    “아냐. 금방 일어나려고 했어.”

    제게서 떨어지려는 노아의 손을 덥석 잡아, 다시 자신의 눈두덩 위에 그의 손을 올렸다. 사실 노아는 자신에게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끔찍하게 열이 올랐는데, 곁에 오드가 없어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하면 그녀의 몸에 능력을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이엘은 좋았다. 그의 차가운 능력이 자신에겐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워서. 외로운 마음을 늘 그가 따뜻하게 데워 주는 게 좋았다.

    “공작.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도 될까?”

    “물론입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그의 결연한 목소리에 이엘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눈을 덮었던 노아의 손을 내려 제 뺨에 대며, 그 손바닥 안에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노아의 귓불이 점점 붉어졌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순수한 그녀의 모습에 순수하지 못한 자신의 반응이 한심해져서.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걸 새삼 실감해서.

    “미르는…….”

    “예?”

    “미르는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오랜만에 나온 이름에 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망할 용은 제 종족에게 돌아간 뒤로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놈이 떠날 때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이엘이었고, 그녀에게도 떠나는 이유를 밝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엘 역시 자신에게 밀로와 나누었던 이야기는 터놓지 않았다. 말하기 싫은 화제라도 있었나 싶어서 노아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언젠가 그녀가 제게 말할 거라 믿었으니까. 그는 언제까지고 그녀를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보고 싶으십니까?”

    “응.”

    “…….”

    “지상으로 올라와서 처음 사귀었던 친구고 가족이었어.”

    밀로에겐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마치 이온을 지키듯, 이엘은 그 철없는 용을 제 동생처럼 각별하게 여기고 지켜 주었다. 그와 헤어졌던 3년 전의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밀로를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왜 돌아오지 않는 걸까.”

    “폐하.”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데…….”

    밀로는 우논이었고 자신은 인간이었다. 인간은 우논과 달리 수명이 정해져 있으니, 그가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와도 자신이 죽고 없을지 모른다. 밀로도 그걸 알고 있기에, 떠나기 전에 그 이야기를 한 거겠지.

    아니. 그게 아니어도 나는 금방 죽어.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데. 미르. 대체 언제쯤 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위태롭긴 해도…… 나는 지금 제법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데. 나랑 함께하자던 너는 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거니.

    “엘. 금방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용은…… 알려진 게 별로 없나?”

    “예.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도 알려진 게 없습니다. 워낙 제멋대로인 종족이라.”

    “그렇구나. 사실 인간들은 용의 존재조차 모르는 자가 많거든. 동화에나 나올 법한 존재라, 나도 처음 밀로를 봤을 때 깜짝 놀랐어.”

    구름을 잔뜩 끌어모아 제 모습을 숨기기 바빴던 푸른 용이 떠올라 웃음이 터졌다. 그 커다란 덩치로 절대 가릴 수 없는 몸을 가리려 부단히도 노력하던 밀로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

    언젠가 그가 말했지. 자기가 살던 곳으로 가자고……. 만일 그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면, 밀로와 함께 용들이 사는 곳으로 갈 수 있었을까? 아무도 모르는 자신들의 영역에 나를 허락해 주었을까?

    그런데 그곳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나? 어떻게? 이종족이지만 이종족과는 구별된 곳에 살기에 아무도 모른다는 게, 가능한 걸까? 왜? 왜 용들은 따로…….

    깊은 생각에 잠긴 그녀를 깨우듯, 노아가 다시 부드럽게 설명을 이어 붙였다.

    “돌아온다고 했으니 돌아올 겁니다.”

    “응. 알고 있어. 다만 내겐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폐하.”

    이번엔 노아가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제 뺨으로 가져갔다. 이엘은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 보이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칠흑 같은 눈동자는 물기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말씀은, 제겐 너무 아픕니다.”

    “노아…….”

    “우논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영존하지만, 진짜로 영존하는 개체는 드뭅니다.”

    “…….”

    “실제론 병사도 많고, 종족 간 전쟁과 먹이사슬로 인해 쉽게 죽으니까요.”

    특히 인간의 공격은 막아 낼 도리가 없었다. 작정하고 달려들면 이종족은 무력하게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모든 걸 견뎌도 지독히 긴 외로움을, 견뎌 낼 이종족은 별로 없습니다.”

    “노아.”

    “특히 사랑하는 존재가 생기면……. 그 상대가 인간이라면 더욱이요.”

    인간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걸 어릴 때부터 배우며 자라는데도, 이종족은 인간을 쉽게 사랑했다. 그게 자신들을 만든 신의 뜻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면, 인간과 사랑에 빠지면 홀로 남겨질 자신의 처지가 두려워, 결국 영존하는 삶을 포기하고 인간처럼 제한적인 수명이 있는 삶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폐하.”

    “노아.”

    “당신이 없는 세상을…… 더는 생각할 수 없게 됐어요.”

    마지막 말은 내뱉는 것조차 괴로운 모양이었다. 노아가 답지 않게 차오른 감정을 억누르는 동안 이엘은 그의 감정을 함께 나누며 똑같이 슬퍼했다.

    안다. 뭐가 됐든 나는 죽을 텐데.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홀로 남겨질 당신은 얼마나 외롭고 또 얼마나 괴로울지. ……나도 잘 알아, 노아.

    자신에게 죽음은 희생이면서 동시에 도피처다. 살고 싶어도 누군가를 위해 죽어야만 하는 아픔인 동시에, 버릴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이 삶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노아.

    “그래도 좋습니다.”

    노아가 마치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재빠르게 말을 붙였다.

    “제 능력이, 제 힘이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

    “그냥 투정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피곤한 탓에 헛소리를 했구나, 하고.”

    잔뜩 예민해진 신경으로 이엘과 근위대를 찾기 위해 달려왔으니, 아무리 이종족이라 해도 지칠 수밖에 없다. 평소였다면 이런 생각을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낼 리 없을 텐데, 그토록 그리웠던 그녀의 얼굴을 보니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노아는 조금 전의 일을 무마하려는 듯 이엘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조금 더 잠을 청하시겠습니까? 곁을 지키겠습니다.”

    “노아.”

    “예, 폐하.”

    “혹시 무슨 일 있었어?”

    “…….”

    “단순히 피곤해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한데.”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게 아니었다. 노아가 제 눈동자만 봐도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자신 역시 그의 말 한마디로 상태를 알아차릴 정도는 됐다.

    “말해 봐. 무슨 일 있었어?”

    “없었습니다. 전혀요.”

    “아니. 내게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짐짓 미간을 찌푸린 이엘을 바라보며 노아가 침음했다.

    오드가 말해 준 것만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적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그자’는 왜 네게 나타난 걸까. 왜 하필 그게 너였을까. ‘그자’의 존재를 알게 된 게 벌써 몇 년인데, 솔직히 노아는 여전히 ‘목소리’의 존재를 믿지 못했다. 하지만 이엘이 말했고, 오드가 알고, 로빈이 만났기 때문에.

    “공작. 말하라. 무엇을 숨기고 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