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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52화 (252/488)
  • 252화

    “무슨……,”

    “백작. 신께선 나와 같은 존재를 왜 만드셨을까요.”

    뜬금없는 오드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 침묵했다. 그런 패티스를 바라보며 오드가 빙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폐하는 제가 지킵니다. 저는 그러기 위해 태어났으니까요.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오드 님은 언제나 어려운 말씀만 하시는군요.”

    “한 가지 재미있는 얘기를 해 볼까요. 신은 인간들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그 작은 존재를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죠.”

    “…….”

    “그런데 인간들은 신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벌을 받게 되었죠.”

    과거 르뷔 제국에서 있었던 연구들을 놓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1차 전쟁을 이르는 말인가? 패티스는 난해한 오드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질문하는 대신 오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백작. 신께선 이렇게 될 것을 정말 모르셨을까요?”

    “아시고도…… 두셨다는 겁니까?”

    “인간이 신을 떠나는 건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들을 번번이 잡아 주던 자들이 있었죠. 지혜로, 혜안으로, 또는 예언으로.”

    “……나자르. 설마 당신의 종족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신은 인간의 결점을 아시고 나자르를 함께 만드셨다는 건가?

    “인간들의 잔인한 학살이 나자르에게 향했을 때에, 과연 내 종족은 인간과 맞설 힘이 부족했기에 죽었던 걸까요?”

    “…….”

    “우린 신의 뜻에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의 긴 수명도 신의 선물이고, 우리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신의 뜻이었어요.”

    그 얘기는 나자르의 비참했던 학살 역시 신의 뜻이었다는 소리가 된다. 인간의 악하고 약함을 알고 그것을 채워 주려 나자르인을 곁에 붙여 두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그들의 본성에 질려…… 결국 나자르를 도로 데려갔다는 소리인가.

    이번엔 정말 신께서 모두를 버리셨다고……. 모두 끝이라는 소리인가. 그 생각에 잠긴 패티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오드가 협탁에 놓인 화병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살아남은 걸까요?”

    무슨……. 패티스는 의중 모를 말을 하는 오드를 쳐다봤다. 그의 말은 복잡하고 어려웠으나 하나씩 들을 때마다 그간 애매하게 느껴졌던 이상한 점들이 하나둘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나자르 대학살이 벌어졌을 때, 오드는 어린 황자와 황녀에게 빼돌려져 살아남았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어도 황실의 눈으로부터 도망치는 게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눈에 띄는 나자르 특유의 외관은 성력으로 가릴 수 있으니, 어린 나자르라 할지라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도망쳐 숨어 살 수 있었을 테니까.

    결국 그 얘기는……. 나자르인들은 학살을 피하지 못한 게 아니라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이고, 오드만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에 살아남았다는 소리가 된다.

    “신께선 인간을 버리셨지만, 모든 인간을 버리셨던 게 아니에요.”

    “오드 님.”

    “끝내 버릴 수 없었던 인간이 존재했던 거죠.”

    “…….”

    “나는 그를 위해 살아 있는 겁니다.”

    살아남은 게 아니라. 그렇게 덧붙인 제 말에 패티스는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오드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달랬다.

    “폐하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지킬 수 있습니다.”

    “…….”

    “다만 제 손이 닿지 않으면. 그녀가 신을 떠나 다른 것에게 잡힌다면.”

    “다른 것……?”

    “모든 게 무용이 됩니다.”

    젠장!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먹질 못하겠잖아. 패티스는 주먹을 꾹 쥐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드 님. 멍청한 이종족이라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조금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백작. 내 성력은 온전히 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력이 커질수록 신과 더 가까워지고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죠. 그리고 그 성력이 커지기 위해선 신과 인간, 그리고 이종족의 거리가 가까워져야 해요. 즉, 신앙심이 커져야 성력도 커진다는 얘기입니다.”

    “…….”

    “내가 그녀를 지키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큰 성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신과 멀어져서는 안 돼요.”

    오드는 피곤한 표정을 짓고는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마른세수하듯 쓸어내렸다. 이엘이 또 ‘그’를 만났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신과는 멀어질 테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그녀가 밀려날 테다.

    “……그럼 제가 뭘 하면 폐하께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드 님?”

    “백작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

    “아주 먼 곳에서부터 차근차근 짚어 보세요.”

    “…….”

    “그녀와 관련 없다고 생각하고 놓친 것들이 있을 겁니다.”

    먼 곳……. 그렇게 중얼거리던 패티스는 지친 오드가 침대에 눕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그의 침실을 나왔다.

    “르뷔 제국에…… 내가 몰랐던 것들이 있었나.”

    그래. 나자르 대학살에도 저런 비화가 있을 줄 몰랐으니까. 알려지지 않은 게 더 많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끄럽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우선은 천천히 그것부터 뒤져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황궁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

    “폐하!”

    “그렇게 쩌렁쩌렁하게 부르면 짐이 여기 있는 걸 다 알겠구나.”

    그리 큰 소리를 낸 것도 아닌데 이엘이 웃으며 핀잔을 주자 하트도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혼자 생각할 게 많은 듯해서 자리를 이탈하는 것을 알면서도 뒤따라가지 않았던 건데……. 순간적으로 냄새가 사라져서, 하트는 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이런 감정을 또 겪게 될 줄이야……. 마치 조이나를 잃었던 그날의 악몽과 비슷한 느낌을 오랜만에 느낀 탓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 계셨던 겁니까, 폐하. 냄새가 사라져서……,”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짐이 달리 갈 곳이 어디 있겠나.”

