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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45화 (245/488)
  • 245화

    “억지 부리지 마. 오찬 모임을 준비하시려면 시간이 걸린다.”

    딱딱하게 쏟아진 하트의 경고에 피시의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이엘은 풀이 죽은 피시와, 무감한 낯의 하트를 번갈아 쳐다봤다. 처음 봤을 땐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의 외형이 상당히 달라졌다.

    물론 패티스도 마찬가지다. 셋을 나란히 세워 두면 이젠 쌍둥이보다는 그냥 형제에 가깝게 보이지 않을까? 그 생각에 이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두 하이에나가 의문을 담고 그녀를 쳐다봤다. 음, 또 저러니까 닮았네.

    “폐하. 왜 웃었어요?”

    “그냥. 아침에 눈을 뜨고 본 게 경들이라서.”

    “…….”

    “좋아서 웃었어.”

    그녀의 싱그러운 답변에 하트는 평소처럼 무표정했고, 피시는 귓불까지 붉어졌다. 반응도 저렇게나 다르네. 이엘이 웃음을 삼키며 어깨에 내려앉은 숄을 안으로 조금 더 당겨 여몄다.

    “그나저나 패티스는? 백작은 함께 오지 않은 건가?”

    “네, 폐하. 패티는 시키신 일을 영지에서 마무리 짓고 온다고 했어요. 오찬 모임은 제가 대신 참석하겠습니다.”

    하이에나들은 변경백 자리를 더 이상 비워 둘 수 없었다. 작위도 없는 종족이 황제의 곁을 보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하트가 스스로 이엘의 근위대가 되겠노라 선언했고, 그게 기꺼웠던 패티스 역시 흔쾌히 백작 위를 계승했다.

    그 외에도 선별한 몇 가문의 작위를 높여 주었고, 신흥 세력에게도 걸맞은 작위를 내려 주었다. 누군가에겐 고작 3년밖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이쪽은 벌써 3년이나 지났다고 표현할 만큼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이제 슬슬 눈치 싸움을 할 때도 되었단 소리였다.

    “접선을 요청한 손님이 꽤 많았거든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도록.”

    “그 전에, 폐하. 받아 놓은 목욕물이 다 식겠어요. 먼저 씻으시고 나오시면 보고드리겠습니다.”

    피시의 말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선에서 끊어 줘서 고마워. 이엘이 그렇게 답하자 피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묵례하며 침실을 나갔다.

    “폐하. 피시에게 단호하게 구셔도 됩니다. 다 받아 주실 필요 없습니다.”

    “경은 여전히 동생에게 엄하구나.”

    “…….”

    “조금 더 칭찬해 줘도 좋지 않나? 이전과 비교하면 피시가 얼마나 많이 성장했는지, 경도 잘 알잖아.”

    늘 안고 살던 불안함은 줄어들었고, 시키지 않아도 제 몫을 해냈다. 물론 여전히 능력을 쓰는 것은 주저하고 어려워했으나, 성장한 외형만큼이나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졌다. 그게 그가 진정 원해서 이루어진 것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매정하구나. 경이 누구보다 동생들을 아끼는 것을 짐도 아는데.”

    순간적으로 하트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며 숨을 멈췄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언젠가 조이나가 했던 말과 똑같아서.

    “가끔은 그대들이 부러워. 형제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

    “내가 또 쓸데없는 말을 했군. 목욕물이 식기 전에 다녀오겠다.”

    “시중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괜찮아.”

    후후, 웃음소리와 함께 이엘이 안쪽 욕실로 사라졌다. 하트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선 자세로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

    이상하지. 전혀 닮지 않았는데, 그녀에게서 제 죽어 버린 피붙이의 모습이 매번 느껴진다는 게. 이엘에게서 조이나를 찾았던 피시를 그토록 이해하지 못했는데. 도리어 지금의 피시는 이엘을 온전히 이엘로 받아들이고, 자신은 그녀에게서 조이나의 모습을 찾고 있다는 게…….

    참 이상하다.

    ‘이따위로 살 거면 죽어 버리든가.’

    불쑥, 어느 날의 패티스가 했던 말이 귓가에 찾아들었다.

    2차 전쟁 땐 그저 복수라는 일념하에 하나로 모이기는 했지만, 리더가 없는 무리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하트도 알고 있었다.

