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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50화 (250/488)

250화

물론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말이다. 날 때부터 평탄치 못한 삶이 예정되어 있었던 터라 ‘꿈’이란 단어와 먼 곳에 살았다.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어 아득바득 사느라 그런 걸 꿈꿀 형편도 아니었고.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평범한 삶을 살 수만 있었더라면 기사를 꿈꾸지 않았을까 하고. 스승님을 따라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하고.

“염려 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곧장 성전과 연락을 취하고. 어차피 대부분은 패티스 백이 알아서 할 테지만.”

“……알겠습니다, 폐하. 부디 안전하게 다녀오십시오. 이곳은 제가 책임지고 지키겠습니다.”

“항상 고맙네.”

자신을 향하여 공손히 절하는 초로의 시종장을 바라보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황제인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자신은 그를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처지였다. 황위에 오르고서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기에 쉽게 마음을 주지도 못했다.

늘 곁을 잘 내어주는 게 자신의 커다란 약점이었는데……. 그 3년이란 시간이 많은 것을 바꿔 놓았구나 싶어,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폐하. 떠나실 시간입니다.”

어느새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돌아간 하트가 그녀의 앞에 몸을 숙여 자세를 낮췄다. 이엘은 제 걱정을 하는 시종장을 향해 다시 한 번 미소 지어 주고는 하트의 등 위로 올라탔다.

제 2기사단은 제도 끝에서 대기 중이었으므로 그녀와 함께 가는 것은 하이에나로 이루어진 근위대뿐이었다.

황제의 행렬이라고 보기엔 단출한 구성이었으나 그 위용은 남달랐다. 구경 나왔던 인간들이 지레 겁을 먹으며 뒤로 움찔 물러서는 게 보였다. 인간들에게 신망이 쌓여 가는 늑대들과는 달리, 하이에나는 여전히 인간에겐 경계 대상인 듯했다.

“폐하. 빠, 빨리 돌아오세요……!”

그 두려움을 뚫고 어린아이가 뛰쳐나와 그녀를 향해 작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재질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딱히 쓸 만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엘은 거리낌 없이 허리를 숙여 손수건을 받았다. 아마 아이의 아비가 아이를 이쪽으로 들이민 모양이지.

“고맙구나.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 말렴.”

“네!”

이엘이 다정하게 아이의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자 눈치를 보던 다른 아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한차례 소란이 일었다. 때아닌 소동을 정리하느라 시종들만 고생이었다.

이엘은 아이들의 선망을 받아 주는 척하며 눈동자를 굴려 모여든 인파를 훑었다. 이런 것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기에 마냥 아이들을 다정하게 대할 수 없었다.

이엘은 혼란을 뒤로하고 근위대를 정리했다. 그녀의 손짓에 일사불란하게 정렬을 마치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하이에나들의 시선은 오직 이엘에게만 향했다. 그 모습이 왜 근위대가 하이에나였는가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불식시켰다.

고개를 뒤로 돌려 인원을 파악한 하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것 역시 일종의 황실 행사이니 어느 정도까지는 행진을 이어 가야 했다. 가장 앞서 걷는 악단의 음악 소리에 발 맞춰 하이에나들이 걷기 시작했다.

하트는 킁킁 코로 냄새를 맡더니 이엘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속삭였다.

“폐하.”

“알고 있다.”

“제도의 경계를 넘어서면 곧장 처리하겠습니다.”

“아냐.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겠어.”

이엘은 곁눈질로 술렁이는 인파를 계속해서 주시했다. 아마도 한쪽은 미행을 담당하고, 다른 한쪽은 제도를 담당하겠지.

황궁은 앤디를 비롯한 1기사단, 3기사단과 성전기사단이 단단히 수호할 테니 큰 문제가 없다. 거기다 보호석까지 전부 비활성으로 돌려놓았으니 여차하면 늑대들이 능력을 사용하면 된다.

어차피 제도 내에 성전이 있는 한, 황궁은 건드릴 수도 없고 건드려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보호석의 관할 자체가 오드에게 있으니까.

