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산을 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대.”
“산? 설마 브라가 산맥을 말하나?”
“아마도.”
“거긴 하이에나가 넘기 꽤 어려울 텐데. 어째서지?”
“원래 가려던 루트가 밖으로 새어 나간 모양이야. 2기사단을 만나기 전에 매복해 있을지 모를 놈들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어. 미행으로 붙은 놈들까지 따돌리려면 산맥까지 가는 데도 하루가 걸릴 것 같아.”
황제가 자리를 비웠으니 그럴 만도 하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건 고작해야 근위대뿐일 테니, 보호석으로 무장만 했다면 하이에나들과 맞붙어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겠지.
그러나 하트가 이끄는 근위대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무장한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박살 내는 게 어렵지 않은 집단이었다. 이전처럼 멍청하게 눈 뜨고 코 베이는 시대가 아니었다. 때에 따라 이쪽도 총을 손에 쥘 수 있으니까.
그래. 그렇게 훈련받았다.
이엘이 하이에나를 이끌기 시작하면서 무너졌던 결속력이 빠르게 회복됐다.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 종족이 하이에나였다. 원래도 동족애가 남다른 집단이니, 그녀를 지키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터였다.
그런데도 맞붙지 않고 굳이 험준하기로 악명이 높은 브라가 산맥을 타고 경계를 넘으려고 한다면, 아마 거기엔 무고한 인간들이 엮여 있기 때문이겠지.
“폐하께선 안드로를 포함한 나머지 늑대들이 경계 지역에 대기하고 있는 2기사단과 합류해 놈들을 생포하라고 하셨어.”
스완의 말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대가 전면에서 나선다면 그들은 이엘을 지키기 위해 민간인의 희생도 개의치 않을 테니 이 일은 자신들이 맡는 게 낫다. 게다가 이렇게 황궁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습격을 노릴 정도면 의외로 조직적인 집단이 아닐 수도 있을 테고.
“허가받지 않은 보호석을 소유하고 있다면 잔챙이일 확률도 커. 우리 쪽이 어느 정도인지 간보려는 수작일 수도 있고. 어쩌면 늑대가 황제와 정말 멀어졌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일지도 모르지.”
노아의 말에 스완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안드로와 함께 그곳으로 떠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되도록 이엘을 맞이하는 쪽으로 합류하고 싶었지만, 노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혈 사태 없이 생포하기 위해선 자신이 필요하다. 또 늑대가 여전히 이엘과 엮여 있다는 걸 감추려면 자신의 능력이 필수니까.
스완이 검은색으로 물든 제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이엘의 안전을 위해 백조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 두었기 때문에 스완은 주기적으로 머리색을 바꾸고 있었다. 이렇게 지낸 것도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여전히 검은 머리카락은 적응이 되질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와 계약했던 5년의 기간도 이제 고작 1년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러니 남은 1년이라도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서.
“내가 안드로와 함께 갈게. 각하는 가서 폐하를 안전히 모셔 와.”
여전히 호칭도 말투도 엉망이고 제멋대로였지만 이제는 서로 간 신뢰가 생겼다. 노아는 굳은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한다, 스완.”
3년이란 시간은 모두의 성장과 함께, 많은 관계를 바꿔 놓았다.
*
제도 동쪽 끝에 위치한 브라가 산맥은 악명 높은 산 중 하나였다. 제 1르뷔 제국이 있을 땐 그 산맥 너머엔 영지가 따로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제도로부터의 접근성도 떨어지는 곳이었다.
“폐하. 조금 쉬었다가 가시겠습니까?”
“아니. 짐은 괜찮다. 그보다 근위대가 걱정이구나.”
아무리 뛰어난 근위대라 할지라도 하이에나였다. 날개 달린 종족이 아니면 누가 됐든 쉽게 오를 수 없는 곳이니 지칠 수밖에. 게다가 이엘을 호위하고 짐을 실은 채 잔뜩 긴장한 터라 피로는 평소의 배로 누적됐다.
결국 산 중턱에서 근위대는 멈춰 섰다. 엄청난 속도로 이틀 만에 산맥이 있는 곳에 도착했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오른 게 고작 산 중턱이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눈앞에 두고 이엘이 탄식했다.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만만치 않구나.”
“야영을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백조와는 연락이 되셨습니까?”
“응. 스완은 안드로 경과 함께 경계 지역에서 2기사단과 합류했어. 그 대신 공작이 이쪽으로 온다고는 했는데…… 우리를 찾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가 없어. 그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우린 이대로 늑대의 영지로 간다.”
“냄새를 잘 맡으니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딱히 불안함 때문에 부정적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하트가 답지 않게 희망을 띤 답변을 건네서 웃음이 터졌다.
“경은 가끔 보면 귀여울 때가 있어.”
웃음을 머금은 말에 하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입가를 가리며 웃는 이엘의 어깨 위에 모포를 덮어 주고는 근위대를 정렬하고 빠르게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이엘은 정신없는 야영지를 훑어보다가 검을 쥔 채 잠시 자리를 이탈했다. 새카만 밤하늘 위에 반짝이는 별이 콕콕 박혀 있는 게, 꼭 그림 같았다. 이렇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안전한 황궁을 벗어나고 나서야 자유를 얻은 기분이었다.