    그 당시의 자신은 조이나를 잃고 모든 게 공허했기에, 이후의 일 따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즈음에 이미 영존하는 생을 포기하고 제한적인 수명을 택하려고 했던 걸지도 모른다.

    별일이 없는 한 영존할 우논이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고 노화로 삶을 끝내려고 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결심을 필요로 했다. 물론 대부분의 우논들은 쉽게 영존의 삶을 버렸지만, 그건 그 안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을 때의 얘기였다.

    그들과는 다른 의미였지만, 조이나도 하트에겐 사랑이었다. 가족, 동기를 향한 애달픈 사랑의 상실이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바로 죽음을 택하지 못했던 건, 전부 피시와 패티스 때문이라. ……그들도 하트에겐 동일한 사랑이었으니까.

    피시와 패티스가 살아 있는 동안은, 자신도 죽지 못한다. 아니.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살아도 사는 게 아니던 시절. 그러니까 이엘을 만나기 전의 그 시절. 하트의 침실에 쳐들어왔던 패티스는 그에게 폭언을 쏟아부었다.

    ‘피시로도 모자라 너까지 이따위로 할 거야?’

    ‘…….’

    ‘이봐, 형님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냐고! 이러다 우리가 다 멸망해서 뒈지기를 바라?!’

    어차피 가망이 없다. 모든 게 끝났다. 그의 세상은 어머니와 조이나가 죽었을 때 이미 끝났으니까. 무의미한 삶을 억지로 이어 나가는 건 전부 남은 쌍둥이 동생들 때문이었다. 아마 피시와 패티스는 평생 모르겠지만.

    이엘의 말처럼 자신은 그들에게 매정하니까.

    ‘난 이렇게 안 죽어. 절대 이렇게 멍청하게 죽진 않을 거야.’

    그래서 패티스가 저렇게 선언했을 때, 그는 그러려니 했다. 아무리 노력해 봤자 무리의 리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이에나는 다시 와해될 테고, 도태된 종족이 되어 사냥당해 죽겠지. 그러면 제 삶도 끝나게 될 것이라고, 하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제 예상과는 달리 어떤 인간 하나가 자신들의 미래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밤낮을 끙끙 앓던 패티스는 그녀를 발견하고 희망에 찬 목소리로 다시 저를 찾아왔다.

    ‘찾았어! 드디어 찾았다고! 형! 신께선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 거야!’

    ‘설마 인간을 왕위에 올리겠단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우리의 희망이야. 우리의 왕이 될 거라고.’

    ‘미쳤어? 그 자리는 조이나의 자리야. 난 용납 못 해.’

    ‘네가 용납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냐, 하트. 내가 말했지? 나는 멍청하게 죽지 않을 거라고.’

    뱀의 성에 잡혔다던 인간 소년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르뷔 제국의 황녀였다는 소식에, 이종족의 절반은 경악했고 또 절반은 헛된 꿈을 품었다. 그래서 하트는 패티스 역시 후자와 같다고 생각했다.

    ‘종족의 번성을 위해?’

    ‘아니, 전혀. 형님, 날 뱀 따위와 같이 보면 안 되지.’

    ‘…….’

    ‘그저 우리 종족의 유지를 위해. 그거면 충분해. 왕의 존재만으로 우리는 강해질 거야. 다시 이전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과거 제국이 있던 시절, 변경백의 작위를 받아 외따로 살았던 하이에나는 영주의 존재만으로 결속을 다지던 종족이었다. 그러니 패티스는 단언했던 것이다. 단지 인간 여자가 하이에나의 왕이 되는 것만으로도 종족이 돌아올 거라고.

    그의 말대로 이엘이 영지에 오자마자 하이에나는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집단으로 존재해야 능력치가 올라가는 종족의 특성대로, 과거 잃어버렸던 20여 년의 왕의 부재를 단숨에 채워 넣었다.

    그게 서운했다고 하면…… 누가 믿어 줄까. 조이나의 자리를 함부로 뺏어 버린 그 ‘황녀’의 존재가 미웠다고 하면, 누군가는 비웃겠지. 겨우 인간 여자를 질투하는 우스운 왕자라며.

    그런데 우습게도 지금의 자신은 그녀를 황제로 받아들여 버려서. 그녀가 아닌 황제의 자리는 상상할 수도 없게 되어서.

