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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44화 (244/488)

244화

“나를 봐, 르네.”

“…….”

“공작이 살아 있듯, 나도 여기 살아 있어.”

겉옷을 벗고 여러 겹의 옷을 벗으면 그가 남긴 상흔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르네는 언제나 그곳에서 멈췄다. 그가 황제에게 끝까지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내가 살아난 증거야. 흉측하다고 외면할 수 없어.”

“흉측해서 외면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공의 과거가 흉측한가?”

“…….”

“그렇다면 공작은 내 곁에 끝까지 머물 수 없어.”

과거에 발목이 잡히면 이 길을 온전히 걸어갈 수 없단 의미였다. 그건 르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이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단호한 그녀의 어조에 르네는 짧게 침음하다가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가렸다.

무엇이 용맹한 종족인가. 대체 어디가 늠름하여 고고한 종족이라고. 한낱 상처에 과거를 잊지 못하여 좁힐 수 없는 거리라니. 로빈이 그토록 원하는 영역에 들어갈 자격이 제게 주어졌어도 르네는 여전히 그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알겠다. 이 정도는 홀로 할 수 있으니 돌아 있어.”

비웃음을 당할 만하다. 로빈은 노아를 볼 때마다 이죽거렸지만, 실상 그 비웃음은 제게 닿아야 온당하다. 마음을 섞은 노아와 달리 자신은 여전히 그녀에게 닿지 못한다. 설령 이엘이 허락한다고 해도 과거를 버리지 못하면 여전히 닿지 못해.

“혹 그대도 꿈을 꾸는가?”

돌아선 그녀에게서 차분한 질문이 들려왔다. 이제 돌아봐도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 몸을 돌렸다. 그러나 무엇을 묻는지 몰라, 여전히 대답하지는 못했다. 이엘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모호한 웃음을 짓더니 곧 침대 안으로 들어가 잘 준비를 마쳤다.

그는 언제나처럼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세를 올곧게 정리하고 섰다. 그녀의 아름다운 녹안이 눈꺼풀 속에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같이 밤을 보낸 것도 셀 수 없이 많은데, 언제나 달빛에 비친 이엘의 눈을 마주하는 건 어려웠다. 오늘도 그의 귀가 조금 붉어졌다.

“르네 공.”

“예, 폐하. 하문하십시오.”

“꿈을 꾸는지 물었어.”

“어떤 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죽는 꿈.”

“…….”

“내가 죽었던 그날.”

숨이 턱 막혔다.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 이엘의 입에서 나온 제 과거가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공작이 나를 죽였던 그날을, 공도 꾸는 건가?”

“그 말씀은 폐하께서도 꾸신다는 거군요.”

“응, 얼마 전부터.”

“…….”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더군.”

끔찍해서였나, 무서워서였나. 어린 날의 황녀는 죽어야만 했던 그날의 기억을 봉인해 버렸다. 그 탓에 저를 죽였던 이가 독수리였음도 잊고 살았다. 르네를 조우했던 날, 독수리의 왕은 자신에게서 어린 황녀를 보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꾸고 있습니다.”

“내가 몇 번씩 공작의 손에 죽었나?”

“예.”

“나도 몇 번씩 공작의 손에 죽더군.”

“…….”

“하지만 나는 살아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 자책해.”

마른침을 삼키던 르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 근처로 다가갔다. 흘러내렸던 이불을 끌어 올려 따뜻하게 덮어 주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나 이 거리를 좁히려면 저 상흔과 비슷한 크기의 상처가 제게도 있어야 함을, 르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잠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렇게 세상모르고 잠든 모습을 볼 때면, 전쟁을 피해 제 영지의 동굴에서 함께 잠들었던 그날을 떠올리곤 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는, 그냥 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족하기도 했는데. 소질 없는 피아노를 치느라 고생한 네 손가락이 가여운 정도였을 뿐인데.

모든 걸 알게 된 지금은, 그냥 네 존재 자체가 안쓰럽고 미안해서.

“주무십시오, 폐하. 제가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나라에 내가 있음에 감사해서.

*

“어서 오세요, 공작.”

“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기도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럼 자리를 이동할까요?”

선선히 웃는 오드를 향해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마련된 응접실로 들어선 노아는 문을 닫고 커튼까지 전부 쳐서 외부와 완벽히 차단시켰다.

“공작. 방음도 할까요?”

“예, 그렇게 해 주시면 더 좋습니다.”

“심각한 일인가 보군요.”

“…….”

대충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예상했다. 도저히 방법을 찾지 못해 저를 찾아왔겠지. 그는 그렇게나 헌신적이어서……. 오드는 덜 가려진 커튼 틈새로 스며든 황궁을 쳐다보다가 이내 성전 내부에 넓은 결계를 쳤다.

“이제 말씀해 보세요, 공작.”

“어떻게 하면 그녀를 도울 수 있습니까?”