    “…….”

    “피곤한데 먼저 들어가도 되겠나?”

    “예. 쉬십시오.”

    떠나기 전, 시종장과 패티스가 짐을 꼼꼼히 챙긴 덕분인지 막사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천막 안으로 들어선 이엘은 차려 놓은 식사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자리에 누웠다.

    ‘그’를 만나는 날이면 언제나 이렇게 몸이 무거워진다. 정신력도 흐릿해지는 듯하고.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이엘은 조금 전에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오빠를 더 안전한 곳에 둘 순 없을까요?’

    ‘네 오빠라면 지금도 내가 잘 보호하고 있잖니?’

    ‘이왕이면 아무도 찾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이엘이 거래에 응한 순간부터 이온과 그녀의 안전을 책임지게 된 건 ‘목소리’였다. 자신이 뱀의 영지에서 죽지 않고 살았던 것을 시작으로, 지난 몇 년간 위험으로부터 수차례 자신을 구해 주었다.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는 언제든 자신이 부를 때마다 응했고, 숨겨 주었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은 없단다.’

    ‘…….’

    ‘이렇게 너처럼 나와 계약해 나의 공간에 들어오지 않는 한.’

    ‘…….’

    ‘그런 곳은 없지.’

    이걸로 확신했다. 역시 그 공간은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위협으로부터 도망칠 때마다 ‘그’는 자신을 그 공간으로 불러들였다. 가장 안전한 곳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아예 오빠를 그곳으로 옮기면……. 그러면 아무도 접근할 수 없을 텐데. 그 생각을 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땅속은 여전히 불안하니까…….”

    제국의 안전을 위해서는 오드의 성력이 크게 요구된다. 예전처럼 이온을 보호하기 위한 결계를 운용하면서 성력을 사용하기에는, 오드에게 부담이 클 터였다. 그래서 이온을 보호하던 결계를 제거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게 ‘그’였다. 이엘과의 약속대로 ‘그’는 그녀와 이온을 지켜 주었고 숨겨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하다. 누군가 이온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라도 할까, 이엘은 그게 늘 걱정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오빠를 옮기고 싶었던 것이다.

    아냐. 그건 너무 위험하다. 오히려 이온을 사지로 모는 꼴이 돼. 이종족들에게 오빠를 들키는 게 두렵다고 ‘그’에게 맡길 순 없지.

    게다가 그 공간은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도 없으니까. 자칫 ‘그’가 공간을 닫아 버려, 자신도 들어갈 수 없게 된다면……. 그러면 이온을 영영 잃게 된다.

    하지만 그런 비슷한 공간이 또 있다면……. ‘그’가 없는 그런 공간이 있다면…….

    모로 누운 채 생각을 덧대던 이엘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런 공간이 있다면, 반대의 공간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완전한 대척점.

    그러니까 ‘그’와 완전한 대척에 선 신의 공간이 따로 있다면…….

    그런데 그런 공간이 존재할까? ‘목소리’는 실체는 없었으나 실재했다. ‘그’가 직접 자신을 만나러 왔고, 자신은 ‘그’의 공간에 초대받았다. 하지만 신은…… 신께선 단 한 번도 자신을 만나 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실재해. 신의 대리인 나자르가 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신의 힘을 빌린 성력이 존재하니까. 만날 수 있을까? 신을…… 신께서 나를 만나 주실까? 신을 만나면 그 공간에, 이온을 숨길 수 있을까?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설령 그런 곳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지도 의문이었다. 이미 신은 우리를 버렸으니까. 어쩌면 ‘그’가 이곳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것처럼, 신께서도 이곳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실지 모르니까.

    그게 아니라면 나와 이온을 이렇게 외면하실 리 없잖아. 그게 아니고서는 나를 이렇게 불우하게 놔두실 리 없잖아. 애초에 이렇게 덩그러니 남겨진 건 신의 뜻이었을 텐데.

    “하지만…… 있기만 하면. 정말 그런 곳이 존재한다면…….”

    이온을 숨길 수 있다.

    아니.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나 역시 그곳에서 편하게 숨 쉴 수 있을지 몰라. 굳이 나를 숨기지 않아도, 이온과 오드와 노아와…… 그리고 모두와 행복하게. 어쩌면 이 악의 굴레를 다 끊어 내고. ‘그’와의 계약도 잊고 시작할 수 있는…….

    그러나 이엘은 곧 생각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뒤늦게 알아차린 탓이다.

    그 말의 의미는 결국 신께서 이 세상을 용서하셔야 한다는 의미였음을, 너무 뒤늦게 알아차린 탓이었다.

    그런 세상은 신의 용서를 받아야만 가능한 곳일 테니까.

    *

    “폐하.”

    험준한 산을 몇 개나 넘어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 헤맸다. 새벽에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 때문에 냄새로 찾는 게 어려웠지만, 노아는 기어이 하이에나 무리를 발견해 합류했다.

    그는 이엘의 막사 안으로 들어와 잠든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꽤나 피곤했던 건지 자신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여전히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엘.”

    감히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제 입술을 짧게 붙였다가 뗐다. 그 작은 변화에 깊게 감겨 있던 이엘의 눈꺼풀이 열렸다.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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