    그녀에게서 보이는 조이나의 모습 한 조각에 추억을 붙잡고, 순간을 만들고, 앞날을 상상하게 되어 버려서.

    “경.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어느새 목욕을 마치고 나온 이엘이 하트의 앞에 서며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나 그렇듯 무뚝뚝한 표정이었으나 자신이 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모습은 처음 봐서 신선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착의를 돕겠습니다.”

    “고맙네.”

    야트막이 웃는 얼굴 위에도 조이나의 모습이 얼비친다. 이젠 자신도 잘 모르겠다. 누님을 잊지 않으려 그녀를 이용하는 건지, 이엘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게 싫어 조이나를 이용하는 건지.

    스스로를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

    이엘은 걸음을 바삐 움직여 정원으로 향했다. 황궁의 정원도 별관의 정원만큼이나 화려하고 예뻤다. 이 또한 레온이 진두지휘한 탓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워도 노아의 영지에 있던 제 정원보다는 못하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넘쳐서. 그곳은 조금 부족하지만 마음이 채워지는 곳이었기에. 아마 똑같이 꾸민다 해도 그 정원을 넘어서진 못하리라.

    “폐하!”

    꽃 속에 파묻혀 있던 피시가 그녀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황궁의 정원은 모두에게 출입이 허가된 곳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꽤 많았다. 격의 없는 피시의 태도는 당연히 수군거림을 불러왔다.

    남작이 어쩌고저쩌고, 애첩이 어쩌고저쩌고. 분명 다 들었을 텐데도 이엘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경, 시간은 좀 이르지만 티타임을 가지지 않겠나?”

    “좋습니다, 폐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젠 제법 자연스러워진 에스코트에 이엘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예법 선생을 따로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패티스가 손수 나서 그를 가르쳤는데,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완벽에 가까워졌다. 이렇게 되기까지 고생깨나 했겠지만.

    정원 한편에 마련된 테이블 위에 다과가 차려졌다. 이엘은 줄줄이 선 시종들을 전부 물리고 피시와 하트만을 남겨 두었다. 피시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한참을 종알거리다가 모두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는 방긋 웃으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윌터 백작과 그의 아들 윌터 남작이 저를 찾아왔어요.”

    “……그래. 역시 윌터 백작이로군.”

    이엘은 고요한 음성으로 대꾸하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멀리서 보기엔 화기애애한 다과회처럼 보일 정도로 평화로운 반응이었으나, 그녀의 얼굴엔 약간의 균열이 생겨 있었다.

    윌터 백작가는 제국이 있던 시절에 명망이 높았던 가문 중 하나였다. 특히 황실에 절대적인 충성을 했던 가문이었고, 아주 먼 시절의 이야기지만 한때는 황녀와 혼례를 올렸던 가문이기도 했다.

    또한 윌터 백작의 차자와 어린 시절의 이온이 친분이 있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깊은 교류가 있던 가문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황실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전담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던 궁정 화가가, 그 가문 소속이었다고 들은 것도 같다.

    이번 건국 초, 이엘은 윌터 가문의 공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작위를 올려 주겠다고 말했으나 백작은 호탕하게 웃으며 공손히 거절했다. 그는 정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싶다는 듯, 능구렁이처럼 웃으며 교묘히 자리를 벗어났다.

    흐릿했던 꿈이 반복되면서 점차 모양이 잡혀 가는 듯했다. 그녀는 그 꿈에서 보았던 반대 세력 중 하나가 윌터 가문일 것이라 추측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윌터 남작이 상단을 하나둘 사들이기 시작했다는 소리가 있었지.”

    “유클리드와도 친분이 있고요.”

    “알겠어. 그럼 남작이 그쪽을 알아봐 주도록 하게.”

    “네, 폐하.”

    유클리드의 영지는 대규모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잠시 제국이 무너졌던 때에도 노예를 부려 광물 캐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이종족들이 노예를 부렸던 게 단순히 노동의 역할을 인간에게 부여하려는 의도였던 것과는 달리, 유클리드는 그때도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활발하게 성행하는 상단 몇을 인수하기 시작한 윌터 남작과 친분이 생겼다고? 단순한 사업에 근거한 만남이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문제는 상대가 하필 유클리드라는 점이…….

    “폐하, 유클리드 백작이 배알을 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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