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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47화 (247/488)

247화

“예, 폐하. 오찬 모임 때에 이에 관한 처벌은 응당 받겠습니다. 다만 저는 저희의 상황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배알을 청했습니다.”

만일 이게 다른 종족이었다면 꽤나 억울한 내용이었을 테지만 상대는 유클리드 백작이었다. 여전히 그는 그녀의 신뢰 범위 밖의 존재였다. 게다가 조금 전에 피시를 통해 알게 된 윌터 백작 부자와의 관계도 미심쩍었으므로.

그러나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스라소니들이 인간을 죽인 것은 약 때문일 것이고, 되레 유클리드는 신속한 판단으로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소리가 된다. 그 호전적인 유클리드가 살생을 피했다는 선례는 인간과 이종족에게 각각 다른 의미를 남길 테니……. 일이 복잡하게 됐다.

우선 이엘은 그를 알현실에서 내보내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손바닥엔 붉은 꽃이 다 시들어 버린 채 늘어져 있었다.

자신도 이 꽃의 효능을 겪어 봐서 잘 알고 있다. 정신을 잃은 레온을 위해 아주 잠깐 제 입 안에 머금었을 뿐인데,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쓰러졌던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하필 모리아일까…….”

모리아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 땅은 이미 오래전부터 버려졌고, 작물일랑 키워 볼 생각도 못 했을 텐데. 실제로 모리아에 살던 인간들의 상당수가 제도로 거주를 이전해 왔다. 제도에서 살 수 있게 되었는데 구태여 그 척박한 땅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그곳에 남아 있는 자들이라곤 주변의 광산업에 종사하는 이들뿐이었다.

누군가 그 땅에 자리를 잡은 것일까, 아니면 내 눈을 속이려는 걸까.

똑똑. 때마침 알현실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폐하. 늑대의 공작이 배알을 청합니다.”

시종장의 목소리에 이엘은 생각하던 것을 접어 두어야 했다.

*

알현실 안쪽 그녀의 개인 서재에 자리가 마련됐다. 하트까지 전부 물리고 나서야 문이 닫혔다.

“폐하. 배알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귀환 신고가 너무 늦었군.”

“이전에 왔을 땐 폐하께서 부재하셨기에.”

“꼭 짐의 탓으로 돌리는 것 같은데.”

“그렇게 들리셨다면 따로 변명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이후론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창밖을 한참 바라보던 이엘의 곁으로 노아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내밀었다. 이윽고 제게 다가온 그녀의 손가락에 걸린 녹색 반지 위에 입술을 짧게 붙였다가 떨어졌다.

“당신의 검이, 내리신 명령을 수행하고 무사 귀환 하였음을 보고드립니다.”

늑대들은 하이에나가 황제의 근위대가 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 아무리 대외적으로 그녀와 늑대의 사이가 예전만 못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해도,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안전이 달린 문제에까지 정치적 입장을 섞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이에나보다 늑대의 실력이 더 우세하다는 것엔 어떤 종족도 이견이 없을 터였다. 늑대는 제 1르뷔 제국 때부터 유서 깊은 기사 가문이었다. 그들과 비등했던 러셀 가문의 2기사단엔 남은 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황제의 근위대를 뽑아야 한다면 그 자리는 응당 늑대들의 것이어야 했다.

늑대들이 그녀를 설득했다. 아무리 늑대가 황제에게 선을 긋고 있는 입장이라 할지라도 근위대만큼은 자신들이 맡아야 한다고. 그녀의 말대로 중립을 지키고 있으니 근위대를 맡아도 타 종족에게 의심을 살 리 없지 않냐고.

그러나 이엘은 하이에나를 그녀의 근위대로 삼았다. 그리고 그게 늑대와의 불화설에 더 힘을 실어 주게 됐다.

“공은 여전히 불만인가 보군.”

“…….”

“여전히 거짓말로 감출 생각도 없어 보이고.”

술렁이며 반발하는 종족을 잠재운 건 노아였다. 가장 큰 충격을 받았으면서 그는 묵묵히 이엘의 명령에 따랐다.

“예, 폐하.”

“…….”

“저는 황실의 검이 아니라, 당신의 검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둘만 남겨졌을 때까지 속내를 감추고 싶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 안에 다시 열기가 담겼다. 새카만 눈동자를 바라보던 이엘은 짧게 탄식하며 잡힌 손을 빼내고 손등으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고집도 세.”

“폐하를 닮아서.”

“할 말을 잃게 하는 것도 여전하고.”

“…….”

“노아.”

“예, 폐하.”

“고민이 많아 보여.”

일어나라는 제 손짓에 남자가 일어섰다. 뜨거운 햇볕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느라, 이엘은 제 얼굴에 닿는 빛을 느끼지 못했다. 일순 눈가에 빛이 얼비치자 저도 모르게 한쪽 눈을 감고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노아의 커다란 손바닥이 다가왔다. 그의 손등 위로 따뜻한 빛이 스며들고, 그녀의 얼굴 위엔 시원한 공기가 달라붙었다. 잠시 어두워졌던 시야에 노아의 얼굴이 점차 선명해지더니, 이내 뚜렷한 이목구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정작 노아는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빛에만 집중하느라 제 얼굴이 뜨거워지는 건 모르는 듯했다. 그것마저 닮았다. 이엘이 야트막한 미소를 짓자, 그의 입꼬리도 조금 흔들렸다.

노아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당신께 미움을 받지 않을까 고민 중입니다.”

“내가 공을 미워해?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제겐 별걱정이 아닙니다.”