그러니 기껏해야 제도에 사는 인간들을 인질로 잡거나 오드를 납치하는 것이 전부겠지. 그 또한 미리 대비해 두었으니 문제는 없다.

문제가 되는 건 자신들을 미행할 자들. 이엘은 말없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일라이저의 말대로 정보가 새어 나간 듯했다. 아마 제도 끝에서 대기하고 있을 2기사단과 합류하기 전에 급습하겠지.

“산을 넘는다.”

“산이라고 하시면…….”

“브라가 산맥을 타고 제도를 벗어나 남쪽에서 늑대의 영지로 들어가자.”

“그 산을 넘게 되면, 예정보다 며칠이 더 지체됩니다.”

“차라리 그게 더 나아. 어떤 의도인지, 누가 보냈는지를 파악하려면 상황을 지켜보는 게 낫다. 섣불리 맞부딪치면 이도 저도 안 될 테니.”

“예.”

지체하지 않고 밤을 꼬박 새워 달리면 만 하루 안에 늑대의 영지로 접어들 터였다. 이미 제도와 늑대의 영지가 맞닿은 경계 지역에 제 2기사단이 주둔 중이었고, 노아 역시 늑대들을 이끌고 경계선에 도착할 예정이니 그곳까지만 무사히 도착하면 된다.

그러니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에 숨어 있을 확률이 높다. 경계 지역을 넘지 못하게 하려고.

“아마 미행하는 놈들 외에도, 경계선을 코앞에 둔 마을 몇 개에 은신해 있을지 모른다.”

“근위대로도 충분합니다, 폐하. 차라리 처리하고 넘어가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인질을 잡아 두었다면 곤란해.”

“…….”

“목표는 짐과 인간들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일 테니까.”

이미 즉위 직후, 자신의 임신 여부를 건드려 이종족과의 관계를 한차례 흔들어 놓았다. 신귀족은 적당히 현명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자들이니, 어차피 건드려 봤자 현재로선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했겠지.

그렇다면 남은 건 평범한 인간들과 황실의 관계.

인간들은 오랜 시간을 불안하고 불우하게 보냈다. 정착이란 걸 꿈도 꾸지 못할 만큼, 괴로운 시간이 10년 넘게 지속됐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욕심으로 가득 찬 속내는 감출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인간이 우위를 점한 이 상황을 유지하고 싶겠지.

그러니 설령 신앙이 없다고 해도 성전과 황실에 절박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근위대와 함께 그곳을 지나치다가 매복하고 있던 놈들과 마주친다면? 그들이 마을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면? 하트를 비롯한 하이에나들은 인질로 잡힌 인간들을 희생해서라도 이엘을 지켜 그 자리를 뚫고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겨우 구축한 인간들과 이엘의 관계가 허망하게 무너지겠지. 황실에 실망하고 다시 돌아서게 될 터였다. 지금의 인간들과 황실의 관계는 한없이 얄팍하니까. 놈들은 그걸 노린 것이다.

“근위대는 안 된다.”

“보호석 때문입니까? 그들이 보호석을 갖고 있으면 저희가 손을 쓸 수가 없으니까요?”

“아니. 그대들이 짐에게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엘의 말에 하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의 입장에선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엘은 느릿한 행진을 이어 가고 있는 하이에나들을 바라보며 주먹을 바르쥐었다.

그래, 정말로 인간을 인질로 잡고 있다면……. 근위대는, 하이에나들은 목숨을 다해 그녀를 지킬 것이다. 이엘만 무사하다면 인질이 된 인간들 따위, 근위대는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이엘을 지키기 위해 몇몇 인간들은 희생되겠지. 물론 그게 근위대의 역할이고 하이에나의 습성이니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균열은 그렇게 조금씩 생기는 것이다. 이전에 자신이 사냥꾼 무리를 찢어 놓았던 것처럼 작은 균열은 곧 집단을 와해시키겠지. 이 위태로운 신경전은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무게가 치우치면 금방 끊어지고 말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엘과 인간들 사이가 절대적인 신뢰로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황실에게 쉽게 등을 돌릴 것이다. 자신들을 지켜 주지 못하는 허울뿐인 황제라며…….

