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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49화 (249/488)

249화

여전히 귀족식 언사는 복잡하고 귀찮았지만, 그래도 한 종족의 수장으로서 제법 잘 꾸려 나가고 있었다. 물론 얼마 되지 않는 종족들을 신경 쓰느라 제도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건 조금 괴롭긴 했다. 언제든 제 사정거리 안에 그녀가 있어야 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제도와 가까운 영지를 하사해 달라고 졸랐을 텐데요.”

“그런다고 내가 줄까?”

“안 주시면 막무가내로 제도 안에 들어와 살았을 겁니다.”

“살벌한 농담 좀 그만해.”

가뜩이나 야생에서 자란 종족이라며 온갖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데, 제도 사람들 기겁할 일 있나. 웃으며 먼저 마련된 자리에 앉자, 이카르도 그녀의 뒤를 따라와 안내된 곳에 털썩 앉았다. 때마침 안으로 들어선 시종장이 차를 각각 내려놓고 조용히 집무실을 나갔다.

한참 정다운 담소를 나누다가 이카르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와 함께 적막이 찾아왔다. 이엘은 답지 않게 주저하는 그를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한참의 정적이 흐른 뒤에야 이카르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폐하.”

“응.”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뭘?”

“저와 러셀 후작 사이의 일을요.”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저를 쳐다보았으나, 이렇다 할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러셀 후작은 오찬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관식 이후로 3년이 다 되도록 일라이저와 이카르가 직접적으로 대면한 횟수는 한 손에 꼽힐 정도였다. 이 정도면 중간에서 그녀가 조율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혹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다면……,”

“그는 다 잊었어.”

“…….”

“이카르, 그대가 다 잊었듯.”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과거를 놔주라는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전부 잊는 건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그녀의 곁에선 함께할 미래를 꿈꿀 수 있으니 과거를 묻어 둘 수 있었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이카르는 일라이저를 보자마자 첫눈에 그가 자신이 죽이지 못했던 아이였음을 알아챘다. 그는 제 아비를 닮아 고요하고 침착한 눈을 하고 있었는데, 대관식에서 마주친 자신을 무섭도록 냉랭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일라이저도 자신을 알아본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엔 그 어떤 복수심도, 분함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한 종족의 수장을 대하는 냉정한 감정뿐.

“그게 러셀 후작의 행복이야.”

“…….”

“다 잊는 것. 다 삼키는 것.”

르네가 삼켰고, 일라이저가 삼켰고, 이카르가 삼켰다. 그리고 노아도 삼키고 있겠지.

“그게 내겐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지만.”

이카르도 알고 있었다. 독수리와 인간의 행복이 그녀에게 있기 때문에, 삼키고 잊어야 했다는 걸. 그리고 자신 역시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삼키고 잊을 자신이 있었다.

“이카르.”

“예, 폐하.”

“궁금한 게 있어.”

“하문하십시오.”

“내 어머니께선 병환으로 돌아가셨지 않나?”

“예.”

“혹 무슨 병이었는지 알고 있나?”

“알지 못합니다.”

그의 눈동자엔 거짓이 없었다. 이엘은 이카르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 그 즈음해서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졌던 건 사실이다. 흐릿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어머니의 파리한 안색이 깊게 박혀 있으니까.

하지만 왜……. 왜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어느 순간부터 오드에게 말했던 것처럼 기억이 중간중간 잘려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라고 보기엔, 그 이전의 기억까지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그걸 확신하게 된 것은 즉위 후로도 지속되고 있는 이 악몽 때문이었다.

“폐하?”

“어머니가…….”

“…….”

“살해당했을 가능성은.”

“폐하.”

“전혀 없는 건가?”

리카르디스가 죽임을 당해? 이카르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화제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가장 안전한 황성에 있었다. 아무리 황제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한들, 선황과 그녀는 딱히 나쁜 관계도 아니었다. 가장 일반적이고 이상적인 정략혼의 모습이었을 뿐. 그녀의 가문이었던 론 후작가는 황실과 밀접한 관계였기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다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건 그때도 어렴풋하게 느꼈다. 이미 이전부터 황실과 성전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그걸 차치해도 남은 나자르인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듯했다.

외로운 황궁에 리카르디스는 방치됐다. 그녀는 쌍둥이들을 위해 자신의 아픔마저 감췄다. 그렇게 죽어 갔던 것이다. 그러니 살해는 아닐 텐데…….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있다면 두 가지. 하나는 자신의 사촌이었던 카시온의 존재와.

“백작. 가능성은 전혀 없냐고 물었다.”

“……예. 없습니다.”

“원한 살 만한 곳도 없고?”

“선황후께선 심성이 곧으시고 인망이 두터우셨으니 그럴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 알겠네.”

이카르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문 채 이엘을 빤히 쳐다봤다.

그래.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살해라니…….

물론 그녀가 그렇게 쉽게 죽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리카르디스가 꽤 오랜 시간 병마와 싸워 왔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병사가 아닐 리 없다. 말도 안 되는 가정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이엘은 딱딱하게 굳은 이카르를 쳐다보며 애써 웃어 주었다.

