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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46화 (246/488)
  • 246화

    저 멀리서 달려오다시피 다가온 시종장의 말에 이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오찬 모임 때 보아도 되거늘 굳이 알현을 청하다니. 하여간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성미는 여전하다.

    지난달에 있었던 마찰 건이 꽤나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정치적이니 뭐니 하는 복잡한 이유로 움직이지 않는 그 유클리드가 이렇게 독대를 청해 온 걸 보면. 이엘은 윌터 남작과 유클리드의 얼굴을 나란히 떠올렸다가 이내 피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쉽지만 오전 티타임은 이것으로 마치는 게 좋겠네. 남작도 짐과 함께 가겠나?”

    “예, 폐하. 광영입니다.”

    하트는 이엘의 뒤를 따르며 시종들의 태도에 주의를 기울였다. 황궁에서 일하는 모든 자들이 황제파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미묘한 변화가 있으면 그가 알아채야 했다. 그게 패티스가 형제에게 내린 임무 중 하나였다.

    그의 또 다른 형제는 미끼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중이었다. 그녀가 즉위하기 직전까지 스스로의 쓸모를 고민하던 피시는 패티스의 조언 하나로 그녀를 위한 미끼가 되었다. 아직 멀었다고 평하기는 했어도, 하트 역시 피시의 성장에 매일같이 놀라고 있었다.

    반쯤 미쳐 버렸다던 하이에나의 셋째 왕자는 이제 황제의 애정을 듬뿍 받는 존재가 되었고, 능력도 쓸 줄 모르는 무능한 그에게 황제는 남작의 작위까지 내려 주었다.

    게다가 그는 황제의 별관에 따로 허가 없이 출입할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이엘은 하이에나에 속했기 때문에, 정신만 온전했다면 부군의 자리는 응당 그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큰 지지를 받았다.

    그러니 황제에게 줄을 대고 싶은 자들이 하이에나, 특히 피시에게 접근하는 것도 당연하다. 제정신이 아니니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기 좋은 상대가 되었다며. 그 역할을 피시는 제법 잘 해내고 있었다.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을 뵙습니다.”

    정복을 잘 차려입은 훤칠한 미남자가 황제를 발견하곤 공손히 절했다. 그녀의 손짓에 자세를 바로 세운 유클리드가 이엘의 손등 위에 입술을 묻었다가 뗐다.

    “폐하. 배알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에게 고마워하게.”

    “…….”

    “남작이 짐의 기분을 썩 좋게 해 주었거든.”

    유클리드의 노련한 눈동자가 그녀의 곁에 선 피시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어리숙해 보이고 불안정해 보이는 멍청한 하이에나. 겨우 저딴 것에 우리 폐하께선 마음이 약하시다니, 쯧. 저런 타입을 좋아하셨던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그렇게 무례히 굴지 않았을 것이다. 저놈처럼 살살 비위를 맞췄어야 했나.

    뭐, 그래도 아직 놈이 폐하의 옆자리를 꿰찬 건 아닌 듯하니. 흡족히 웃는 유클리드의 눈동자가 이엘의 배 쪽에 닿자, 하트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불경한 짓 하지 말라는 듯한 그의 표정에 유클리드는 다시 천연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근위대장이 이토록 충성스러우니 소문이 돌 만합니다.”

    “소문이라?”

    “폐하께서 근위대장의 아이를 가지셨다는 소문 말입니다.”

    평화로운 정원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닌 척하며 은근히 눈치를 보던 시종들도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과연 그게 소문일까?”

    “예?”

    “재미있구나.”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이엘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유클리드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유클리드의 시선이 첨예하게 닿는 것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 구는 게 퍽 재미있었다. 그녀의 소소한 즐거움을 눈치챈 건지 하트도 별달리 반박하지 않았다. 가타부타 반응하지 않는 근위대장의 태도 때문에 이런 신빙성 없는 소문에도 힘이 실리는 모양이었다.

    “폐하.”

    “알현실로 따라오게. 거기서 이야기하지.”

    “예.”

    유클리드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르며 사정을 살폈다. 자신이 심어 두었던 시종 하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도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건지 슬쩍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그래, 백작. 이렇게 이른 시각부터 짐을 찾아온 이유는 뭔가?”

    알현실에 들어서고 시종장을 비롯한 많은 수의 시종들이 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곁엔 여전히 하이에나 두 마리가 떡하니 머물러 있었다. 유클리드는 선연한 얼굴로 웃으며 그녀가 손짓한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폐하께만 조용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근위대장은 머물러 있고, 남작은 나가 있게.”

    “예, 폐하.”

    피시는 순종적으로 묵례하며 알현실을 나갔고 하트는 흐트러짐 없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이런, 아직도 날 못 믿나? 근위대장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 유클리드는 사특한 속내를 숨기며 별안간 제 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트의 긴 검이 그의 목을 겨누었다. 날카로운 날이 피부에 닿자, 새빨간 피가 주르륵 흘렀다. 미간을 찌푸린 유클리드를 향해 하트가 낮게 경고했다.

    “백작.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소.”

    “내가 설마 이 넓은 황궁에서 폐하를 죽이기라도 하겠나?”