그러니 근위대와 함께 그곳을 지나치는 것은 안 된다. 도리어 그들을 지킬 수 없게 돼.

처음엔 그곳에 거주하던 인간들을 대피시킬 생각이었으나 되레 이쪽에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수 있기에 그러지 못했다. 정말로 일라이저의 영지에 세작이 있다면……. 골치가 아프군.

“폐하. 곧 떠나게 됩니다.”

하트의 말에 이엘이 정신을 차렸다. 악단의 연주가 절정을 향해 달릴 때 행진도 끝이 났다. 거대한 하이에나 무리가 각자의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이엘을 태운 하트가 대열을 이탈하며 달려 나가는 것을 신호로 모든 하이에나가 제도 밖을 향해 움직였다.

매일 몰래 이슥한 밤을 틈타거나 도망칠 때나 달렸던 거리를, 이렇게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지나게 될 줄이야. 이엘은 순간적으로 모호해진 감정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트 경.”

“예.”

“경에겐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

“진심으로, 그대에게 미안해.”

다른 자들처럼 무언가를 바라고 제 곁에 머무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근위대장을 자처한 것 또한 아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렇게 스며들 듯 하트는 제 곁을 찾았다. 암컷에 집중하는 하이에나의 습성 때문도 아니었다. 하트의 의중은 좀체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그의 충성도가 이전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제겐 미안하다는 말씀 하지 마십시오.”

“…….”

“저의 군주는 그런 말씀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이상적인 군주란 조이나뿐이겠지. 이엘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을 갈무리했다.

이전에 하이에나의 영지에 머무를 때, 그녀는 하이에나들이 듣는 앞에서 무조건적인 복종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저 서로에게 수지가 맞는 관계가 되기를 바란다고.

그때 하트는 제 말을 듣자마자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회의실을 떠났다. 그의 마음엔 여전히 조이나가 자리하고 있어서.

그래……. 그게 수지가 맞는 관계라면, 내가 기꺼이 너의 조이나가 되어 줄게. 이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매섭게 떴다.

*

“몹시 긴장하신 듯합니다.”

“긴장이 안 되겠어?”

안드로의 질문에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한 노아는 괜히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집무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긴 시간을 체류하는 게 공식적으로는 처음이었다. 이따금 들르긴 했어도 몇 시간을 채 못 머무르다 떠나곤 했으니까.

“준비는 다 됐나? 폐하께서 쓰실 만한 자리는? 청소는 확실히 했지?”

“폐하께서 쓰시는 공간은 언제나 깨끗하게 해 두고 있습니다, 공작님.”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지막까지 준비를 철저히 해 놔. 식사도 신경 쓰고. 폐하께선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실과만 드시니, 그분의 입맛에 맞는 것들로 준비해 두고.”

“예, 각하. 그것 역시 준비를 마쳤습니다.”

“…….”

“각하. 또 명하실 것이 남으셨습니까?”

안드로의 질문에 노아가 고개를 저으며 그만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주인의 고민을 알아챈 안드로는 구석에서 놀고 있던 테르들을 데리고 집무실을 나가 주었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노아의 검은 눈동자가 창밖을 향했다. 그곳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의 주인은 여전히 그녀였지만 더는 그녀의 손을 타지 못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노아는 성을 나와 이엘의 정원을 향해 걸었다. 걸음 하나하나에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여기쯤에서 네가 넘어질 뻔해서 내가 붙잡았고, 저기 저 계단 앞에서 네가 흙 묻은 손으로 나를 향해 인사했고.

그리고 여기서 내가 네게 장미를 선물했지.

“지금은 장미도, 시클라멘도, 아무것도 없는 곳이 되었네.”

씁쓸하게도 이곳의 정원은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주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제겐 한없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이곳을 사랑했던 그녀를 위해 열심히 가꾸고는 있지만…… 역시 이엘이 없으면 이곳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각하!”

그렇게 한참을 넋 놓고 만개한 꽃을 바라볼 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온 스완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일이 꼬였어.”

숨이 벅차도록 뛰어온 스완의 말에 노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백조가 전해 줄 내용은 단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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