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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48화 (248/488)

248화

그의 말에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 내던 윌터 백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어린놈이……! 마찬가지로 눈치만 보던 구귀족들이 이때다 싶어 웅성거리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게 다 이 보호석 덕분이지.”

그녀의 목소리에 술렁이던 좌중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이엘은 그들을 향해 자애롭게 웃더니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 녹색 목걸이는 로빈이 직접 골라 보낸 즉위 선물이었다. 햇빛이 비쳐 번쩍거리는 에메랄드 보석의 양옆엔 작은 보호석 알갱이가 박혀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언제가 됐든, 그녀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비단 목걸이뿐 아니라 황궁 곳곳엔 보호석이 박힌 기둥이 상당히 많이 세워져 있었다. 항상 활성 모드로 작동하여 이종족으로부터 황제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걸 이종족이 선물했다. 그들에게 그녀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암컷이었고, 따라서 그녀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떤 한 종족에게 얽매이는 건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죽는 건 안 된다. 그녀가 죽어선 안 돼.

가뜩이나 수명이 있는 인간인데, 공격을 받아 죽거나 다쳐서는 안 된다. 하여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건 이종족이었다. 저마다의 다른 이유로.

그러니 이 보호석이 작동되는 한, 이종족들은 제 능력을 쓸 수가 없다. 다른 이종족으로부터 황제를 지키는 것엔 성공했지만 동시에 자신들도 그녀를 공격할 수 없게 된 셈이었으니 아이러니할 수밖에.

“그대들의 말처럼 현재의 제국은 1르뷔 제국보다 안전하고 완성도가 높다.”

“…….”

“짐이 추구하는 제국의 이상은 1르뷔 제국이 아니네.”

“…….”

“뭐, 그렇다고 해도 1르뷔 제국과 아예 동떨어진 것도 아니지만.”

그러니 식사 자리에서 쓸데없는 말싸움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엘은 조용해진 귀족들을 쓱 훑어보고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서로를 향한 적당한 견제는 나쁘지 않으니까. 만족스러운 결과를 즐기며 자신의 잔에 도수 높은 술을 따르려 하자, 뒤에 서 있던 시종장이 눈치 있게 다가와 조용히 그녀를 말렸다.

“폐하, 이 술은 위험합니다.”

“괜찮은데.”

“몸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 말에 줄곧 모른 척하던 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특히 유클리드의 벽안이 도로록 굴러 그녀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그래, 조심해서 나쁠 게 없겠구나.”

이엘은 그렇게 대답하며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어찌 그런 표정들인가?”

“폐하, 혹 경하드릴 만한 일인지…….”

“왜. 그게 아니라면 또 헛소문을 퍼뜨릴 셈인가?”

“…….”

“질책하는 건 아니니 그리 수그릴 필요는 없네.”

분명 입가엔 자비로운 미소가 걸렸는데, 그녀의 가시 박힌 말에 찔린 자들 몇이 눈을 피했다.

건국 초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이 다시금 회자되는 것이 불편했다. 특히 그때 말을 잘못 전한 구귀족들은 아예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뭐, 경들이 그만큼 짐을 염려하는 것이라 믿겠네.”

“예, 폐하.”

“하지만 왜 하필 임신이니, 유산이니.”

“…….”

“그런 화두뿐인지 모르겠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레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그는 분통이 터졌다. 헛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색출해 본보기로 숙청시키자며 길길이 날뛰었던 것도 레온이었다.

즉위 직후엔 쏟아지는 업무와 신경 써야 할 것들 때문에 끼니도 걸렀더니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속을 게워 내는 일도 왕왕 있었는데, 시종들 중 하나가 그걸 보고 입을 함부로 떠벌리는 탓에 임신이니 뭐니 하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소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산을 했다는 허문까지 돌았을 때, 노아는 직접 단죄를 자처하며 검을 빼 들었다. 그 온순한 일라이저마저 영지 일을 마다하고 곧장 제도로 올라올 정도였다.

“경들의 관심은 그것뿐인가?”

“…….”

“궁금하구나. 대답해 보게. 짐이 후손을 낳아 번식하는 용도인가?”

“폐하! 어찌 그런……!”

“겨우 3년이 지났을 뿐인데, 은근히 짐을 종용하는 모양새가 보여서.”

“…….”

“수컷을 진상하질 않나.”

대놓고 겨냥해도 로빈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는 게 좋았던 건지 입가에 모호한 미소까지 그려져 있었다.

“짐의 훌륭한 근위대의 이름에 먹칠을 하질 않나.”

하트의 아이를 가진 게 아니냐는 헛소문을 퍼뜨렸던 자들이 제 발 저린 듯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애첩이니 뭐니, 짐의 식솔에게 함부로 별칭을 붙이기까지.”

“…….”

“내가 언제까지 경들의 방만한 태도를 좌시해야 하지?”

건국 초기에 임신 소문을 퍼뜨린 건 구귀족이었던 인간들이었다. 이종족이 그녀의 임신 여부에 민감하다는 걸 알아채고 그들을 흔들어 볼 심산이었던 모양인데, 도리어 황제의 화를 불렀다. 노아가 단죄하러 떠나기도 전에 이엘이 소문의 근원지였던 로타르 백작 가문을 색출해 파문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이따위 헛소문을 퍼뜨린 건 구귀족, 너희일까. 아니면 호시탐탐 노리는 이종족, 너희일까.

“어디 한번 말해 볼까?”

“…….”

“윌터 백작.”

“예…… 예, 폐하. 하문하십시오.”

“경은 즉위하기 전에 짐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나?”

“어떤…….”

“제국 역사상 여자가 황제가 된 적은 없다고 하질 않았나.”