    “…….”

    “검 치워. 근위대장 따위가 막을 일이 아니다.”

    짜증 섞인 유클리드의 노성에도 하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빌어먹을 하이에나를 노려보다가 그 너머에 앉아 있는 이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재미있다는 듯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확실히 3년 전과 다르다. 아닌 척해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그녀에게서 소름 끼칠 정도로 선황을 닮은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유클리드는 해사하게 웃으며 황제에게 아뢰었다.

    “폐하. 억울합니다. 제가 어찌 감히 폐하께 나서겠습니까?”

    “…….”

    “저는 그저 폐하께 드리고 싶은 선물이 있어 배알을 청했을 따름입니다.”

    하트의 감시 아래 그는 품 안에서 웬 상자 하나를 꺼냈다. 검수하지 않으면 이엘에게 전해지지 못할 것을 알기에, 유클리드는 군말 없이 상자를 하트에게 건넸다. 하트는 여전히 유클리드의 목에 검을 갖다 댄 채 작은 상자를 열었다.

    “이전에 모리아에서 있었던 전투는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었지.”

    “그리 말씀하신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엘은 하트를 저지하며 상자를 받았다. 그 안엔 시들어 버린 붉은 꽃 한 송이가 담겨 있었다.

    “포필렌 꽃입니다.”

    포필렌이라면 진통에 효과적이나 그 약효가 너무 강한 탓에 함부로 오남용해서는 안 되는 약초의 이름이었다. 이전에 레온의 영지에서 그의 통증을 줄여 주기 위해 이엘이 가져왔던 꽃이 그 포필렌이었다.

    “모리아에 대규모로 재배되고 있더군요.”

    “포필렌이?”

    “네. 그로 인하여 저희 아이들이 꽤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말도 없이 출정하였던 것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유클리드가 자리에서 내려와 그녀의 앞에 몸을 낮췄다. 지난달 모리아에서 작은 마찰이 있었고, 그로 인해 인간과 스라소니 몇이 다치거나 죽었다. 다시 불거지기 시작한 종족 간 마찰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건국 시 세웠던 제국법은 종족 간 전쟁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라소니에게 엄벌을 내려야 한다며 인간들 쪽에서도 아우성이었다. 이에 관한 보고도 끊임없이 쏟아져, 오늘 오찬 모임 역시 열리게 된 것이 아니던가.

    유클리드는 생각에 잠긴 이엘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뗐다.

    “제국법은 종족 간 전쟁을 발발시킬 만한 학살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

    “알면서 짐의 허락 없이 함부로 출정하였나. 모리아의 주인이 누구인지 잊었어?”

    “처음엔 그저 포필렌이 재배되는 곳만을 불태워 버릴 심산이었습니다.”

    모리아는 워낙 척박하고 황량해 개간할 수 없이 버려진 땅이다. 그러나 포필렌 꽃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홀로 잘 자라는 꽃이었다. 거름이 따로 필요 없었고, 도리어 주변의 식물을 잡아먹어 세력을 키웠다.

    자연에서 한두 송이가 피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었지만, 재배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본격적으로 확장된 것은 들어 보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전의 제국에서도 포필렌은 금지된 약초가 아니었다. 딱히 쾌락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그저 진통 효과만 강할 뿐이라, 이전의 제국에선 크게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그곳은 그깟 꽃보다 좋은 것들이 넘치는 곳이었으니.

    그러니 지금에 와서도 그걸 본격적으로 재배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고, 알았다고 한들 금지시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꽃은 레온의 숙면을 위해 그의 영지에서 일부가 자라고 있으니까.

    “……백작의 말대로라면 모리아의 인간들이 작정하여 포필렌을 재배하였고, 그게 그대의 종족에 해가 되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유클리드가 선을 넘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인간과 이종족은 서로를 위협할 만한 일이 생기면 귀족 간 회의뿐 아니라 황궁과 성전의 허가를 받아 일을 처리해야 한다. 물론 위급 시엔 이 모든 과정을 전부 진행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성전의 허락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유클리드는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해결했다.

    “저희 아이들이 포필렌에 중독되어 모리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말았습니다.”

    “…….”

    “종족 간 전쟁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저희 종족이 처벌을 받을 듯해서 급한 마음에 원인이 된 꽃밭부터 불태워 버렸음을 폐하께 거짓 없이 고합니다.”

    포필렌이 이종족에게 미치는 영향은 알려진 게 없었다. 인간이 오남용했을 때에 환각이 나타날 수 있고, 심하면 중독되어 죽게 된다는 것 외에는.

    레온이 복용했을 때는 괜찮았지만, 그는 우논이었다. 어쩌면 우논과 테르의 신체적, 능력적 차이가 크니 효과도 다르게 나타날지 모른다.

    그의 말대로 약에 취한 스라소니들이 인간들을 학살하고 날뛰었다면 이는 즉각 처벌을 받아야 한다. 심각할 경우 종족의 고립까지도 염두에 둘지도. 그래서 유클리드는 종족의 수장으로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모리아에 쳐들어가 꽃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백작이 내 명령과 법을 어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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