― 폐하. 폐하의 말대로 잠복해 있던 놈들을 발견했어요.
차분해진 머릿속을 찾아든 스완의 말에 평화가 깨졌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미행조와 매복조가 따로 있었던 게 맞군.
황궁을 떠나자마자 은밀하게 따라붙었던 자들을 따돌리느라 이쪽도 꽤나 애먹었다. 이제 미행에 실패한 자들이 어디로 향하는지가 중요하다.
그자들이 매복해 있는 놈들과 합류하는 게 아니라 제도로 돌아가는 것을 택한다면, 스완과 2기사단이 발견한 매복조를 생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매복조를 포기한다는 건, 그 매복조가 잔챙이란 소리와 같으니까.
― 수고했어, 스완.
― 폐하. 잠은 잘 주무시고 계신 거죠?
―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 폐하의 안전이 저와 직결되니까요.
너스레를 떠는 법을 배운 스완의 말에 이엘이 낮게 웃었다. 그의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계약으로 묶인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감정과 정신력이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정말 영혼의 반쪽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그렇게 늘 예민하기만 했던 백조가 그녀에게 민폐를 끼치기 싫다며 감정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엘은 스완의 그런 노력과 애정이 고마웠다.
― 항상 몸조심해요, 폐하.
― 그래. 너도 위험한 일은 늑대들에게 맡기고 되도록 전면엔 나서지 마.
― 당연하죠. 제 목숨이 폐하랑 연결됐는데, 늑대들이 가만히 지켜보겠어요?
그렇게 웃으며 스완과의 연락이 끊겼다. 다시 고요해진 사위를 둘러보던 이엘은 아직 야영지가 시끄러운 것을 확인하곤 조금 더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곳은 제도의 가장 끝, 경계선에 위치한 산이었다.
즉, 성전과 꽤 멀어진 곳. 성전의 영향이 약해지는 곳.
이엘은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곳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눈을 감고 조용히 ‘그’를 찾았다.
*
“오드 님?!”
성전 앞뜰을 거닐던 오드가 별안간 몸을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이 꿇린 채 주저앉았다. 그의 뒤를 따르던 성전기사단이 서둘러 오드의 곁으로 달려와 보호하듯 감쌌다. 오드는 식은땀을 닦으며 놀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곁에 선 단장 사피라의 팔을 붙잡고 일어섰다.
“괜찮습니다. 잠시 현기증이 와서 그런 듯하니 걱정 마세요.”
오드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나긋한 음성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돌렸다. 가뜩이나 이엘이 떠난 터라 제도 내에 있는 사람들의 불안이 가증된 상태였다. 사람들과 오드 사이에 은근하게 퍼진 긴장을 눈치챈 패티스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폐하께서 떠나신 직후라 과로하신 듯하군요. 돌아가셔서 쉬시는 게 어떨까요, 오드 님. 나머지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래요. 부탁합니다, 백작.”
공손히 오드를 배웅한 패티스는 남은 일을 빠른 속도로 수습했다. 황궁 업무를 빨리 마치고 곧장 성전으로 오길 잘했군. 폐하께서 떠난 지 고작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부터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다.
성전을 방문했던 사람들도 오드의 피로를 핑계로 전부 돌려보낸 그는 기사단까지 황궁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성전 안으로 은밀하게 들어섰다.
“오드 님. 괜찮으십니까?”
“아, 백작. 괜찮습니다. 정말로 현기증이……,”
“폐하의 안전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
“…….”
“아니면 백조가?”
패티스는 스완의 존재 자체가 마뜩잖았다. 아니. 마뜩잖은 걸 넘어서 거슬릴 정도였다. 그 약해 빠진 백조가 그녀와 목숨이 이어져 있다니. 덕분에 그런 있으나 마나 한 미물의 목숨도 지켜 줘야 하는 입장이 된 탓에 이따금 짜증이 솟구쳤다. 그 이유 때문이 아니어도 패티스는 원래 백조를 싫어했다.
나날이 그녀와 백조의 상태가 비슷해지면서 패티스는 더욱더 예민해졌다. 이전의 그녀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일 그 자리에 자신들이 있었더라면 그딴 계약은 철저하게 막았을 것이다.
“폐하와 백조 모두 안전합니다. 정말 피로해서 그럴 뿐이에요.”
그렇게 다정하게 웃으며 말하는 것과는 달리 오드의 안색은 여전히 파리했다. 패티스는 일단 잡생각을 집어넣고 그를 부축해 성전 내부 깊은 곳으로 향했다.
가장 안전한 곳에 위치한 오드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치 햇살이 쏟아지듯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력이 제 몸을 감쌌다. 이곳은 어떤 악한 존재가 들어와도 전부 정화시킬 것처럼 정결함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앉으십시오, 오드 님.”
“고맙군요. 이제 그만 환궁하세요, 백작. 황궁을 오래 비워 두어서는 안 되니까요.”
“폐하께선 안전하신 게 확실하십니까?”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기가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