그녀가 이맛살을 구겨도 노아는 좋았다. 진솔해질 수 있는 시간이 그에겐 한정적이니까. 오드가 제게 준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눈앞이 아득해져서 숨이 막혔다.

그러나 노아는 그녀가 걱정하기 전에 표정을 갈무리하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별관엔 무슨 일로 가셨습니까?”

“업무에 지쳐 도망쳤을 뿐이야.”

“…….”

“정말이야. 걱정할 필요 없어.”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십니까?”

그러나 그녀는 제 물음에 답을 주지 않았다. 무감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글쎄. 꾸는지 안 꾸는지 모를 정도로 푹 자느라 기억이 나지 않아.”

그러나 노아는 금세 알아챘을 것이다. 결국 그것 때문에 잠자리를 별관으로 옮겼다는 걸. 이엘은 제 꿈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노아에게 털어놓았지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이를 테면 르네가 자신을 죽이던 2차 전쟁 때의 기억이라든지, 다른 여자의 모습에 들어가 선황에게 죽임을 당하는 꿈이라든지. 또 혹은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라든지.

그런 쓸데없는 것들이나, 걱정을 떠넘기고 싶지 않은 것들은 조용히 삼켜 버렸다.

“곁을 지키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공은 짐의 명령으로 떠났던 것이니, 그대에겐 죄가 없어.”

“폐하.”

“응.”

“이따금 제국이 건국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귀 뒤로 넘겼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이엘의 얼굴을 가리자, 노아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걷어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평소와는 다르게 무겁게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다.

“제가 왕이었고, 당신께서 제 백성이었던 그때로 말입니다.”

“공이 후회할 줄은 몰랐는데. 권력이 탐이 나는 건가?”

이엘의 우스갯소리에도 그는 웃지 않았다. 그저 간격을 더 좁혀 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윽고 정염이 전혀 담기지 않은 경건한 입맞춤이 이엘의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사뿐히 닿았다가 떨어진 차가운 입술이 열리며 조용히 제 마음을 토해 냈다.

“그렇다면 명령을 해서라도 당신을 닦달했을 텐데.”

“…….”

“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고,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강제성을 띤 명령에만 너는 입을 열 테지.

그러나 노아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시간을 돌려 그때의 관계로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은 그녀를 채근하며 강제할 수 없을 거라고.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하찮은 이유부터, 그녀의 소중한 피붙이를 죽였다는 무거운 죄책감까지. 그저 말뿐인 후회였다.

……그리고 정말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아프고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해 주고 더 많이 선물을 주고 더 많이 웃게 해 주고 싶겠지. 그저 돌아간 시간만큼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단 생각뿐이겠지.

그게 그녀와 자신의 수명 차이니까. 아버지가 삶의 마지막을 왜 그토록 허무하게 버렸는지, 노아는 진심으로 알 듯해서 실소하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위험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아무리 이런 멸망뿐인 세계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녀가 짧은 생을 살고 떠날 인간이라는 것엔 변함이 없어서. 결국 나는 네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우논이니까.

“아닙니다. 그냥 묻지 않겠습니다.”

“공.”

“그냥 제 곁에 오래도록 머물러 주세요.”

“…….”

“당신이 저를 사랑하게 만들었으니, 제발 그것만은 책임져 주십시오.”

차가운 그의 입술이 나붓이 날아와 따뜻한 그녀의 입술 위를 아프지 않게 베어 물었다.

*

사전에 양해를 구한 귀족들을 제외하고, 초대장을 보낸 자들은 모두 착석했다. 오랜만에 복작해진 만찬실 안엔 악단의 아름다운 연주가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엘은 상석에 앉아 식사를 하며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네. 후작의 손주가 이번 서임식에 참여한다고?”

“예, 폐하.”

“축하하네. 가문에 큰 경사겠어.”

“영광입니다, 폐하.”

그러나 모두가 즐거운 오찬은 아니었다. 인간과 이종족 사이의 눈치 싸움은 물론이고, 같은 인간끼리도 구귀족과 신귀족 사이에 알력이 존재했다. 황제를 알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신귀족일수록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윌터 백작이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악단의 연주가 끝나는 바람에 그의 혀 차는 소리가 만찬실에 울려 퍼지고 말았다.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해졌다. 비뚜름하게 앉아 와인 잔을 흔들던 백작은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고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상석에 앉아 귀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황제의 눈빛이 제게 닿았기 때문이었다.

“윌터 백.”

“예, 예. 폐하.”

“오랜만에 입궁하니 어떤가?”

“조, 좋습니다. 제도의 발전이 놀라울 정도로 빨라, 이전의 모습을 금세 되찾을 듯싶습니다.”

“음, 그래? 백작은 제 1르뷔 제국이 그리운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폐하. 어찌 그런…….”

“최근 윌터 남작이 손을 댄 사업마다 번창하고 있다는데.”

“아직 미숙하여 많이 모자랍니다.”

“언제 한번 남작과 함께 입궁하게. 짐이 남작에게 꽤 관심이 생겨서.”

“영광입니다, 폐하.”

땀을 뻘뻘 흘리던 백작은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애써 어색해진 분위기를 피해 버렸다.

“백작의 말처럼 제도의 발전이 놀랍습니다, 폐하. 그러나 저 역시 윌터 백작의 말에 다소 어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제국이 과거의 영광을 좇아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 황궁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안전하니까요.”

윌터 백작의 말실수를 놓치지 않은 신귀족 중 하나가 이엘을 향해 웃으며 제 생각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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