“폐, 폐하, 그것은……,”

“그래. 그대는 이런 것을 염려하였나? 짐의 정치는 관심이 없고, 짐의 임신 여부에만 관심이 쏠릴 것을 말이야.”

“……송구하옵니다.”

제게 쏠린 날카로운 질문에, 윌터 백작은 이제 땀이 뻘뻘 흐르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자신에게만 날카로운 시선이 향하는 탓에 잔뜩 긴장했다. ……아들놈이 하는 짓을 막지 못한 죄였다.

이엘은 차갑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무시하며 포크로 실과를 찍었다.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이어 가는 그녀를 제외하고 귀족들은 눈만 뜬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제야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여전히 소란하고 종족 간 자잘한 마찰이 끊이질 않는데, 어찌 그런 것에만 관심을 두는가?”

“…….”

“그토록 황손을 보고 싶다면, 수컷을 갖다 바칠 게 아니라 이 땅을 평화롭게 유지하도록 하게.”

“…….”

“짐은 그대들과 달라. 번식은 나의 책임도, 의무도 아니다. 또한 관심사도 아니지.”

서로 눈치를 보던 이종족들을 향해 특유의 다정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무엇들 하는가? 식사하게.”

언제 긴장감이 감돌았냐는 듯, 태연하게 식사하는 그녀를 지켜보며 이카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잠깐 영지로 돌아간 사이에 또 귀찮은 일이 터졌나 본데. 그 생각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또 한 번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하여 내달 즈음해서 영지 시찰을 나가 보려 하는데.”

“…….”

“경들의 영지가 부디 짐이 흡족할 정도로 평화롭길 바라네.”

이번엔 모두가 미간을 찌푸렸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이제야 개간이 마무리되는 단계였고, 주변 영지와 자잘한 마찰은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오늘 오찬 모임은 스라소니와 모리아의 마찰을 해결하기 위한 자리였다. 평화는커녕 화합도 안 되는 사이인데…….

“건국 초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몰수당하지 않도록 가문과 영지를 잘 다독이는 게 좋을 거야.”

“예.”

“너무 그리들 우울해하지 말고.”

어서 식사하라는 양, 웃으며 손짓하는 황제를 귀족들이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짐은 경들을 믿고 있으니까.”

“…….”

“기대하겠네.”

덧붙여진 말을 들으며 내키지 않는 식사를 이어 가야 했다.

*

결국 스라소니와 모리아의 마찰 건은 손해를 배상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우선 피해를 입은 정도가 양측 모두 비슷했고, 서로에게 처벌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이종족이 각각을 대변하여 항의한 것과는 달리, 당사자인 스라소니와 모리아 측이 더 이상 문제가 커지길 원치 않았다.

“러셀 후작에게 연락을 취해 모리아로 사람을 보내라고 전해.”

“예, 폐하.”

“그리고 가는 길에 성전에 들러 오드에게 포필렌에 관해 상세히 조사해 달라고 전해 주고.”

그녀의 명령을 받은 앤디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사실 포필렌 꽃도 꽃이지만, 회의에서 불거졌던 윌터 백작과 유클리드의 언쟁이 더 신경 쓰였다.

분명 윌터 가문과 유클리드는 서로 친분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교류하고 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인간과 이종족 관계이니 마냥 동맹처럼 지내진 않겠지. 그러나 그걸 차치해도 모리아 측을 대변하는 백작의 노성은 의문을 가지기 충분했다.

모리아는 현재도 영주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소유권을 주장하자면 황궁에 속한 곳으로 보는 게 맞다.

그런데 윌터 백작은 왜 그렇게나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을까. 단순히 ‘인간’의 입장에서 나섰다고 보기엔 정도가 과했다. 마치 저가 그 땅의 대변인이라도 된 것처럼.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문을 두드리며 들어선 이카르가 절도 있게 귀족식 인사를 취하곤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흉터가 깊게 자리 잡은 보조개가 움푹 팼다. 이엘은 짧게 눈짓하며 그를 반겨 주었다.

“오랜만이네.”

“예, 영지 일이 좀 복잡하게 꼬여서 늦게 출발했습니다. 모임 전에 배알을 청하고 싶었는데,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습니다.”

“시종장. 차를 좀 내오게.”

“예, 폐하.”

명령을 받은 시종장이 나가자 이카르는 뛰어오다시피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그의 말처럼 오랜만에 보는 터라 그를 보는 이엘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이카르는 다시 호쾌하게 웃으며 저를 쏘아보는 이엘에게 핑계를 붙였다.

“제가 그간 폐하를 얼마나 뵙고 싶어 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런 자가 제도엔 좀체 오지도 않고 영지에만 있는 건가?”

“일이 너무 많아서 그랬습니다. 혹시 삐치셨어요?”

“백작은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그녀의 핀잔에도 이카르는 반박하지 않고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여전히 그는 이엘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패티스의 말처럼 동족이란 무리가 생기고 영지까지 하사받고 나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전처럼 그녀의 곁에 붙어 있을 순 없게 됐지만, 여전히 그는 이엘의 보호자였다.

그래서 이엘의 얼굴 위에 생긴 작은 균열에도 금세 그녀의 기분을 눈치챌 수 있다.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열받으셨습니까?”

“백작은 정말 소문에 무지하구나.”

“저는 폐하의 말씀만 들으니까요. 헛소문 같은 건 관심도 없고.”

“그게 좋을 때도 있네.”

그의 쓸데없는 우직함에 오랜만에 웃음이 터졌다. 손등으로 괜히 입가를 가려 웃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던 이카르는, 뭔가 퍼뜩 떠오른 건지 그녀의 손을 잡아 반지 위에 입술을 묻었다가 뗐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입궁을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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