“지금도 충분히 돕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

“오드 님. 당신은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폐하를 보좌했습니다. 그런 신의 대리자인 당신이 폐하의 상황을 모를 리 없습니다. 왜 알면서도 이러한 상황이 오는 것을 그대로 두신 겁니까?”

“그 안에 폐하의 뜻도 있습니까?”

“폐하께서는……!”

“선택은 폐하께서 하셨습니다, 공작.”

“…….”

“신을 버리고 악을 택한 건 나타니엘이에요.”

짧게 침음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냉혹하지만 그게 진실이었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본다면 그녀가 신을 버린 셈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잖아. 그건 이엘이 자의로 선택한 것도 아닌데.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

“엘은, 아이를 갖고 싶어 합니다.”

노아는 잔뜩 내려앉은 목소리로 힘겹게 운을 뗐다.

“그녀는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죽어 가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게 제 자식이라면, 그 마음이 어떨지…… 당신도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공작.”

“저는 그녀가 아이를 낳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

“우리의 죄가 그녀의 의무로 이어져선 안 되니까요.”

마땅한 벌이다. 이 세계가 무너지고 모두가 멸망하는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이건 오롯이 자신들의 벌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신께서 바라시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불경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신께선 차라리 우리들을 지우고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를 바라실지 모른다는.

“하지만 엘이 바라고 있습니다.”

“…….”

“제가 채워 주지 못하는 피붙이를 향한 간절함이, 문득문득 느껴집니다.”

아무리 무리 생활을 하는 이종족이라 할지라도, 인간들의 가족애를 동일하게 느끼진 못한다. 그건 생존에 매달려야 하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감정이었다.

하다못해 그녀의 오라비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 가정까지 하게 되는 건 내 죄책감 때문이겠지. 노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며 탄식을 삼켰다. 내가…… 내가 황자를 죽이지만 않았어도.

“……오드 님, 저는 어떻게든 그녀를 지키고 싶습니다.”

“각하.”

“더는 그녀에게 상실을 안겨 줄 순 없습니다.”

“그 전에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왜 ‘그자’가 엘에게 나타났을까요?”

“…….”

“왜 ‘그자’는 엘에게 그런 것을 요구했을까요.”

오드는 가만히 노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늑대 특유의 짙고 무거운 검은색 눈동자가 꽤 지친 듯 가라앉은 상태였다. 오드는 남자의 올곧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대가가 필요합니다.”

“대가?”

“알아내세요, 공작.”

“…….”

“그녀는 당신께 침묵할 테니, 당신이 알아내셔서 저를 찾아오십시오.”

그렇다면 그때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오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부드러운 인상으로 돌아와 빙긋 미소 지었다.

*

“폐하.”

“…….”

“폐하―”

쏟아지는 햇살이 눈두덩을 건드려 진작 잠에서 깼다. 그러나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터라 그 기분을 잃고 싶지 않아, 부러 눈을 감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이엘의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남자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날씨가 좋아요. 어서 일어나세요.”

이엘은 그의 신난 듯한 목소리에 작게 웃으며 눈을 떴다. 쏟아지는 햇살 옆으로, 동그란 안경 너머 맑은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역광으로 그늘이 생겼는데도 피시의 아름다운 미소는 언제나처럼 바르게 그려져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공작은 나갔나?”

“공작이요? 어떤 공작이요? 밖엔 하트 경밖에 없어요.”

피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잠들기 전에 보았던 르네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새벽녘에 돌아온 하트와 교대를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일어나기도 전에 피시가 침실에 들어올 수 있었겠지.

그 생각을 하며 르네가 서 있던 곳을 망연히 바라보는데, 그녀의 시야에 회백색 머리카락이 불쑥 찾아들었다.

“폐하? 왜 그러세요?”

“아니. 괜찮아. 근데 이렇게 빨리 입궁을 하다니, 영지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녀의 걱정 어린 질문에 피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의자에 걸쳐 놓은 숄을 가져와 이엘의 어깨 위에 둘러 주었다.

“아니요. 보고 싶어서 달려왔어요.”

오랜만에 영지에 다녀와 기분이 좋았던 건지 피시의 낯빛이 좋아 보였다. 이엘은 종알거리는 피시를 바라보며 덩달아 엷은 미소를 그렸다.

“폐하. 저랑 같이 나가요. 정원에 꽃이 많이 폈어요.”

“오찬 모임이 있어. 준비하려면 조금 빠듯한데.”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그녀의 허락에 안으로 들어선 것은 하트였다. 어제 귀가할 때와 다를 바 없이 단정하고 딱딱한 차림새 그대로 그가 돌아왔다.

“폐하를 뵙습니다. 기침하셨습니까?”

“또 새벽에 입궁했나 보군. 경의 건강은 짐에게도 중요하다. 쉴 수 있을 때 쉬도록 해.”

“충분히 쉬었습니다.”

하여간 고집은. 이엘이 중얼거리며 이불을 걷고 침대 밖으로 발을 내밀자, 피시가 기다렸다는 듯 실내용 슬리퍼를 가져와 그녀의 발 앞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제게 시간을 조금만 허락해 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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