“그리 놀랄 것 없어. 그저 궁금하여 물은 것이니.”

“갑자기…… 그것이 왜 궁금하신 것입니까?”

“음, 글쎄. 뒤늦게나마 어머니가 떠올라서?”

“…….”

“백작도 알겠지만 짐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해. 숨어 살았던 10년은 물론이고, 황성에서의 7년도 짐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저 궁금해서.”

“…….”

“그뿐이야. 별일 아니야. 마음에 여유가 찾아오니 이제야 과거를 돌볼 여력이 생겨서.”

말을 마친 이엘이 조용히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여전히 저를 미심쩍게 쳐다보는 이카르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홍차를 음미했다. 얼른 마셔. 그녀의 제안에 이카르도 더는 묻지 못하고 조용히 차를 마셨다.

*

“폐하. 무사히 귀환하시기를, 제가 이곳에서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신께서 함께하시길.”

오드의 축복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선 이엘은 성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황제가 제도를 떠나는 건, 공식적으로는 즉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게 누군가에겐 기대감을 안겨 주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걱정과 두려움을 가져올 터였다.

새로운 제국이 세워지고 권력의 중심은 성전으로 돌아갔다. 신성 제국이란 이름에 힘을 실어 주기라도 하듯 황제는 성전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고, 이종족은 이전처럼 굳건한 신앙심을 갖고 성전을 따랐다.

반면 인간들은 여전히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신을 향해 돌아왔으나 모두가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여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이종족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줄 보호석의 통제권이 성전에 있는 터라, 별수 없이 성전에 기대고 있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그중 평민들은 성전과 황실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들에게 새로운 황제는 불안한 현재를 버티게 해 줄 유일한 존재였다. 그러니 이엘이 영지 시찰로 제도를 떠나게 된 이 상황이 못내 불안한 것이다.

“백작. 그대를 믿고 떠나나 언제나 방심하지 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연락을 취하고.”

“염려 마십시오, 폐하. 폐하께선 건강히 다녀오시는 것에만 신경 쓰십시오. 황궁과 제도는 제가 흐트러짐 없이 지키겠습니다.”

몇 주 전 영지를 피시에게 맡기고 제도로 올라온 패티스가 그녀의 부재를 대신하기로 했다. 즉위한 이래로 제대로 쉰 적이 없으니, 솔직히 이번 시찰을 핑계로 이엘이 조금 쉬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패티스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는 떠나기 직전까지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페루츠 후.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게. 의논이 필요하다면 패티스 백과 성전에 먼저 자문을 구하고.”

“예, 폐하. 책임지고 이곳에 남아 소란이 없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자리를 비운 새에 혼란이 틈타지 못하도록, 이엘은 곁에 서 있던 제 3기사단의 단장을 향해 각별히 주의를 주었다. 어느 때보다 예리해진 표정으로 굳건히 답한 기사단장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확인한 이엘은 앤디에게도 눈짓을 보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세 개의 기사단 중 그녀와 함께 떠나는 기사단은 제 2기사단뿐이었다. 제 1기사단과 제 3기사단은 제도에 남아 따로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다만 황제가 첫 번째로 들를 영지가 늑대의 땅이었기 때문에 1기사단의 단장인 노아는 제 영지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그를 대신해 앤디가 제도에 남았다.

“폐하. 준비를 마쳤습니다.”

하트의 낮은 음성에 고개를 끄덕이며 근위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빠진 것들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철저히 점검하던 시종장이 그녀를 발견하곤 조용히 뒤로 물러나며 허리를 숙였다. 스쳐 지나가듯 본 그의 낯은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제도가 안정을 찾기 시작하면서 몇몇 귀족이 철도 사업에 손을 댔다. 그렇게 제도와 부유한 영지 몇 군데엔 역까지 세워졌지만 이종족은 여전히 인간들의 이동 수단엔 손대지 않았다. 그들에겐 불필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이종족의 영지에도 들러야 하는 이번 영지 시찰에 기차만으로 이동하는 것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그래도 시종장은 그녀에게 기차를 거듭 권했다. 중간에 근위대를 타고 가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이라도 이엘이 편하게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마차에 비해 기차가 빠르고 편하다 해도, 그걸 통해 이동하는 것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빠른 수단이 이엘에겐 있었기 때문에 영지 시찰은 기차를 이용하지 않기로 결정됐다.

그런데도 시종장은 불안한 건지, 모여 있는 하이에나 무리를 힐끔 보다가 다시금 그녀를 향해 공손히 입을 열었다.

“폐하. 기차가 불편하시다면, 마차를 타고 가심이 어떠신지요. 근위대가 아무리 빨라도 늑대의 영지까지 하루는 걸릴 터인데, 밤엔 눈 붙이실 곳이 필요합니다.”

이엘은 난색을 표하는 시종장을 향해 웃어 주었다.

“그대는 모르나 보군.”

“예?”

“짐의 어린 시절 꿈은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

“걱정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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